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잡 2에서 유시민 님이 정치하는 사람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지녀야 한다고 말씀하신 김대중 대통령 어록을 전했다. 세상사에 다 적용되며 육아할 때도 필요한 말인듯하다.

 

중용.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적 감각도 잃지 말아야 한다.

 

앞의 책들은 자녀교육 분야 상위권 도서이다. 이제 육아서는 더 이상 사서 보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도 도서관에서는 빌리기 힘드니 사버릴까 하는 유혹이 든다. 사서 보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특히 잠수네 책이 그렇다.

 

잠수네에서는 늘 과도한 사교육, 여기서는 학원행을 하지 말라고 하는데 교사 출신 엄마나 고학력 엄마가 집에서 끼고 가르치는 게 더 고도의 사교육이 아닐까.

잠수네도 역시 유료 사이트이고 책도 판매하고 있다.

 

잠수네 책에 그래도 합리적인 주장이 많다고 생각되어 빌려보기도 하고 1, 2학년 공부법은 사서도 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런 방식이 과도한 사교육이 아니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학원에 보내는 사람들을 뭔가 한 단계 낮추어보는 시선이 보인다.

 

잠수네 책은 교육 관련 직업이거나 여유 있는 집 전업인 엄마가 오랜시간 꾸준히 공을 들여 하면 빛을 볼 수 있다. 아이가 어느 정도 학습 동기가 높고 공부 재능도 있어야 하고.

 

책을 볼수록 또는 인류의 역사를 보건대 양질의? 아니 투자대비 효율적인 교육은 사교육으로 달성할 수 있다는 게 와닿는다.

공부든 예체능이든 어느 분야든.

 

다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공교육의 가치와 효용에 대해 고민해야 하겠고

전체 사회 구성원이 행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공교육이 나아가야 할 것인데

개개인의 욕망과 사회 전체의 이익이 상충하기에 교육 정책을 세우기 쉽지 않다.

 

학부모 대다수는 아직은 교육을 통해 계층의 사다리를 하나라도 더 오르기를 원한다.

 

좀더 거칠게 말하면

남의 아이들은 평범한? 사회구성원의 하나여도 족하고

자신의 아이만은 뭔가 특별한? 삶을 원하는 것이 보통의 부모이다.

 

게다가 평범?의 기준마저 높다.

자기 밥벌이나 잘하면 된다고 하는데 이마저 쉽지 않은 세상 -_-

 

각자도생이다. 그냥.

 

(나도 교육을 통해 뭔가 달라질 거라는 헛된 바람을 품고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아이가 커갈수록 느낀다. 그래도 네가 항상 엄마 욕심 쫌 버려, 하는 말은 새겨듣고 있어.)

 

서천석 씨가 말한 대로 어쩌면 자녀에게만은 자신보다 더 특별한 삶을 기대하게 되기에 자녀교육이 이리도 어려운 것이겠지. 진보좌파?여도 자녀들은 특목고에 보내고 아이가 원했기에 선택한 것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한다. 그냥 우리 아이 역시 잘하면 좋겠다고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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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따뜻한 개천으로 내려오든가

내가 사는 서울 동작구의 작은 보습학원 앞에는 몇 년째 똑같은 현수막 하나가 내걸려 있다. ‘축! ○○고 ○○○양 서울대 ○○과 합격.’ 굳이 분류하자면 하위권 학과에 해당하지만, 최초의 서울대 합격생을 배출한 동네학원 원장님의 벅찬 보람과 긍지가 자간마다 흘러 넘친다. 출퇴근길 지나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이 삐져나오며 혼잣말을 다 중얼거릴 정도. ‘○○아, 공부는 잘하고 있니?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 한국사회의 역군이 되어다오. 강남 금수저들한테 기죽지 말고.’ 남들은 저런 플래카드가 눈꼴사납다지만, 나는 볼 때마다 대치동에 가지 않은 ○○양과 그 부모님, 학원 원장님의 어깨를 안아주고 싶은 기분이다. 학군 안 좋은 평준화 지역 일반고에서 동네학원에 다니며 이룬 저 성취가 더 없이 대견하다.

어떤 반론들이 나올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서울대 입학이 성취의 잣대가 되는 구시대적 학벌 이데올로기를 타파해야 한다, 교육을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보는 저렴한 사고방식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개천에서 용 나기보다는 살 만한 개천을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 등등. 말인즉슨 구구절절 옳다. 그러나 발화(發話)라는 행위는 그 내용보다 형식, 주체, 시점, 상황이 더 많은 정보를 발신한다. 누가 저 말을 하는가. 왜 저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대학교수들이며, 거개가 서울대를 나왔고, 자기 자식을 특목고와 로스쿨, 의전원에 보낸 사람들인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싫어한다는 사람들 중 개천 출신을 본 일이 없다. 모두가 용이 될 필요가 없다고 웅변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문장 뒤엔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저절로 용이 되고 말았네. 미안~’이 생략돼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악의적 생각마저 든다.

