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법도 법이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사람은 매우 익숙하게 듣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했다는 말인데, 과연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어쩌면 무덤에서 나는 아니라고 절규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우선 악법도 법이라는 언설이 나올때 마다 혐의를 받고 있는 법실증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법실증주의 관점에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제가 참이 될 수 있는지.
권영성 교수의 헌법학원론을 보면 "사회나 개인에 대하여 국가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입장(법실증주의)"이라고 말하고 있다.(2002년, 382 - 최근 책을 안사서...죄송)
언론에 가끔씩 법실증주의가 거론될 때에도 "법률의 문자적 해석에 최우선 가치를 두는 이론"정도로 설명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법실증주의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하기에 적절치 않고 역량도 안되므로 간단히 설명하겠다.
법실증주의는 19세기 근대국가가 성립되려는 움직임이 있고, 시민의 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시기에 태동하였다. 법실증주의가 가장 꽃피운 독일에서는 법실증주의가 개념법학, 일반법학, 순수법학으로 발전한다.
거칠게 말하면 법실증주의는 "법관은 법률에 완전히 기속된다. 법체계가 흠결이 없으며, 사안이 주어지면 그 체계로부터 논리적으로 올바른 답이 도출된다고 할 때, 법관의 자유재량의 여지는 사라지게 된다. 법관은 다른 어떤 윤리적 관점이나 사회현실에 대한 고려없이, 오로지 법체계만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면 올바른 법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관의 임무는 다만 실정법규를 해석하는 것이지 어떤 윤리적 사명을 실현하거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된다" (법철학, 강경선·정태욱 공저, 22쪽)
그렇다. 저 문구 그대로 보면 이렇게 불합리한 이론은 없어보인다. 사회적 맥락이 반영되지 않은 법해석이란 있을 수 없다. 제반 사정과 사회현실이 고려 되어야만 올바른 법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저러한 이론이 나오게 된 사회적 배경도 이론의 해석에 반영하여야 함이 옳다. 이 시기는 프랑스 혁명으로 시민의 권리에 대한 주장이 터져 나오던 시기였고,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의 철권통치로 개인의 인권이란 무시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법률가에 대한 시민적 불신의 반영으로 "있는 법을 그대로 적용하라"는 "법의 지배"정신의 발로인 것이다.
"법이 정치적 고려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흔들리게 되면 단기적으로는 융통성이 있을것 같지만, 종국에 가서는 질서의 근본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법관이 법률에 종속하지 않고 개인적인 판단을 앞세우게 되면 이 또한 원칙의 확보에 어려움을 낳게 되고, 결국 자의적인 법질서를 결과할 수 있다.....법은 법관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의 총의, 즉 일반의사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다. 법관의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바로 그 인민의 총의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위의 책, 31쪽)
따라서 역사적 맥락에서의 법실증주의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총의로서의 법을 법률가의 정치적 해석을 배제하고 있는 거라도 잘 적용해라"라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법실증주의로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제는 합리화 되지 않는다.
두번째, 소크라테스가 그랬단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 말이 맞다고 누가 정당성을 부여했는가.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의 이름이 바로 정당성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 이에 대해서는 다른 훌륭한 저술이 있으므로 그것을 참조하면 되겠다.(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인가, 강정인, 문학과지성사)
세번째, 그렇다면 사회계약론이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원론적으로 평등하다는 전제하에 권리와 의무를 계약한다.(실제 나는 계약한적 없다. 이에 대해서 롤스는 '동의할 법한 원칙'이라고 하여 가상적 합의를 상정한다) 그리고 대표를 선출하고(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하위법의 제정을 위탁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우리의 대표가 정한 법률에 구속될 것을 계약하였으므로, 이의 합법적 폐지가 없는 한 이를 준수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절차적 합법성이 결과의 정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존 롤스는 "헌법이 정의롭다고 해서 거기에 근거하여 제정된 법률의 정의로움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다수가 입법한 것 -그것이 일정한 한계를 넘지 않는 한-을 중수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하여 다수가 제정한 것 자체를 정의롭다고 간주해야 할 책무나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법률을 제정할 권리가 그 결정이 올바르게 작성될 것이라는 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시민은 그 행위에 있어 민주적 권위의 판단에 복종하지만, 그는 자신의 파단마저 그것에 종속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만약 다수결에 의해 제정된 것이 부정의의 일정한 한계를 넘으면, 시민은 시민 불복종을 고려할 수 있다."고 시민불복종론을 펴고 있다.(존 롤스, 시민불복종의 정당화, 위책에서 재인용)
즉, 사회계약이라는 절차적 정의가 그 결과 도출된 법률의 내용적 정의를 보장하지는 못하며, 그럴 경우 시민은 일정한 경우 불복종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법은 언제나 불복종의 대상인가?
