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결혼기념일이었다.

우연히 <오만과 편견>을 이틀에 걸쳐 읽었고 오늘 낮에는 급하게 무려 비티비로 결제까지 해서 영화를 봤다.

 

결혼기념일을 맞아 내 연애와 결혼을 돌아볼 의도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본 건 아니지만 결과론적으로는 결혼기념일 즈음, 그리고 중년에 이르러 읽으니 더 재미난 텍스트였다.

 

아...내가 그간 <오만과 편견>이라는 작품에 대해 오만했고 편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학부 4학년에 영문과 수업에서 소개받고 제대로 읽지 않았는데 이제라도 읽어 다행이다.

 

이렇게  이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고 널리  읽히는 까닭은 '짝짓기와 그에 따른 재산과 지위 이동'은 현재에도 여전하다 못해 심화되고만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전을 읽을 때 늘 그렇듯 초반을 극복하고 중반에 이르다보니 아침드라마나 흔한 막장드라마 설정과 유사하나 대사들이 뭔가 더 찰지고 고풍스럽고 시원하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이어지는 걸 막으려고 캐서린 영부인이 엘리자베스를 방문하는 건 재벌사모님들이 돈봉투를 들고 가난한 처자를 찾아와 모욕하는 설정으로 여전히 이어져가고 있다.

 

하지만 캐릭터들이 더 생생하고 심리묘사가 치밀해 인물들 감정, 상황이 다 납득이 가고 인간의 나약한 본성에 대한 연민이 든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첫 청혼을 거절하며 속사포로 퍼부은 말들은 숱한 드라마에서 실장님, 사장님, 대표님에게 맞섰던 가난하지만 줏대 잇고 생기 있는 처자들의 대사와 맥을 같이한다.

 

요약하자면 네 감정은 알겠다만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임.

 

한때 온라인에서 유행하던 재벌남자와 결혼하는 법이라는 글과 맥을 같이한다.

 

일단 따귀부터 때리고 나서

나를 이렇게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라는 말을 듣기만 하면 일사천리.

 

웃자고 하는 말이고 19세기 영국 사교계나 21세기 대한민국 사교계? 연애의 장도 다를 바 없다.

결혼을 통해 신분과 재산을 공고히 지키는 건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지금까지 여전하다. 다만 제인 오스틴은 개별화된 인간, 한 인간의 매력적인 품성에 의해 근대적인 낡은 관습이 극복될 수 있으리라고 미약한 희망을 품은 듯도 하다.

 

그러면서도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모두의 속물적인 욕망을 비웃는다. 하지만 인간이니 다 그렇지 하고 가엾고 귀엽게 여기는듯도 하다.

 

"얘, 얘, 제발 좀 진지해 봐. 아주 진지하게 대화하고 싶어. 딴소리 말고 내가 알아야 할 걸 모두 얘기해 줘, 어서. 언제부터 그분을 사랑하게 된 거니?" 

"아주 서서히 일어난 일이라 나도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내 생각에는 펨벌리에서 그분의 아름다운 영지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가 아닌가 해."   512쪽

 

언니 제인이 다아시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냐고 묻자 엘리자베스가 한 말이 너무 웃겨서 한참 웃었다. 그밖에도 절묘한 상황과 대사가 많아서 포스트잇을 여기저기 붙여두었다.

 

"제 미모는 처음부터 인정 안 하셨고, 태도에 대해서라면, 당신에 대한 제 행동이야 가까스로 늘 무례를 면했다고나 할까요. 말을 건넸다 하면 그냥 지나가지 않고 당신께 고통을 주려고 했지요. 이제 속내를 털어놓아 보세요. 제 건방진 점 때문에 제가 마음이 드셨나요?"

"당신의 마음이 생기 있었기 때문이지요."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나누는 대화에서 많은 로맨틱 코미디의 원형, 독립적이고 사랑스러운 여인상이 다시 확인된다. 근대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생기가 있는 자만이 진정한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인과 엘리자베스의 외양 묘사에서 볼 수 있듯이

그냥 생기만 있는 오징어는 뭘 해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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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이어서 영화를 보고 나니 제인과 엘리자베스, 콜린스 , 리디아, 베넷 부인 등은 소설 속 이미지와 어느 정도는 부합하는데 빙리와 다아시는 사실 많이 부족하게 여겨졌다.