교육은 역사상 신분상승의 수단이 아니었던 적이 한번도 없다. 그것만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말하면 옳지 않으나, 그리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도 위선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왜 교육만이 성공의 사다리인가, 교육 말고도 개천에서 강으로 거슬러 오를 더 많은 사다리들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지, 교육은 신분상승의 수단이 아니라며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자신과 그 자식은 이미 올라온 사다리. 개천용 반대론자들에겐 개천의 정서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 유토피아적 미래를 그려내는 논리적 전망만 승할 뿐 현재를 지배하는 가난의 울분을 너무 모른다. 그러니 내가 하는 사교육은 아이의 재능을 꽃피워주려는 고상한 욕망이고, 네가 하는 사교육은 신분상승에 목을 건 저렴한 욕망이 된다.

내 주제에 이만하면 용이지 생각하는 나로서는 개천에서 아등바등 기어올라 여기라도 와보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이곳은 살기가 이토록 좋구나. 내 가족, 친구, 친척, 이웃들도 다 건너오면 좋겠다, 나만 건너와 슬프고 미안하고 외롭다, 교육 말고 다른 방편으로 이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개천용들은 쉽게 개천을 저버린다고 ‘내추럴 본 드래곤’들은 함부로 말하지만, 떠나 돌아오지 않을지언정 한 명이라도 더 위로 올려 보내고 싶은 게 개천의 애틋한 마음이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용이 되어 구름 위로 날아오르지 않아도,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 쳐다보며 출혈경쟁 하지 말고 예쁘고 따뜻한 개천 만드는 데 힘을 쏟자!” 몇 해 전 트위터에서 화제가 됐던 어느 유명인사의 문장들이다. 그의 말마따나 모두가 용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 모두가 용이 될 필요가 없는 사회는 도래하지 않았다. 너희들은 올라오지 말라는 사다리 걷어차기가 아니라면, 개천용을 더 이상 꿈꾸지 말라는 말을 아직은 할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정히 그 말을 하고 싶다면, 당신들이 먼저 아이들 손 꼭 잡고 개천으로 내려오라. 아직은 개천이 따뜻하지 않아 올 수 없다면, 그 입 다물라.
박선영 기획취재부 차장대우 aurevoir@hankookilbo.com 2017년 8월 2일 한국일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469&aid=0000223174&sid1=001

 

 

그런데 여러 강연을 보면 대중을 계몽 대상으로 보고 끝없이 내려놓으라고 한다.

그게 되나, 참. 안 되니 책들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이겠지.

 

 <엄마 반성문>은 한창 유행하는 책인듯한데 안 봐도 알듯하다. 요란하게 내려놓으라고 하시더니 역시 엄마가 원하는 또다른 코칭 방향으로 자녀를 이끄는 것이 아닌지 조금 염려된다. 책을 다 읽어보지 않았고 출간 내용을 자녀들이 동의했다고 하니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신 건 맞겠지.

 

어떤 삶이 바르냐를 쉽게 판단할 수 없듯이 어떤 교육이 바르냐를 쉽게 판단하기 힘들다.

삶이 계속되고 배움도 계속되기에 그냥 끝없이 고민해봐야 할듯하다.

 

공교육은 무조건 올바르고 사교육은 악인가? 이게 애들 기르면서 화두이다.

좀더 생각이 정돈되면 따로 써보아야겠다.

공교육이나 사교육이나 다 각자의 영역에서 바르게 기능하면 좋겠다.

 

또한 교육이 사회를 바꾸는 게 아니라 교육은 사회에 종속되어 있고 사회가 크게 바뀌어야 교육이 바뀐다, 정도로 정리해두고 있다.

 

일단 시급이라도 좀 팍팍 오르든가.

 

*

<가정훈육백과사전>은 일본책이긴 하지만 지금 이 시기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듯해 사서 보고 싶다. 정말 어릴 때 특별히 가정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듯하다. 그냥 엄마가 열심히 힘들게 고생하시며 우리를 키워주셨다는 건 알지만 엄마는 일에 치여 우리에게 세세하게 뭔가를 알려주실 짬이 없었다. 

 

아들이 고칠 점은 연필 잡는 법과 필체. 누워서 책보는 습관

딸은 오빠를 가르치려드는 것과 늦게 먹는 습관.

 

사실 굳이 책을 사서 보지 않아도 아이들만 잘 관찰하고 있다가 부드럽게 타일러주기만 하면 되는 건데 ㅋㅋㅋㅋㅋ사실 알라딘 도자기 식판이 탐나 이런저런 책을 살 궁리를 하고 있다.

 

 

 

 

 

 

 

 

 

 

 

 

 

 

 

 

유아기에 유명회사 전집을 사들이려는 유혹을 피하게 해준 책들이다.

그림책을 보는 눈을 키우게 했던 읽기 편한 대중서들이다.

 

 

 

 

 

 

 

 

 

 

 

 

 

 

조금 더 옛이야기나 그림책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하기 좋은 책들이다.

 

 

 

 

 

 

 

 

 

 

 

 

 

 

 

 

 

<어린이책 읽는 법>을 어제 읽었는데 초등 2, 4학년을 키우고 있어서 그런지 잘 읽힌다. 어린이책 편집자 출신으로 지금은 어린이 독서교실을 통해 아이들과 만나고 있는 저자가 쓴 책이다. 아이들 취향을 존중하면서 아이들 관심사에 맞게 책을 권해주시는듯하다. 그런데 사례가 너무나 개별적이라 나오는 책들만 참고해도 좋을듯하다.

 

초등 가면 독서논술 한다고 한우리나 플라톤에 달려가거나 학교 방과후 하게 되는 게 보편적이다.

