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개학하면 꼭 <리틀 포레스트>부터 보러 가려고 했는데
지난 금요일 오전에야 겨우 보게 되었다. 진정한 스포주의, 영화 한 편 분량임
임순례 감독, 류준열, 김태리 다 믿고 볼 수 있는 감독과 배우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이 상상되어 마음이 편했다. 영화를 보고 인터뷰를 찾아보니 역시나 내 짐작이 맞았고 일부 황폐한? 아니 범죄현장인 영화판과 판이하게 달라 안심이 되었다.
서로 존중하고 협업하고 표준근로계약을 지켜가며 만든 영화,
사람만이 아니라 곤충들, 소, 개와 같은 동물들 컨디션을 고려하며 만든 영화,
눈과 귀가 편안했다.

@사진은 류준열 배우가 찍었다고 함, 현장 분위기가 보이는 사진 +_+
원작과 다른 것은 한국적인 정서에 맞게 엄마가 혜원의 수능을 끝내고서야 길을 떠난 것과 친구들이나 가족과의 관계도 공들여 표현한 것이다.
요즘의 험한 현실을 의식하여 혜원이가 혼자 외딴 시골집에서 살 때의 치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돗개(이름마저 너무 예쁜 오구, 오구오구), 근처에 있는 고모를 작품 초반에 빈번히 등장시켰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감독 인터뷰 기사에서 봤는데 일본영화에 우체부가 등장하면 따스한 일이 일어날듯한데 한국영화에 우체부가 등장하면 긴장된다고. 후. 스릴러나 이런 데에 우체부가 나오기도 하고.
다행히 이 영화에서는 우체부 역을 맡은 배우가 담백하게 잘 처리해주셨다.
혜원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임용고사를 준비하다 남자친구는 합격하고 자신은 떨어지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고 낙향한다.
어릴 적 친구이자 읍내 은행원인 야무진 친구 은숙은 아픈 데를 콕콕 찌르며 왜 왔냐고 묻지만 혜원은 단지 배고파서 내려왔다고 한다. 도시의 인스턴트로는 혜원의 근원적 허기를 달랠 수 없기 때문이다.
혜원이 배고픔을 달래려고 언 밭에서 배추를 뽑아와 배춧국을 끓여 맛있게 먹고 난로를 피우고 편히 드러눕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수제비, 팥떡, 막걸리, 파스타, 아카시아꽃 튀김, 크렘브륄레 등 다양한 요리가 펼쳐진다. 아침도 대강 먹고 나온 터라 보는 내내 침이 고였다.
요리를 잘 못하는 별주부이긴 하지만 그릇이나 조리도구를 보고 경북 의성의 농가 부엌에 있을 도구들이 아니라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분당 새댁 주방을 옮겨온 듯 너무 이질적이라는 생각도 잠시 했다. 나중에 인터뷰 찾아보니 혜원의 엄마가 일본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관련 직업을 가졌던 정도로 생각하면 될 거라고 한다. 아마 영화 주 타겟이 20-30대 여성이라 그런지 모든 장면장면이 예뻤다.

사과밭에서 재하가 입었던 체크 남방마저도 사과와 초록잎이 어우러지는 그런 패턴이었고 혜원이 입었던 니트 그리고 몸빼마저 아기자기 고왔다.
영화 초반부터 일찍 재하가 등장했고 혜원에게 오구를 안겨주고 자주 혜원을 돌봐주는 걸 보고 약간의 썸을 기대했지만 정말 담백하게 셋이 어울려 노는 게 보기 좋았다. 혜원의 말대로 서울이나 여기나 그놈의 연애, 연애. 여기에 보태서 어리건 늙었건 연애, 연애.
언제나 우리에겐 담백한 우정이나 굳건한 신의가 더 필요할 뿐.
애늙은이인 재하나 혜원은 애인에게 이별을 고할 때도 성숙하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최대한 예의있게 보내준다. 젊은층이 흔히 택하는 잠수이별이 아닌 상대를 배려하고 자신이 선택해서 하는 이별의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혼자 제일 크게 웃은 장면.
은숙이랑 혜원이 재하를 두고 농담으로 공정 경쟁을 하네마네 하는 와중에 재하의 구여친과 마주한 장면이다. 둘 다 추레하게 입고 있는데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차려입은 재하의 구여친님이 바람에 살랑살랑 긴 생머리 휘날리며 등장해주신다. 그 옆에서 쑥스러운듯 지나가는 재하.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라는 속담은 조상님이 이런 상황에서 민망하지 말라고 만드신 속담이라지.
영화 내내 계절의 변화에 따라 농사를 짓고 농작물을 거둬들이고 보관하고 요리해서 먹는 장면들로 채워진다. 세 친구는 가끔 만나 먹고 놀지만 서로의 영역을 무리하게 침범하는 법은 없다.
막연하게 혜원과 재하는 어쩌면 연결되는 건가 하는 기대도 품어 보았지만
영화 마지막에 혜원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은 어쩐지 엄마일 것만 같다.
이 영화에서 혜원과 엄마의 관계는 친구들과의 관계보다 더 공들여 그려진다. 아빠의 요양차 시골로 내려왔지만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혜원을 시골에서 홀로 키우다가 혜원이 독립할 즈음 엄마의 삶을 찾아나선다. 말이 쉽지 이렇게 살아가는 엄마는 거의 없을 것이다.
아이가 어릴 때 필요할 만큼 충분히 보살펴주다가 아이가 독립할 즈음 아이를 자유롭게 풀어주기보다는 아이가 어릴 때 제대로 필요한 걸 채워주지도 못하고 아이가 독립할 시기에 엄마는 오히려 나약해져서 자식에게 기대려 하는 부모들이 꽤 많다. 그런 면에서 혜원의 엄마는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어머니 상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이며 여자이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며 역시나 류배우.
어떻게 자신이 필요한 그 자리에 꼭 맞게 찾아가는지.
분량은 많지 않지만 무게감 있게 작품 전반을 받쳐주고 있다.
시골에서 자라 대기업에 입사한 재하가 직장에서 상사에게 받은 모멸감은 미투 운동의 본질과 맥을 같이한다. 미투 운동이 거센 가운데 미투를 성 대결로만 잘못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위력에 의해 인격을 말살당하는 일은 남녀 불문하고 사회생활 초창기에 종종 겪게 되는 일이다. 미투 운동은 성폭력만을 다루며 나도 당했다는 수동적인 외침이 아니라 위력에 의한 모든 사회악을 나도 고발한다는 것이다.
재하는 위력에 굴복하는 삶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고 태풍으로 사과가 모조리 떨어지는 시련을 겪기도 하지만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인다.
은숙 역을 맡았던 그간 내가 잘 몰랐던 진기주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노래방에서 성희롱을 일삼는 과장을 탬버린으로 과감하게 내리치는 장면이 많은 이들에게 대리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사실 저런 상황이 닥치면 대개 몸이 굳기 마련이다. 은숙 역시 혜원에게 몇 번이나 고민을 토로하고서야 실행했을 것이다. 더 이상 참다참다 참아줄 수 없어서. 그 과장은 처벌받은 것도 아니고 전근갈 때가 되어서 다른 데로 가버렸을 뿐이라 아쉽긴 하다. 현실이 그러니 적절하게 그려진 것이다.
*
길지 않은 러닝타임인데 쓰다보니 이렇게 길어져버렸다.
이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건 결국
우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저마다의 숲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
언제나 마무리는 어려우니
어서 미사를 드리러 나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