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아이 다니는 학교에서 책읽기 수업이 있는 날이라 다녀왔다.

 

하고 많은 아난시 이야기 중에서 우리학교에서 선택한 책은 시공사 버전

<이야기를 가져온 거미 아난시>이다.

 

처음에는 표지를 보고 그냥 귀엽네, 하고 말았는데 내용을 읽다보니 입에 착착 감기는 맛도 없고 스토리도 이해가 안 되어 보니 우리나라 작가가 각색하고 그림도 우리가 새로 그린 것이다. 물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다만 개악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시공사 버전은 읽기 힘들었다. 이유는 이제부터 설명해보련다.

 

게일 헤일리의 1971년 칼데콧상 수상작 <이야기 이야기>는 아프리가 설화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삽화도 최대한 아프리카 특유의 건강한 생명력을 살리려고 했다.

 

 

헤일리의 <이야기 이야기>는 아난스라는 지혜로운 거미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이야기를 구해오는 과정을 흥미롭게 담았다.  아난스는 하느님이 이야기 값으로 제시한 세 가지 조건 즉, 표범 오세보, 말벌 믐보로, 요정 므모아티아을 구해온다. 하느님은 아난스에게 이야기가 든 황금상자를 주고, 아난스가 그 상자를 열자 이야기들이 세상에 퍼지게 된다.

 

마무리도 훌륭하다

"이 이야기는 내가 했으니까 내 이야기란다. 듣기 좋았든 안 좋았든 말이야. 네가 가질 건 갖고, 내게 남길 건 남기렴." 

 

 

 

시공사 버전은 일단 삽화가 표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시종일관 알록달록하다. 아프리카의 색감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무속의 색 같다.  학교 책이라 반납해서 삽화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찍어 보일 수가 없어 아쉽다. 일일이 보이지 않아도 딱 표지풍이다.

 

이야기도 마구마구 변형시켰다. 아프리카 이야기에 우리나라 설화를 섞어서.

 

 

 

 

 

 

 

 

 

 

 

 

 

 

 

시공사 버전 스토리의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의 원형을 무리하게 훼손해서 아이들이 단번에 이해하기 쉽지 않은 책이 되어버렸다. 나조차 한 번 읽고 이해하기 힘들어 몇 번 다시 보았다.

 

하늘신은 아난시에게 이야기를 줄 테니 비단뱀, 말벌, 표범, 요정을 구해오라고 한다. 무려 네 가지다. 옛이야기에서 '3'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무리하게 끼워 넣었다. 이렇게 하면 이야기가 다채로워질 거라 생각하는지.

 

게일 헤일리의 <이야기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아프리카에서는 중요한 말을 반복하여 표현하는데 시공사 버전에서는 '길고 길고 긴' 이렇게 우리말을 단순 반복했다. <이야기 이야기>에서 나온 아프리카말 트웨, 트웨, 트웨라든가 하는 재미있는 말놀이가 거의  빠졌다. 막판에 코제코제코제 콰쿠 아난시 한번 나온다.   

 

표범을 잡게 된 경위도 <이야기 이야기>와 시공사 아난시가 다르다. <이야기 이야기>에서는 표범을 덩굴로 묶어 데려오는데 시공사 아난시에서는 뜬끔없는 비단뱀을 묶어 데려온다.

 

그리고 시공사 버전 표범은 우리나라 호랑이같이 구덩이에 빠졌다가 아난시의 그물에 묶여 잡힌다.

 

말벌을 잡으러 갈 때 거미 아난스는 바나나잎을 쓰는데 시공사 아난시는 질경이 잎을 머리에 쓴다. 아프리카에 질경이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굳이 자연물까지 바꿔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요정을 잡을 때 쓴 아프리카 토속인형인 아쿠아바는 눈이 쪽 째지고 얼굴이 크고 팔다리가 짧은 게 특징인데 시공사 아쿠아 인형은 아쿠아바와 거리가 멀다.

 

 

 

아난시 성품도 아주 경박해졌다. 동물을 잡고는 꼭 멍청아, 라고 한다.

 

하늘신이 전에는 이야기를 상자에 넣어두어 이야기가 퍼지지 않았다는 그 부분이 시공사 버전에 아예 빠져 있다.

 

이렇게 아프리카 이야기도 아닌 것이 우리나라 설화도 아닌 것이 그냥 시공사 버전의 아난시가 되었다.

 

그래도 이 책이 선정된 건 학교에 일곱 권이나 있는 책이라서.

이 책을 사게 된 건 회장단이 구청 어떤 프로그램에서 이 책을 배워와서 그렇다.

 

책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들 이해하기 쉽게 독서골든벨 PPT도 만들었다.

만들어서 학교 밴드에 공유하고 수업에 쓸 분은 쓰시라고 했다.

회의 때 퀴즈를 뭘 내냐 하고 하도 바쁘다고 하신 분들도 많아서.

 

이게 사달이 될 줄이야.

 

PPT를 못?(안?) 쓰시는 분들도 있어서 다시 한글 파일로 작업을 해서 올렸다. 즉석에서 읽고 낼 수 있게 고쳤다.

 

그런데 아침에 학교에 가니 몇몇 분 분위기가 싸늘하다. 어떤 분이 내게 개별 행동은 하지 않고 통일되게 했으면 한다고. 회장님은 이런 거 싫어한다고. 헐, 북한인줄.

 

뭔가 오해하신듯한데 처음부터 우리반만 쓰려고 하던 거고 혹시 마음에 드는 분 쓰시라고 올린 거라고 했다.

 

'나도 이 시간은 내 수업이니 재미있게 하고 싶지 남이 준 자료로 줄줄 읽고 하고 싶지는 않다고', 속으로만 격렬하게.

 

 

고작 PPT에 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잘난척이 된 건가, 역시 의욕 과잉은 좋지 않아.

다행히 몇몇 분은 자신이 낸 것보다 PPT가 나은듯해서 잘 썼다고 인사해 주셨다.

 

무엇보다 책은 맘에 안 들지만 PPT 퀴즈는 애들이 참 재미있게 풀었다.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이게 편하지만 이런 방식이 불편한 분도 있다는 걸 생각을 못 했다.  

(PPT를 누구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ㅜ.ㅠ

이제 학번 물어보는 버릇은 고쳤는데 아직도 멀었다) 

 

역시 그들은 그간에 쌓아온 방식이 있을 테지. 나보다 몇 년은 더 활동한 사람도 많고.

 

그들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새로운 방식도 받아들이고 배울 의지가 없어 그건 좀 아쉬웠다. (요새 PPT는 초등 고학년 정도면 만드는 아이들도 있고 중학교 가면 발표하느라 거의 쓴다.)

 

이외에도 학부모 참여수업에는 한계가 있고 나도 별로 재능 기부의 의미, 재미를 잘 모르겠어서 이제 내년에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밥을 먹으며 아이들 반응을 이야기하다 보니 진짜 의외로 애들이 책을 어려워했다는 말도 나오고  어른인 우리도 순서가 힘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와 헤일리 책과 비교해 말하다 분위기가 또 ㅜ.ㅠ

저걸 다 말한 것도 아니고 이야기 원형 3이 무너졌다, 그 얘기만 했는데도 ㅜ.ㅠ

 

그래도 금방 눈치 채서 시공사 일가가 어떻고 하는 얘기는 안 했다. 뿌듯.

 

1년의 독서회 활동이 재능 기부였을까, 아니면 재능 낭비?

 

아난스의 말대로

네가 가질 건 갖고, 내게 남길 건 남기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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