따로 전문 저자의 독서교실을 보내는 분들은 어떻게 알고 보내시는 걸까.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합리적이다. 독서가 교과 공부를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른 흥미거리가 많은 세상에서 독서의 참재미를 알 수 있게 이끌어주면 좋고 책을 많이 읽는 것 자체가 다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독서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세상 하고 많은 활동 중의 하나일 뿐이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운동이 제일 좋다고 하듯이 책읽는 사람들 역시 독서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일 뿐.

 

<읽는 삶, 만드는 삶>은 지난 달에 정말 잘 읽은 책이다. 기간을 연기해서 한번 더 읽었다.

 

나의 오래 전 글자공장소녀 시절도 떠오르고 밋밋하던 나의 대학시절과도 겹쳐 보이는 지점이 있다. 대학생활을 돌아보며 늘 자학하지만, 망해가던 동아리 회장으로 동아리방을 잘 청소해두고 그곳에서 혼자 책 읽던 때도 나쁘지 않았다. 인원이 적어서 장점은 동아리방에 거의 늘 사람이 없었다는 것. 서로의 공강 시간 비교해보고 거의 독서실로 활용할 정도로 사람이 모이지 않는 동아리였다. ㅋ

 

저자의 책 취향과 잘 맞아서 정말 끝없이 마자마자 하며 읽었다.

 

 

 

 

 

 

 

 

 

 

 

 

 

이 책은 그림책을 읽는 어른들을 위한 책이다. 자신의 감정, 상황에 맞게 그림책을 선택할 수 있게 안내하고 있다. 아직 못본 그림책들이 많아서 차차 찾아볼 생각이다.  

 

아이만이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그림책이 필요해.

 

도무지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머릿속이 복잡할 때 정겹고 따스한 그림에 기대에 한 계절을 나기도 했다.

 

이렇게 잡생각을 많이 하는 걸 보니

좀더 그림책을 읽어야

아니 보아야 하는 시기인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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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아이 다니는 학교에서 책읽기 수업이 있는 날이라 다녀왔다.

 

하고 많은 아난시 이야기 중에서 우리학교에서 선택한 책은 시공사 버전

<이야기를 가져온 거미 아난시>이다.

 

처음에는 표지를 보고 그냥 귀엽네, 하고 말았는데 내용을 읽다보니 입에 착착 감기는 맛도 없고 스토리도 이해가 안 되어 보니 우리나라 작가가 각색하고 그림도 우리가 새로 그린 것이다.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다만 개악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시공사 버전은 읽기 힘들었다. 이유는 이제부터 설명해보련다.

 

게일 헤일리의 1971년 칼데콧상 수상작 <이야기 이야기>는 아프리가 설화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삽화도 최대한 아프리카 특유의 건강한 생명력을 살리려고 했다.

 

 

헤일리의 <이야기 이야기>는 아난스라는 지혜로운 거미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이야기를 구해오는 과정을 흥미롭게 담았다.  아난스는 하느님이 이야기 값으로 제시한 세 가지 조건 즉, 표범 오세보, 말벌 믐보로, 요정 므모아티아을 구해온다. 하느님은 아난스에게 이야기가 든 황금상자를 주고, 아난스가 그 상자를 열자 이야기들이 세상에 퍼지게 된다.

 

마무리도 훌륭하다

"이 이야기는 내가 했으니까 내 이야기란다. 듣기 좋았든 안 좋았든 말이야. 네가 가질 건 갖고, 내게 남길 건 남기렴." 

 

 

 

시공사 버전은 일단 삽화가 표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종일관 알록달록하다. 아프리카의 색감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무속의 색 같다.  학교 책이라 반납해서 삽화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찍어 보일 수가 없어 아쉽다. 일일이 보이지 않아도 딱 표지풍이다.

 

이야기도 마구마구 변형시켰다. 아프리카 이야기에 우리나라 설화를 섞어서.

 

 

 

 

 

 

 

 

 

 

 

 

 

 

 

시공사 버전 스토리의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의 원형을 무리하게 훼손해서 아이들이 단번에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 되어버렸다. 나조차 한 번 읽고 이해하기 힘들어 몇 번 다시 보았다.

 

하늘신은 아난시에게 이야기를 줄 테니 비단뱀, 말벌, 표범, 요정을 구해오라고 한다. 무려 네 가지다. 옛이야기에서 '3'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무리하게 끼워 넣었다. 이렇게 하면 이야기가 다채로워질 거라 생각하는지.

 

게일 헤일리의 <이야기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프리카에서는 중요한 말을 반복하여 표현하는데 시공사 버전에서는 '길고 길고 긴' 이렇게 우리말을 단순 반복했다. <이야기 이야기>에서 나온 아프리카말 트웨, 트웨, 트웨라든가 하는 재미있는 말놀이가 거의  빠졌다. 막판에 코제코제코제 콰쿠 아난시 한번 나온다.   

 

표범을 잡게 된 경위도 <이야기 이야기>와 시공사 아난시가 다르다. <이야기 이야기>에서는 표범을 덩굴로 묶어 데려오는데 시공사 아난시에서는 뜬끔없는 비단뱀을 묶어 데려온다.

 

그리고 시공사 버전 표범은 우리나라 호랑이같이 구덩이에 빠졌다가 아난시의 그물에 묶여 잡힌다.