 

빙리는 작품 속에서 우유부단하다고는 하나 영화에선 너무 ㅂ ㅅ 같이 그렸고(프로포즈마저 친구에게 지도받는 것으로 나오고 표정도 멍하고 ㅜ.ㅠ) 차갑고 오만하지만 사려 깊은 소설속의 다아시는 영화에서는 너무 어둡고 느끼했다. 

 

원작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거의 남성 주인공은 맘에 안 드는 전철을 그대로 밟는 영화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느낌이긴 하다. 포털을 보니 영화 속 다아시가 원작 주인공과 딱 이라는 의견도 간혹 있다.)

 

아무튼 그 방대한 원작을 온전히 살리기는 힘들 것이고 그냥 그 시대 분위기, 사극 분위기를 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특히 키이나 나이틀리 정말 사랑스럽다. 오동진 님이 소개한 프로그램에서 보았는데 키이나 나이틀리가 무려 일곱 살에 오디오북으로 오만과 편견을 접하고 난 후 내내 제인 오스틴 팬이라서 열과 성을 다해 엘리자베스 역을 연기했다고 하니 믿을 만하다.   

 

**

중년이 되어 주변의 이런저런 결혼을 보니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롯이 택한 결혼이나 리디아가 충동적으로 망나니와 맺어지는 상황 등이 현실에서도 가끔 있다. 그리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용이해졌다고는 하지만 결혼을 통해 사회적 지위가 공고해지고 재산이 변동을 보이는 것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다.

 

 

 

사실 제인이나 엘리자베스의 결혼과 같이 조건?과 사랑이 일치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현실에서 극히 드물다.

 

그래도 아주 없는 일이 아니기에 이렇게 소비되는 것이겠지.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자면 하지원이 엘리자베스 같은 역할을 많이 한듯하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는 너무 애절하고 슬펐고  <시크릿 가든>에서는 참 밝고 경쾌했다.

 

그리고 <시크릿 가든>으로까지 생각이 치닫자 드라마속 현빈을 사모한 조용한 데 계시는 어떤 분이 생각나면서 갑자기 불쾌해졌다.

 

그곳은 참 이런 고전 읽기 좋은 곳인데 아마 이 작품을 읽을 일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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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8-05-0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만과 편견‘을 영상화 한 것이라면 BBC 드라마를 추천드려요. 미스터 다아시역의 콜린 퍼스는 진리입니다.^^

뚜유 2018-05-05 08:23   좋아요 0 | URL
전에 EBS에서 방영한 것이 BBC 판인가요? 제대로 보지는 못 했지만 콜린 퍼스는 진정 미스터 다아시입니다 ^ ^ 그렇지만 엘리자베스는 키이나 나이틀리 쪽이 더 좋아요.
 

 

 

 

 

 

 

 

 

 

 

 

 

 

 

 

 

 

 

 

 

 

 

 

 

 

 

 

 

오늘 아시아문화전당에서 도서관 문화주간 행사로 김영하 님 강연이 있었다. 원래는 갈까 말까 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이들 어린이 미사와 어린이날 행사로 성당에서 아이들이 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가게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작년부터 하고 있는 책모임에서 간다고 하는 벗들이 있어 같이 갈 수 있게 되었다.

 

서울에 살 때 작가님 초창기 겨자색 게시판에서 보던 사람들과 작가님을 가깝게 본 적도 있고 강연회도 다닌 적이 있지만 이제는 꿈결인듯 오래된 시절이다.

 

지금은 역시 작가는 작품으로 만나야 제맛이지, 하고 꽤나 쿨한 척 하고 있었는데 난 세련되거나 쿨하지 않고 질척거리는 면이 많아 그런지 역시 이렇게 우르르 몰려 보니 또 좋구나.

 

알쓸신잡의 여파인지 꽤 넓은 회의실에 사람들이 꽉 들어찼고 앞자리에 고 3 여고생들이 앉아 있을 정도였다.