이에 앞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제가 주로 언제 사용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명제는 어떠한 정권이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뭇 다른 내용을 가진다.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정권이 사용하게 되면 준법의 강조로 사용되지만, 정당성을 결여한 정권이 사용하게 되면 정권에 대한 굴종을 의미하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저 명제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너무도 자명하다.(나만 자명한가?)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역사적 맥락만을 가지고 당 명제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다원화 사회라고 불리는 현사회에서 어떤게 악법인가는 100인 100색의 주장이 가능하며, 악법에는 무조건적 불복종이 가능하다면 정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요건은 세가지 정도로 생각된다.
첫번째는 법에 심대한 부정의가 있어야 한다.
두번째, 정당한 절차를 모두 거쳤어야 한다. 그리고 정당한 시정의 절차가 존재하여야 한다.
세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의 시정이 의도적으로 방치, 거부 되고 있어야 한다.
우선 불복종하고자 하는 법에 심대한 부정의가 있어야 한다. 심대한 부정의가 무엇이냐의 논의는 또 정의가 무었이냐의 논의를 불러 오므로, 이건 다른 이에게 논의를 맡기고, 대략 인권침해적 내용이나 민주주의에 만하는 내용쯤으로 인식해 두자.
두번째, 정당한 구제 절차가 존재하여야 하며, 이를 모두 거쳤어야 한다. 한국의 경우 3심의 재판과 헌법소원, 법률위헌심판 등의 제도가 존재한다.
만약 이런 정정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회계약에 의하여 정당성을 부여받은 대표들이 정한 법은 지켜야하며, 그 부정의한 법을 만든 입법기관에 시민불복종이 인정되지 않으므로 스스로 물러나거나, 개정하지 않는다면 시민은 계속 악법을 지켜야 하는 불합리가 발생한다."
따라서 정당한 절차가 존재하여야 하며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복종의 정당성은 두번째에서 충족된다고 하겠다.
그리고 절차가 존재한다면 이를 모두 거쳐 합법적 시정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세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행위에도 불구하고 부정의가 시정되지 않고(국가보안법과 같은 경우를 상정하면) 의도적으로 방임내지는 거부되고 있는 상황이라면 시민의 불복종은 정당화 된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멋지게 마무리 하고 싶지만 필력이 딸리는 관계로 존롤스의 논문을 인용한다.
"어느 경우나부정의는 굴종 또는 저항을 초래한다. 그러나 굴종은 압제자의 경멸을 야기하고 그의 의도를 확인해 주는 것이다. 적정한 기간 동안 정상적인 방식으로 합당한 정치적 호소를 한 연후에 사람들이 시민 불복종을 통해 기본적인 평등한 자유권의 침해에 대해 반대한다면, 내가 믿건대, 이로 인해 이러한 자유들이 취약해 지기 보다는 더욱 확고해질 것이다. 정당한 시민 불복종은 적절히 행사된다면 입헌 정체를 안정화시키는 기제이며, 그 정체를 보다 확고하게 정의롭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