 

말벌을 잡으러 갈 때 거미 아난스는 바나나잎을 쓰는데 시공사 아난시는 질경이 잎을 머리에 쓴다. 아프리카에 질경이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굳이 자연물까지 바꿔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요정을 잡을 때 쓴 아프리카 토속인형인 아쿠아바는 눈이 쪽 째지고 얼굴이 크고 팔다리가 짧은 게 특징인데 시공사 아쿠아 인형은 아쿠아바와 거리가 멀다.

 

 

 

아난시 성품도 아주 경박해졌다. 동물을 잡고는 꼭 멍청아, 라고 한다.

 

하늘신이 전에는 이야기를 상자에 넣어두어 이야기가 퍼지지 않았다는 그 부분이 시공사 버전에 아예 빠져 있다.

 

이렇게 아프리카 이야기도 아닌 것이 우리나라 설화도 아닌 것이 그냥 시공사 버전의 아난시가 되었다.

 

그래도 이 책이 선정된 건 학교에 일곱 권이나 있는 책이라서.

이 책을 사게 된 건 회장단이 구청 어떤 프로그램에서 이 책을 배워와서 그렇다.

 

책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 이해하기 쉽게 독서골든벨 PPT도 만들었다.

만들어서 학교 밴드에 공유하고 수업에 쓸 분은 쓰시라고 했다.

회의 때 퀴즈를 뭘 내냐 하고 하도 바쁘다고 하신 분들도 많아서.

 

이게 사달이 될 줄이야.

 

PPT를 못?(안?) 쓰시는 분들도 있어서 다시 한글 파일로 작업을 해서 올렸다. 즉석에서 읽고 낼 수 있게 고쳤다.

 

그런데 아침에 학교에 가니 몇몇 분 분위기가 싸늘하다. 어떤 분이 내게 개별 행동은 하지 않고 통일되게 했으면 한다고. 회장님은 이런 거 싫어한다고. 헐, 북한인줄.

 

뭔가 오해하신듯한데 처음부터 우리반만 쓰려고 하던 거고 혹시 마음에 드는 분 쓰시라고 올린 거라고 했다.

 

'나도 이 시간은 내 수업이니 재미있게 하고 싶지 남이 준 자료로 줄줄 읽고 하고 싶지는 않다고', 속으로만 격렬하게.

 

 

고작 PPT에 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잘난척이 된 건가, 역시 의욕 과잉은 좋지 않아.

다행히 몇몇 분은 자신이 낸 것보다 PPT가 나은듯해서 잘 썼다고 인사해 주셨다.

 

무엇보다 책은 맘에 안 들지만 PPT 퀴즈는 애들이 참 재미있게 풀었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이게 편하지만 이런 방식이 불편한 분도 있다는 걸 생각을 못 했다.  

(PPT를 누구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ㅜ.ㅠ

이제 학번 물어보는 버릇은 고쳤는데 아직도 멀었다) 

 

역시 그들은 그간에 쌓아온 방식이 있을 테지. 나보다 몇 년은 더 활동한 사람도 많고.

 

그들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새로운 방식도 받아들이고 배울 의지가 없어 그건 좀 아쉬웠다. (요새 PPT는 초등 고학년 정도면 만드는 아이들도 있고 중학교 가면 발표하느라 거의 쓴다.)

 

이외에도 학부모 참여수업에는 한계가 있고 나도 별로 재능 기부의 의미, 재미를 잘 모르겠어서 이제 내년에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밥을 먹으며 아이들 반응을 이야기하다 보니 진짜 의외로 애들이 책을 어려워했다는 말도 나오고  어른인 우리도 순서가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와 헤일리 책과 비교해 말하다 분위기가 또 ㅜ.ㅠ

저걸 다 말한 것도 아니고 이야기 원형 3이 무너졌다, 그 얘기만 했는데도 ㅜ.ㅠ

 

그래도 금방 눈치 채서 시공사 일가가 어떻고 하는 얘기는 안 했다. 뿌듯.

 

1년의 독서회 활동이 재능 기부였을까, 아니면 재능 낭비?

 

아난스의 말대로

네가 가질 건 갖고, 내게 남길 건 남기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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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를 3분의 2 정도 읽고 <창백한 언덕 풍경>을 주문했다.

이것만 도서관에 없어서.

 

(가즈오 이시구로 머그 정말 질감이나 색이나 다 딱 좋다. 구매욕을 떨어뜨리기 위해 사진을 싣지 않음)

 

<나를 보내지 마>를 읽는데 복제인간의 슬픈 운명이 현실 세계와 겹쳐 보이며 엄청 쓸쓸해졌다. 현실세계의 많은 사람들도 누군가를 위한 대용물로 소모되는 삶을 살다 스러져가는 듯해서. 현실세계의 그림자노동이나 돌봄노동 종사자들에게 감정이나 영혼이 있을 것이라 상상하지 않는다.

기능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SF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더 슬프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중 처음 읽은 작품이 <편지>이다. 우리나라처럼 연좌제의 전통이 깊은 일본사회에서 범죄자의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영특한 동생이 대학 가는 데 돈을 보태려고 부유한 노파를 살해한 형. 동생에게 자신 대신 피해자 가족에게 속죄의 편지를 보내고 장례에도 가달라고 하는 형. 충동적이고 사고뭉치에 미련하기만 한 형.