 

어려서 온라인 모임 사람들과 만났던 작가를 그때는 전혀 살아볼 거라 짐작도 못한 낯선 도시에와서 나이들어 전혀 다른 성격의 온라임 모임 사람들과 강연을 듣게 되어 기분이 묘했다.  ( 문장 이거 뭔소리임 )

 

아무튼 오늘 강연회에서 작가님을 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작가님이야 물론 절대 나를 알아보거나 하시진 않았고 나도 민망한 닉네임으로 한두 번 소개한 적이 다라서 열심히 듣기만 했다.

 

처음엔 가볍게 어린 시절의 독서 경험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셨다.

아이들 수준에 맞지 않게 책을 권하고 독후활동을 강요받으며 아이들이 책과 멀어진다고 하셨고

책을 부모가 읽어주어도 아이의 성취엔 큰 영향이 없다는 것.

 

다만, 집에 장서가 많을수록 좋다는 것

집에 있으면 언젠가 책과 만나는 기회가 생긴다는 것.

 

 

강연 내용은 보다, 말하다, 읽다 에세이집에서 많이 들어본 내용인데

시의적절하게 대한항공 일가, 미투, 통일, 김생민, 4차산업혁명까지 언급되는 신기한 강연이었다.

 

그냥 연결 안 되는 술자리 이야기인듯하면서도 나름 주제의식이 있는 강연이었다.

 

굳이 이름 붙히자면 고급? 독자의 즐거움과 괴로움 내지는 그러니 이제 고전을 읽자, 그 정도.

 

 

고전은 거의 대개는 하마르티아, 즉 인간의 성격에 잠재해 있는 중대한 약점을 건드리는데

그 중대 약점이 대개 휴브리스, 오만일 경우가 많다.


고전을 통해 이런 인간의 약점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거창하게 말할 수도 있지만 실상

 

고전이라고 함은 아무도 제대로 읽지는 않았으나 읽은 듯한 책.

읽은 척을 하게 되는 책.

 

읽을 때마다 새로 읽는 듯하고

남에게 소개할 때 늘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어보니 말야, 하고 소개하는 책들이 고전이다.

 

마담 보바리, 돈 키호테, 오만과 편견, 외투, 오이디푸스 왕, 논어 등등 많은 고전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과 많이 다를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신간의 무익함. 아니 해로움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시간의 풍화를 견뎌낸 고전의 가치를 중년 이후에야 발견하게 된다는 것. 어느 정도 독서경험이 쌓이고 나서야 발견하게 된다는 점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고전을 잘 안 읽고 안 읽히게 되는 건

스마트폰 예능 탓일까.

 

아니 뭐 인간이 원래 책읽기보다는 먹고 놀고 뛰고 하는데 더 최적화되었다는 말씀에도 동의한다.  나의 본질도 결국 테순이이므로.

 

그리고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 드라마나 영화, 가끔은 책에서 본 대로 진부하게 행동한다는 데에도 동의한다. 

 

마저마저 하는 사이 강연은 끝이 났고

 

끝으로 꼭 하고 싶은 질문이 있었는데 못하고 있는 사이 어떤 고위공무원 분이 썰렁한 아재 개그로 모두의 손과 발을 꽁꽁

 

작가님 이름 듣고 분위기가 썰렁할 줄 알았는데(김영하님이라서 영상 영하를 연상하시고는)  

이렇게나 사람이 많아 놀랍다고 ㅜ.ㅠ

이젠 초딩들도 안 할 이름 개그.

분위기 폭망.

 

질문을 하면서 강연이 정리되어야 하는데 뭔가 마무리가 되지 않고 끝나버린듯해서 아쉬웠다.

 

해서 모임 벗들과 아시아 문화전당 하늘마당에서 간단히 생맥주를 한 잔씩만 마시고

20대 처자들처럼 까르르 하며 사진도 찍었다.

 

 

참, 마음만은 늙지도 않지.

 

모임에 서울서 살다오신 분이 있어 하이퍼텍 나다 이야기 하다가

거기서 마지막으로 본 아무도 모른다, 에서처럼

아이들이 밤 9시 무렵까지 자기들끼리 있을 게 걱정이 되어 택시 타고 날아왔더니만

애들이 영화 속 아이들처럼 자신들만의 시간을 잘 보내고 있더라는 얘기.

 

원래 열혈육아기를 거치며 10시 이전에 잠드는 생활을 몇 년 지속해 왔는데

오늘은 잘 시기를 놓쳐 잠이 오지 않는다.

