정자전쟁 - 불륜, 성적 갈등, 침실의 각축전
로빈 베이커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학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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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전자에 무슨 일이  

모든 생물은 번식에 대한 강한 충동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생명의 근본적인 특성이다.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매우 작은 곤충에서부터 영장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생활은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으며, 전투적이고 심지어 치명적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소아성애자(Pedophile)를 연상시키는 바다사자의 교미에서부터 아침드라마의 소재이자 가정 법원의 단골인 불륜남녀까지, 이들의 사생활은 기묘하기까지 하다.
이렇듯 동물이나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비정상적인(?) 섹스와 파트너 바꾸기 놀이의 기저에는 어떤 저주가 내려진건지, 아니 더 근본적으로 인간들은 왜 그리 많은 시간과 노력을 섹스에 혹은 그와 연관된 일에 투자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어려운 심리학보다 좀 더 낯뜨거운 진화생물학적인 관점에서. 

#. 화려한 수컷과 까다로운 암컷의 비열한 전술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 계모와 언니들에게 펀치를 날리는 장면은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명장면이다. 이런 예는 신데렐라를 위시하여 각종 공주님들과 미녀들, 그리고 오늘날 김삼순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녀들이 만나야만 했던 왕자, 미남 혹은 재벌 2세들은 언제나 [운명]이라는 포장지에 싸여 그녀들에게 배달되는데,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쟁취한 그들의 사랑은 무지개를 뚝 떼어 놓은 것처럼 설레고 신묘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거기에 단 한 번의 침실도, 속옷 속의 상황도 적나라하게 묘사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들의 촉촉한 눈망울, 그리고 그들의 깊고 달콤한 눈빛 뒤에 몇 억 마리의 전투적 정자와 앙큼한 난자 한 마리가 지략 대결을 벌인다고 생각하니, 뭐랄까, '맙소사'랄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생명체라면 여지없이 자신의 유전자를 효과적으로 많이 남겨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다. 인간의 경우 이를 위해 섹스를 하고, 물론 인간의 경우 유희로서의 섹스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도 있다, 여튼 효과적인 섹스를 위해 전략적 행동이 필요하다. 간이 크다면, 수많은 아이들의 유전적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남성들은 자신과 똑같은 능력을 지닌 적, 즉 다른 남성으로부터 자신의 유전자를 지키기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정자를 발전시켰는데, 그것을 이책에서는 '정자전쟁'이라 부른다. '정자전쟁'은 말 그대로 가임기의 여성, 아내 혹은 애인,의 난자를 차지하기 위해  정자가 벌이는 눈물겨운 사투다. 승자인지 패자인지 9개월 뒤에도 확신할 수 없는 엽기적인 전쟁이지만 말이다. 

이에 반해 한 달에 한 번 밖에 포태할 수 없는 여성의 경우 양보다 질이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되도록 좋은 유전자,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있는 유전자를 식별하기 위해 고도의 탐색전을 실행하고, 기회가 포착되면 그것이 배우자가 아니더라도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 이 책의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즉, 짝짓기 시장에 나온 남성과 여성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자신의 유전자에 더 좋은 유전자를 결합시킨 근사한 후세를 제작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 끝나지 않을 우리들의 가족사

끊임없는 외도와 배우자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우리의 조상들은 그 결과물로 으뜸 유전자를 물려받은 경쟁력있는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겼다. 남은 일은 니들이 알아서 해라,는 준엄한 명령을 숨겨놓은 채 말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음모를 알아차릴 수 없다. 이것은 고도의 기술로, 자신도 모르게 몸 속 어딘가에 숨겨진 암호로서, 조건이 주어지면 여타의 환상과 함께 작동되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미션을 수행한 당사자도 자신의 행위에서 원인을 찾기 쉽지않다. 찾는다해도 로빈 베이커의 목소리를 빌리자면 '내 몸은 더이상 나만의 몸이 아니로세, 이는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다리일 뿐이야.'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도 언급했지만, 모든 것이 유전자의 탓이니까 어떤 행동도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발언은 오다가다 벼락을 맞을 확률만 높일 뿐이다.

저자는 필요 이상의 정자를 만들어 내는 남자의 몸을, 배란기를 숨기는 여자의 신체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지 누구에게 면죄부를 주려함은 절대 아니다. 그러니 음흉한 미소는 당장 거두시라. 
나는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까만 조약돌같은 그와 그녀의 눈동자에서 내가 믿고 있는 혹은 믿고 싶은 사랑을 읽고 싶다. 한 발 더 나아가 동요없는 마음을, 그것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가족사가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내 기대가 물거품이 되는 날이 온다 해도 결단코 그것을 정자와 난자의 문제로 돌리지 않을것이다. 하여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고 화학적 메세지에 충실했던 그, 혹은 그녀에게 가해질 나의 응징은 참으로 길고 무서우리라.
마지막으로 이 책을 덮으며 끝나지 않을 우리들의 모든 가족사에 그리고 모든 섹스에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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