이 형 하나 때문에 동생의 인생은 꼬여만 간다. 형무소에서도 자신의 죄에 대한 속죄보다는 동생이 대학가고 잘사는지만 궁금해하고 자신에게 안부편지를 보내올 것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

 

뭔가를 선택하는 대신 다른 뭔가를 포기하는 일이 반복되는 거야. 인생이란.(205)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많아지는 인생이다. 더불어 가족도 영원히 고통받는다. 결국 동생은 자신의 딸을 위해 형과 절연하기에 이른다.

 

<공허한 십자가>는 범죄에 대한 속죄가 가능한가와 사형제의 실효에 대해 묻고 있다. 한 작품에 너무나 많은 주장이 난무하고 인물들이 다 매력적이지 않아 읽고 나면 찜찜하다. 막장 드라마 보듯이 길티플레져. 엄청 몰입해서 애들 밥도 늦게 주면서까지 하루 만에 다 읽었는데 그냥 읽고 나니 허탈하기만 하다.

 

히가시노 게이고 설마 다 이런 건 아니겠지. 장르 문학에 내가 익숙하지 않은 탓이겠지.

 

 

 

 

 

 

 

 

 

 

 

 

 

 

 

차라리 며칠 전에 틈틈이 읽은 단편들이 더 낫다.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 질투 등으로 벌어지는 여러 사건사고들.

 

<수상한 사람들>에서는 <등대에서>라는 단편이 매력적이었다. 친하지만 묘한 경쟁심을 품은 친구 사이에서 벌어진 어이없는 비극을 보여주며 인간 심리의 어두운 이면을 잘 파헤쳤다.

 

<범인 없는 살인의 밤>도 도시괴담이나 여성 주간지에 나올 만한 사건사고로 장식되어 있다.

 

으으으- 하면서도 읽고 있는 나.

그것도 이렇게 추운 계절에 달달 떨면서.

애들한테는 구스범스 같은 거 보지 말라고 하면서.

 

 

 

 

 

 

 

 

 

 

 

 

 

 

 

꼭 읽어봐야지 하고 있다가 <아연 소년들>부터 읽고 있는데 현실이 픽션보다 더 비참하고 처절하고 가슴 아프다. 

 

<아연 소년들> 읽고 있는데 거실이 크게 울렸다. 윗층이 리모델링 공사라 그런가 했는데 진짜 지진이었다. 

 

어제 밤에 수능이 연기되었다는 발표가 나왔다.

 

사상 초유의 사태인데 우리집 초등들은 그냥 학교 열 시까지 가는 거냐 그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빨리 중학교 가서 수능날 안 가고 싶다고. 조삼모사 같은 녀석. 너 수능 볼 날이 곧 다가오고 있다.

 

 

표적을 똑바로 겨누어 맞히자 사람의 두개골이 산산조각 나는 게 보였어요. 순간, ‘내가 처음 죽인 사람이야’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전투가 끝나면 늘 부상당하거나 전사한 병사들이 여기저기에 쓰러져 있어요. 하지만 다들 하나같이 아무 말이 없죠…… 시가전차가 나오는 꿈을 꾸곤 해요. 시가전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꿈을요…… 좋아하는 기억이 있어요. 엄마가 피로시키를 구워주던 거요. 집안 가득 달콤한 밀가루 반죽 냄새가 퍼지고……

 

 

그나마 지금까지 읽은 데에서 온건한 문장이다. 전쟁터에서의 상황과 돌아와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겪는 상황이 처절하게 묘사되어 있어 읽기가 힘들다.

 

읽기도 이리 힘든 작품을 어떻게 여러 편 남긴 것일까.

 

엄청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도 쓰고 또 썼다.

 

작가는 본래 그런 걸까.

아프고 힘들지만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사람들이 작가가 되는 것이겠지.

 

아픈 누군가를 위해 대신 이야기해주어야만 하는 사람이 필요해.

 

*

 

연말에 어쩌다 이런 작품들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

 

계속 알 수 없이 불안하기만 하고 불안에 대한 도피로 더 큰 불행을 들여다보면서 또 다시 떨고 있다. 

 

올해 참 많이 힘든 일이 연달아 있었고 아직 여진같이 계속 미세하게 떨고 있어서 이런 작품들에 끌리나보다.

 

 

 

 

 

 

 

 

 

 

 

 

 

 

 

 

 

 

 

 

 

 

 

 

 

 

 

 

 

 

이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랑 <츠바키 문구점>은 아직 읽기 전인데

중간중간 이런 책을 읽어가며 알렉시예비치를 읽어나가야겠다.

 

약간 손난로 같은 소설들이니.

 

잠시 손 녹이며 또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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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카스트
스즈키 쇼 지음, 혼다 유키 해설, 김희박 옮김 / 베이직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대한민국 교실에는 불가촉천민이 있다.

정말이냐고? 자극적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이다.

언젠가 지켜본 적이 있는데 진짜 아이들이 닿는 것도 싫어하는 그런 애들이 전교에 한둘은 있었다.