 

신기한 봄 밤이네그려. 

 

 

*사진은 고운 벗님이 찍어보내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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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금인 어제 아이들과 쥬만지를 다시 보았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책은 보지 못했지만 영화는 20대에 재미있게 보았고 이후로도 가끔씩 보았다.

 

 

아이들이 엄마, 스포는 절대 안 돼, 라고 했지만

사실 이런 장면도 있었나 싶게 많이 새로웠다.

 

무엇보다 전에 볼 때와 다르게 로빈 윌리엄스 아저씨가 이제 이 세상에 없다는 게 느껴져 울컥했다. 10대에서 20대에 로빈 윌리엄스 나오는 영화를 꽤 많이 보아서 그런지 기분이 참 이상했다. 

화면 속 로빈 윌리엄스는 아직 생생한데 이제 그는 이곳에 없다. 2014년에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리셔서 ㅜ.ㅠ 살아계셨다면 지금쯤 칠순을 바라보실 텐데. 

 

*

성당 주일학교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처음 본 걸 시작으로 대학에 가서 <굿모닝 베트남>,

<굿 윌 헌팅>, <미세스 다웃파이어>, <피셔킹>, <패치 아담스> 등 로빈 윌리엄스 영화를 보며 참 많이도 웃었다. 누구랑 언제 보았는지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싸이월드 도토리로 OST를 사들이던 허세 작렬하던 그때의 나도 많이 그립다.

 

그렇게나 영화를 즐겨 보았던 20대 생기발랄하던? 아가씨는 어느새  배나온 아줌마가 되어 구석진 컴퓨터방에서 캠핑 의자를 펴고 아이들과 이 영화를 보고 있다.  

 

아련하다, 그저.

 

 

혼자 너무 숙연해졌네.

  

요즘 아이들은 이 짤방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있으려나.

 

또래에게 따돌림 당하고 권위적인 아버지와 불화하던 앨런은 쥬만지에 빠져들어 26년을 허비한다. 하지만 주디와 피터를 만나고 어릴적 친구인 사라를 소환해 쥬만지 게임을 무사히 마치고서야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되찾게 된다.

 

 

아이들은 온갖 동물들이 나오고 소동이 벌어지는 데에서 엄청난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주방이 엉망이 되고 집은 부서지고 경찰차는 너덜너덜 걸레가 되어가는데 마냥 웃고만 있다.

 

특히 아이들이 박장대소한 부분은 미친 사냥꾼과 대형 마켓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싸우는 부분이었다.

 

피터가 반칙을 해서 퇴화해 원숭이가 되니 좋다고 난리.

부르마블하면서 오빠의 주사위 조작(주사위를 손으로 잘 감싸쥐고 살짝 고대로 놓는 수법)에 많이 당했던 딸아이가

오빠도 저렇게 되었어야 하는데. ㅋㅋㅋㅋ

 

마지막에 홍수가 나서 악어가 나오고 미친사냥꾼이 앨런에게 총을 겨눌 때도 조마조마해하더니 이제 쥬만지 하면 끝이네, 하면서 좋아했다.

 

*

딸아이가 겁이 많아 다 볼 수 있으려나 했는데 나중에 게임이 끝나면 엄마아빠도 다시 살아나고 잘될 거 같다고 끝까지 본다고 고쳐 앉았었는데 잘 봐주어 기뻤다.

 

영화 끝나고 나서 내 말이 맞지 하며 의기양양.

 

아들은 얼마나 집중해보고 웃었던지 나중에 얼굴이 벌개져서 구니스 이후로 넘나 잘 봤다고.

 

어째 엄마 탓에 점점 애들 취향이 아재 취향으로

구니스, 인디아나존스, 백투더퓨처, 나홀로 집에... 이런 거 다 보고

이제 터미네이터 이런 것도 보려나.  

*

아들과 딸 모두 피터에 감정이입해서 쥬만지 판을 지키려고 응원하는 모습이 어쩐지 뭉클했다.

 

아이들 둘 다 뭐가 나올지 무서우니 그만 해, 하고 하지 않고

빨리빨리 던져, 빨리빨리.

 

그래,두려워 말고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가보는 거지.