 

요즘 애들은 왕따, 학폭이나 일으키고 허 인성이 참.... 혀를 끌끌 찰 것만은 아니다. 우리 세대에도 뭔가 가까이하기 꺼려지는 아이들은 늘 있었다.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도 모든 아이들이 그냥 싫어하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원래 1학년 때부터 성격이나 하고 다니는 게 그랬고 생긴 것도 그렇고 아무튼 원래 그렇단다.

아들아 너마저. ㅜ.ㅠ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아이들은 그래도 순수하다 여기고 부정하려고 해도 교실 역시 사회의 축소판이며 어쩌면 학교현실은 사회보다 더 잔인하다. 드라마 <여왕의 교실>에서와 같은 차별과 배제는 현실에서도 흔하다.

 

<교실 카스트>는 이렇듯 현존하는 학생들 간의 묘한 역학관계를 밝히고 하부계층이 억압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밝히고 있다.

 

학교라는 공간은 서로 다른 관심사와 능력을 지닌 아이들을 같은 연령이라는 이유로 비슷한 커리큘럼 하에 한 공간에 지나치게 장시간 머무르게 하는 곳이다. 책에도 잠깐 나오지만 같은 공간 장시간 이게 의외로 큰 문제다.

 

초중등 시기에 학폭, 왕따를 경험했는데 대학에 가서 극복한 경우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것은 대학에 가서 그 학생이 성격이 크게 바뀌었다기보다는 학급 체제가 아니라 수업을 선택하여 듣고 집단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중등 시기에 보다 커리큘럼을 다양화하여 학생들의 수준과 흥미에 맞게 수업할 수 있다면 계급이 공고해지는 일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학급 체제로 운영하는 것이 다수의 아이들을 관리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에 학급 체제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책에서는 정보의 축적이 계급을 나눈다고 한다. 아이들은 발달을 다 마치지 않았고 판단력 역시 아직 부족한 초등 시기에 서로에 대한 정보를 축적한다. 운동을 잘하는 아이, 똑똑한 아이, 힘센 아이, 예쁜 아이 등 아이들 사이의 평가는 사실 무자비하다. (결국 어른들의 시선이 투영된 결과이다)

 

이때 감정표현이 서투르거나 별 특징 없는 아이들 중 아주 사소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아이들의 배척을 받는 애들이 몇 명 생기고 고학년이 되면 그간 축적한 정보에 의해 그 아이는 헤어날 길이 없는 비호감 재수탱이로 낙인 찍힌다. 그애 곁에만 가도 아이들은 옮는다고 싫어한다. 대체 뭐가 옮아?

 

책에서는 하위계급 아동이 적극적인 성격이 되려고 노력하거나 하는 것도 다 소용이 없다고 한다. 오직 지배계급 아이들이 그만 이제 그애를 받아주자 하는 신호가 떨어져야 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배층 아이들의 특성은 호감 가는 외모, 이성들 사이의 인기, 공부, 운동, 가무 실력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공통되는 특성이라면 소통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상위계급인지 학급에서 쉽게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쉬는 시간이든 수업시간이든 마음대로 발언할 수 있고 쉽게 호응받을 수 있다면 그 아이는 상위계급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어떻게 행동해도 비웃음을 산다면 그애는 하위계급인 것이다.

 

소위 초등 시절부터 약은 아이들.

이 아이들이 학급의 행사를 주관하고 학급의 귀찮은 일은 적당히 다른 애들에게 맡긴다. 이 아이들에게 권위를 실어주는 건 놀랍게도 교사이다. (우리가 이미 학창시절에 목도한지라 별로 놀랍지 않을 수도 있지만. ) 교사들도 필요에 따라 "상위계급 아이들에게 아첨하고" 각 계급을 적절한 위치에 배치한다. 

 

기가 약한 교사들이 상위계급 아이들에게 찍혀 힘들게 교직생활하는 경우도 있다. 책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교사들 사이의 계급이라면 인기교사, 비인기교사로 나눌 수 있겠다. 중등에서는 상위계급 아이들이 인기 교사들과 협력해 그 학교의 문화를 만들어간다. 나머지는 비주류이고 비인기교사들이 하위계급 아이들을 챙겨주어도 그 아이들은 크게 반가워하지 않는다.    

 

학교에는 수업말고도 축제나 운동회 등 각종 행사가 있는데 이때 성과를 내기 위해 상위 학생들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책에서 재미있는 사례는 해외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상위계급 아이들이 물갈이로 배가 아파 행사를 주관하지 못하게 되자 하위계급 아이들만으로도 무사히 프로그램을 잘 마쳤다는 것이다. 요컨대 아이들에게는 자신을 발휘할 기회가 부족한 것이지 애초 계급간에 능력 차라는 것이 크지 않은 것이다.

 

화합의 장이라는 명목으로 마련하는 축제가 계급간의 차이를 공고히 하는 수단이 된다. 여름에 학교운동장에서 6학년 아이가 학예회에서 출 걸그룹 댄스를 친구에게 앙칼지게 가르치는 걸 보고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의 현실이라지만 우리나라의 학교현장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교사라면 이 책을 읽고 학급을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권력을 분산시킬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학부모라면 내 아이의 소통력에 대해 고민하고 중심 그룹에 속하는 아이들을 잘 지켜보고 적대적으로 지내지는 말라고 조언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다.

 

'교실 카스트'는 인정하기 싫어도 현존한다.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책임은 상당 부분 어른들에게 있다. 외모지상주의, 물질숭배, 능력주의 사회에서 아이들이 쉽게 이러한 가치들을 내면화하고 자신들의 세계에 적용한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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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혼란한 주말 어린이 도서실에서 읽었던 책들이다.

 

작년에 태안반도에 놀러갔을 때 숙소 유리문이 딸아이에게 그대로 떨어져버렸다. 홍콩느와르에서나 보던 장면같이 현실감이 없었다. 정신없이 맨발로 유리더미를 밟고 얼굴을 손을 모아 가린 아이를 살펴보니 눈윗쪽이 가장 많이 벌어져 있었다. 수산시장에서 생선에 칼을 대고 그은듯이.

 

바닷가로 나가기 전 수영복을 갈아입은 상태 그대로 119를 불러 타고 읍내 병원으로 향했다. 시골동네 한적한 병원 응급실에서 심난한 아이상태를 보더니 어쩌다 저리되었냐고 모두 혀를 찬다.

 

새로개원한 시골병원에 응급의학과 의사 선생님이 계셔서 보였더니 즉시 봉합수술에 들어간다고 하셨다. <지독한 하루>에도 나왔듯이 크게 다친 아이는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에 두려움이 압도했는지 제대로 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식염수로 오물과 작은 유리조각을 치우고 나니 천만다행으로 가장 큰 상처는 이마 윗쪽의 7센티 정도는 되게 벌어진 상처와 등에 유리조각이 박힌 그 정도였다. 한 시간 반 동안 마취주사를 여러 번 찔러가며 겨우겨우 봉합을 마쳤다. 징징징 낮게 우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떠는 아이를 붙잡아 주며 의사선생님의 단정한 뒷통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아파도 조금만 참자, 잘해주고 있어, 라고 선생님은 아이를 달래가며 집도를 하셨다. 아이 다루는 목소리와 어조가 분명히 미취학 아동을 자녀로 둔 분 같았고 아파하는 아이가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하시는듯했다.

 

아이를 키우며 크고 작은 사고로 응급실을 드나들면서 이렇게 친절한 분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분들이 특별히 불친절한 게 아니라 응급실 상황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 환자들이 만족을 못 느끼는 것이겠지.

 

어릴 때 무섭고 싫으면서도 공포괴담류를 읽었던 것처럼 <만약은 없다>와 <지독한 하루>도 그런 심정으로 보았다. 내가 있는 이 안온한 자리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만약은 없다>보다는 <지독한 하루>가 보다 더 정돈된 느낌이다. 중증외상환자가 신속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려면 멀었다는 것과 응급실 주취자들의 행패를 박아낼 방법이 없다는 데에 한숨이 나온다.

 

나는 모멸감과 피로로 당장 쓰러져버리고 싶었다. 내가 왜 이런 멸시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머릿속에 예이츠의 시구가 떠올랐다.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 있다.˝ (46쪽)

 

저자는 조직폭력배 수하로 추정되는 사내에게 맞아가며 두목을 살려내려고 했다. 그전에도 부하들은 온갖 모욕적인 말을 퍼붓고 무례하게 굴고 있었다.

 

이외에도 선천적인 질병으로 고통받는 가족이나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들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게 되었다.

 

아....정말이지 아이를 낳는다는 건 일생을 건 크나큰 도박이자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아니지 마땅한 장비가 없는 익스트림 스포츠이다.

 

아이가 건강하게 세상에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

건강하게 세상에 나왔다 해도 생명이라면 크고 작은 위험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온갖 세상걱정근심 품고 사는 신경증 환자인 나는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극도로 예민해졌다. 어디를 보내든 안심 못하고 전전긍긍. 초등학교에 간 지금은 전보다 덜하지만 어린이집 시절에는  매번 견학을 보낼까 말까 갈등하고 짧은 거리라도 늘 아이들과 함께 다녔다.

 

그렇게 꼭꼭 싸매고 키웠는데도 시골에 살 때 뱀에 물리기도 하고(강릉아산까지 가서 검사했는데 독성이 없는 물뱀 정도) 벌에도 쏘여 봤다. 그때 대처 큰 병원으로 가려고 응급실로 가며 마음 졸이던 걸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때를 다시 떠올려보니 내 모습은 우습기만 하다. 슬리퍼에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지갑도 없이 큰애 태우고 구급차에 올랐다. 당시 네 살 아들은 그 와중에 삐뽀삐뽀 탔다고 좋아하고.   

 

이 책에 나오는 그런 심각한 중증외상도 아닌데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본래 인간이란 자기 손가락 밑의 가시 하나가 더 위중한 법이라 그런지.

 

 

나는 심상치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터무니없는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서, 원래 세상 일이란 인간들의 육신이 이토록 부서지고 시들어가는 과정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매번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불행의 변주를 의연하게 눈 하나 껌뻑하지 않고 받아들이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유난한 날이었다. (86쪽)

 

의사들의 무심한 반응에 상처받는 사람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워낙 심각한 상황이나 죽음을 많이 맞이하다보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환자들과 가족에게는 그 상황이 정말 처음 맞닥뜨리는 특별한 상황이다.  

 

아직도 몸이 제대로 펴지지 않는다. 다시 읽기는 힘든 책이다.