 

어찌 되었든 아이들이 환상이 가득한 세계로 들어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대면해 위험을 헤쳐가다 결국엔 잃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고 더 강해지는 이런 해피엔딩이 이제 너무나 좋다.

 

그리고 눈물이 한참 많아지는 40대

여기 말로 여로워서 화면을 닫고 미뤄둔 설거지를 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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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개학하면 꼭 <리틀 포레스트>부터 보러 가려고 했는데 

지난 금요일 오전에야 겨우 보게 되었다. 진정한 스포주의, 영화 한 편 분량임 

 

임순례 감독, 류준열, 김태리 다 믿고 볼 수 있는 감독과 배우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이 상상되어 마음이 편했다. 영화를 보고 인터뷰를 찾아보니 역시나 내 짐작이 맞았고 일부 황폐한? 아니 범죄현장인 영화판과 판이하게 달라 안심이 되었다.

 

서로 존중하고 협업하고 표준근로계약을 지켜가며 만든 영화,

사람만이 아니라 곤충들, 소, 개와 같은 동물들 컨디션을 고려하며 만든 영화,

눈과 귀가 편안했다.

 

 

@사진은 류준열 배우가 찍었다고 함, 현장 분위기가 보이는 사진 +_+

 

 

원작과 다른 것은 한국적인 정서에 맞게 엄마가 혜원의 수능을 끝내고서야 길을 떠난 것과 친구들이나 가족과의 관계도 공들여 표현한 것이다.

 

요즘의 험한 현실을 의식하여 혜원이가 혼자 외딴 시골집에서 살 때의 치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돗개(이름마저 너무 예쁜 오구, 오구오구), 근처에 있는 고모를 작품 초반에 빈번히 등장시켰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감독 인터뷰 기사에서 봤는데 일본영화에 우체부가 등장하면 따스한 일이 일어날듯한데 한국영화에 우체부가 등장하면 긴장된다고. 후. 스릴러나 이런 데에 우체부가 나오기도 하고. 

다행히 이 영화에서는 우체부 역을 맡은 배우가 담백하게 잘 처리해주셨다.

 

혜원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용고사를 준비하다 남자친구는 합격하고 자신은 떨어지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낙향한다.

 

어릴 적 친구이자 읍내 은행원인 야무진 친구 은숙은 아픈 데를 콕콕 찌르며 왜 왔냐고 묻지만 혜원은 단지 배고파서 내려왔다고 한다. 도시의 인스턴트로는 혜원의 근원적 허기를 달랠 수 없기 때문이다.

 

혜원이 배고픔을 달래려고 언 밭에서 배추를 뽑아와 배춧국을 끓여 맛있게 먹고 난로를 피우고 편히 드러눕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수제비, 팥떡, 막걸리, 파스타, 아카시아꽃 튀김, 크렘브륄레 등 다양한 요리가 펼쳐진다. 아침도 대강 먹고 나온 터라 보는 내내 침이 고였다.

 

요리를 잘 못하는 별주부이긴 하지만 그릇이나 조리도구를 보고 경북 의성의 농가 부엌에 있을 도구들이 아니라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분당 새댁 주방을 옮겨온 듯 너무 이질적이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나중에 인터뷰 찾아보니 혜원의 엄마가 일본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관련 직업을 가졌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거라고 한다. 아마 영화 주 타겟이 20-30대 여성이라 그런지 모든 장면장면이 예뻤다. 

 

사과밭에서 재하가 입었던 체크 남방마저도 사과와 초록잎이 어우러지는 그런 패턴이었고 혜원이 입었던 니트 그리고 몸빼마저 아기자기 고왔다.

 

영화 초반부터 일찍 재하가 등장했고 혜원에게 오구를 안겨주고 자주 혜원을 돌봐주는 걸 보고 약간의 썸을 기대했지만 정말 담백하게 셋이 어울려 노는 게 보기 좋았다. 혜원의 말대로 서울이나 여기나 그놈의 연애, 연애. 여기에 보태서 어리건 늙었건 연애, 연애.

 

언제나 우리에겐 담백한 우정이나 굳건한 신의가 더 필요할 뿐.

 

애늙은이인 재하나 혜원은 애인에게 이별을 고할 때도 성숙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최대한 예의있게 보내준다. 젊은층이 흔히 택하는 잠수이별이 아닌 상대를 배려하고 자신이 선택해서 하는 이별의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혼자 제일 크게 웃은 장면.