 

*

우연히 어제 아침 <어쩌다 어른>에서 남궁인 작가 강연도 앞부분을 잠깐 보았다. 말씀도 잘하시는듯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초(만병초)를 약으로 착각해 술로 담가 먹기도 한다는 데 놀랐다. 그렇게 쉽게 독을 먹게 되는 건 지인이 권하기 때문이라나.

망할 지인 찬스. 

뭔지도 모르면서 몸에 좋다고 하고 그게 또 아는 사람이 주는 거면 쉽게 먹어버린다고.

 

*

<숨결이 바람될 때는> 전도 유망했던 한 의사의 투병기이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는데 의사에서 환자가 되면서 느끼는 감정이나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 남은 생을 알차게 꾸려가려 했던 의지, 생에 대한 통찰력 등을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큰 병은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의 삶을 바꾸어놓는다. 하지만 뇌 질환은 거기에 난해하고 신비한 분위기가 더해진다. 아들의 죽음만으로도 부모의 정돈된 세계는 뒤집혀버린다. 그런데 환자의 뇌는 죽었고 몸은 따뜻하고 심장도 여전히 뛰고 있다니, 이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을까? 재앙(disaster) 이란 단어의 어원은 부서지는 별을 의미하는데, 신경외과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 환자의 눈빛이 바로 그렇다. (116쪽 )

 

나는 나 자신의 죽음과 아주 가까이 대면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161쪽)

 

 

우리의 정체성은 뇌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그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신체 안에서 살 수 밖에 없다. 산행, 캠핑, 달리기를 좋아하고, 양팔을 쫙 벌려 꼭 껴안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하던, 그리고 키득거리는 조카를 번쩍 들어주던 남자, 나는 더는 그 남자가 될 수 없었다. 기껏해야 그런 남자를 목표로 삼는 것이 최선이었다. (165쪽)

 

남궁인의 작품과는 천양지차. 아주 다른 어조였다. 자신의 죽음인데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차분히 들여다보았다. 아쉽고 억울할 텐데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가 더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내가 전형적 한국아줌마라 그런지 그런 상황에서 아이를 낳기로 계획하고 아이를 낳은 부인의 선택이 더 마음 아팠다.  

 

 

우리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결혼 생활을 지키는 비결은 한 사람이 불치병에 걸리는 거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역으로 말하자면, 불치병을 헤쳐 나가는 방법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서로에게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며, 감사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254쪽, 에필로그: 루시 칼라니티)

 

 

 

 

 

 

 

 

 

 

 

 

 

 

 

 

정말 옛날옛적에 읽은 의료 관련 만화들. 거의 15년 전에 봤다. 

 

데츠카 오사무의 블랙잭이 역시 레전드이고 이후 이 작품의 여러 변주가 나온듯하다.

 

블랙잭은 어린 시절 폭발사고를 당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혼마 죠타로의 수술로 살아나 후에 의사가 된다. 의사 면허도 따지 않고, 상황에 따라 환자들에게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수술비를 받지만 어떠한 병이라도 고치는 초인적 실력을 가졌다. 전 세계에서 환자들이 찾아올 정도로 명성을 쌓는다.

 

각종 의학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성은 황당하지만 실력만은 최고인 그런 의사의 모티브가 블랙잭이다.

 

<헬로우 블랙잭>도 재미있게 보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팔아버린듯하다. 이제 아이들 읽히기 좋은데 ㅜ.ㅠ

 

<닥터 노구찌>는 언제 주문해서 다시 봐도 좋을 듯하다. 거의 위인전, 휴먼드라마라 애들 읽기 좋을듯하다. 내가 김윤아 남편인가 암튼 그 치과의사 수입 정도 된다면 홍대 00문고 가서 왕창 사오련만.

 

 

 

 

 

 

 

 

 

 

 

 

 

 

 

 

 

보려고 했다가 못본 작품들이다. <요시오의 하늘>이 주문할 만하다.

 

 

 

*

사실 책을 봐도 그렇고 만화를 봐도 그렇고 의사는 격무에 시달리며

되기까지도 그렇고 되어서도 그렇고 힘들기만 하다.

 

의료 관련 직은 죽음이나 그와 비슷한 상황을 거의 매일 맞닥뜨려야 하는 극한 직업이자 사명감이나 체력이 없다면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변에 무작정 아이들 의사 만드는 게 목표인 엄마도 가끔 보인다. 아이들이 결정할 문제인데 말이다. 남궁인 작가의 경우도 강연에서 엄마의 권유로 의사가 되었다고 밝혔을 정도이니.

 

우리 아이들의 경우는

병원에 가본 경험을 들어 의사는 절대로 되지 않겠다고 하는데. ㅋ

역시 너희 뭘 좀 아는구나.

 

온라인에서 본 어떤 글에 아들은 의사 만들기 싫고 의사 사위는 보고 싶다나.

아무리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공간이라지만 후안무치의 극치다. 아니 솔직한 거겠지. 그래도 쫌 속으로만 생각하자.

 

중년이 되니 가족이 아프다거나 다른 이들의 문병을 간다거나 해서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꽤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병원은 피하고 싶은 공간이고

어떤 병들과 의사, 병원을 둘러싼 잡담은

일상에서는 비속하고 가볍기만 하다.

 

아직은 불운이 나를 피해 갔으니 안도한다거나

공허한 감사 타령이 주를 이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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