 

은숙이랑 혜원이 재하를 두고 농담으로 공정 경쟁을 하네마네 하는 와중에 재하의 구여친과 마주한 장면이다. 둘 다 추레하게 입고 있는데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차려입은 재하의 구여친님이 바람에 살랑살랑 긴 생머리 휘날리며 등장해주신다. 그 옆에서 쑥스러운듯 지나가는 재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라는 속담은 조상님이 이런 상황에서 민망하지 말라고 만드신 속담이라지.

 

영화 내내 계절의 변화에 따라 농사를 짓고 농작물을 거둬들이고 보관하고 요리해서 먹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세 친구는 가끔 만나 먹고 놀지만 서로의 영역을 무리하게 침범하는 법은 없다.

 

막연하게 혜원과 재하는 어쩌면 연결되는 건가 하는 기대도 품어 보았지만

영화 마지막에 혜원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은 어쩐지 엄마일 것만 같다.

 

이 영화에서 혜원과 엄마의 관계는 친구들과의 관계보다 더 공들여 그려진다. 아빠의 요양차 시골로 내려왔지만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혜원을 시골에서 홀로 키우다가 혜원이 독립할 즈음 엄마의 삶을 찾아나선다. 말이 쉽지 이렇게 살아가는 엄마는 거의 없을 것이다.

 

아이가 어릴 때 필요할 만큼 충분히 보살펴주다가 아이가 독립할 즈음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기보다는 아이가 어릴 때 제대로 필요한 걸 채워주지도 못하고 아이가 독립할 시기에 엄마는 오히려 나약해져서 자식에게 기대려 하는 부모들이 꽤 많다.  그런 면에서 혜원의 엄마는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어머니 상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이며 여자이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며 역시나 류배우.

어떻게 자신이 필요한 그 자리에 꼭 맞게 찾아가는지.

분량은 많지 않지만 무게감 있게 작품 전반을 받쳐주고 있다.

 

시골에서 자라 대기업에 입사한 재하가 직장에서 상사에게 받은 모멸감은 미투 운동의 본질과 맥을 같이한다. 미투 운동이 거센 가운데 미투를 성 대결로만 잘못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위력에 의해 인격을 말살당하는 일은 남녀 불문하고 사회생활 초창기에 종종 겪게 되는 일이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만을 다루며 나도 당했다는 수동적인 외침이 아니라 위력에 의한 모든 사회악을 나도 고발한다는 것이다.  

 

재하는 위력에 굴복하는 삶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고 태풍으로 사과가 모조리 떨어지는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인다.

 

은숙 역을 맡았던 그간 내가 잘 몰랐던 진기주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노래방에서 성희롱을 일삼는 과장을 탬버린으로 과감하게 내리치는 장면이 많은 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사실 저런 상황이 닥치면 대개 몸이 굳기 마련이다. 은숙 역시 혜원에게 몇 번이나 고민을 토로하고서야 실행했을 것이다. 더 이상 참다참다 참아줄 수 없어서. 그 과장은 처벌받은 것도 아니고 전근갈 때가 되어서 다른 데로 가버렸을 뿐이라 아쉽긴 하다. 현실이 그러니 적절하게 그려진 것이다.

 

*

길지 않은 러닝타임인데 쓰다보니 이렇게 길어져버렸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건 결국

우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저마다의 숲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

 

언제나 마무리는 어려우니

어서 미사를 드리러 나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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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면 기분이 나아질 줄 알았는데

아이들 개학하고 새학년이 되면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힘들었던 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좀처럼 기운을 내지 못하고 있다.

 

<당신의 신>과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답답하고 막막했다.

 

억압을 가하는 제도권을 벗어나도

자유롭지 않고

궁핍과 굴종이 기다리는 삶

 

늑대 소굴에서 벗어나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는 여인이 가여웠다.

아프다고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상황.

 

연일 미투

구역질나는 그들.

<읍산 요금소>는 도처에 널려 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들과 딸을 어떻게 세상에 내놓아야 할지 참으로 막막하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

 

안돼요, 싫어요, 도와주세요, 를

기계적으로 외치며

환하게 웃는 아이들이 너무나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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