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관련해 사고가 났습니다."라는 연락을 받으면 누구나 내 아이가 얼마나 다쳤나, 하고 염려부터 할 것이다.

 

그런데 내 아이가 가해자라면, 꿈에라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면 내 아이와 내 인생은?

도대체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되짚어보고 자책도 해보아도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침묵을 삼킨 소년>은 읽었고 나머지 두 책은 모임에서 소개받은 책들이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들 책을 한동안 읽다보니 으스스했고, 아이들을 키운다는 게 무겁고 힘들게만 여겨졌다.

 

미야베 미유키도 그렇고 다른 일본 작가들도 그렇고 결국 끔찍한 범죄 뒤에 (엄마) 양육의 부재와 학교 폭력, 소년 범죄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 인생은 아이 기질+양육+학교, 사회 환경이 아닐까? 하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엄마에게만 양육의 무거운 책임을 묻는다는 건 너무 간편하고 무책임한 일이다. 그리고 특히 청소년기에 친구나 환경의 영향이 크고 충동적이기 쉬울 때 아이의 근간에 자리잡은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는 게 아닐까, 하는 다소 교과서적인 정리를 했다.

 

요즘 아들이 사춘기라 고민이 많은데 어느 정도는 내 손을 떠나간 일이고 이제 아이가 책임질 부분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겠다. 아이 성적표가 내 인생 성적표도 아니고 아이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았으니 큰 기대도 실망도 금물.

 

미취학 초등 초중학년기 지나 고학년에 이르니 어느 정도 아이 현재 위치가 보인다.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지표들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지켜봐야지.

 

하지만 꼬꼬마 영유아기부터 하다못해 머리둘레, 키, 몸무게나 걷고 기저귀 떼고? 말하는 개월 수 따위에 집착하던 중생이라 뭐 온전히 마음을 비우게 될 것 같지는 않다. ㅋ

 

 

 

 

 

 

 

 

 

 

 

 

 

 

 

 

한동안 아니 요즘도 '자존감' 영업은 꾸준하다.

 

그나마 수많은 '자존감' 관련 서적 중에서 나은 책들.

 

오랫동안 심리학자들은 자존감에 대해 연구해왔다. 지금까지 내려진 큰 결론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처한 삶의 환경'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지 않은 채 자존감만을 상승시키려는 시도는 별로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듯 나 자신에게도 너그럽고 자애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것(자기 자비)이나 자신을 판단해 버릇하지 않는 것(마음 챙김)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7쪽>  

 

즉 우리가 부러워하는 건강한 자존감의 소유자들은 자존감이 높기 때문에 삶이 괜찮은 게 아니라, 삶이 이미 어느 정도 괜찮기 때문에 자존감이 높은 거라는 얘기다. 높은 자존감 덕분에 연봉이 높고 인간 관계가 좋은 게 아니라, 이미 그럭저럭 성공해왔고 인간관계도 잘 되어왔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자존감이 높은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30쪽

 

이러한 이유로 학자들은 스스로에 대한 너그러움이야말로 높거나 낮은 자존감이 갖는 단점은 없으면서 장점은 가지고 있는 높거나 낮지만 건강하지 않은 자존감의 아주 좋은 대안이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자존감에 상처가 났을 경우 너그러움이 좋은 해결책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진정한 자존감 또는 건강한 자존감을 갖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져야 한다.

- 84쪽

 

만약 시험 준비 중이라거나 큰일을 앞둔 경우 거울을 보며 난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주문을 걸고 무리하게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보다는 꾸준히 매일 할 수 있는 분량의 목표를 정해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자기 마음을 챙겨가며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회적 기준에 부합할 때만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게 여겨지는 상태에서도 자신에게 너그럽게 대하고 자신의 감정을 챙겨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비교가 아니라 기준이다.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199쪽>

 

자존감을 정상화시키는 첫걸음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207쪽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동물이라서 나 혼자 이 정도면 괜찮다고 정신 승리하는 게 있을 수 없다. 지금같이 사회, 공동체 대다수가 외모나 연봉, 사회적 위치 등으로 끝없이 개인의 자존을 깎아내리려는 세태 속에서는 아이들이나 우리나 제대로 성장하고 나아갈 수 없다.

 

아이들이 유아 초등을 거치면서 계속 외모나 성취에 대한 발언을 듣고 하는 요즘,

그래서 고민이 많다.

 

나 혼자 아무리 우리 왕자님, 공주님 우쭈쭈하면서 키워놓는다고 해서 아이들이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도 역시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닌 립서비스나 빈말 정도는 구분하게 되면서 칭찬의 기술이 부족해 늘 어렵다.

 

특히 외모에 대한 칭찬은 고만해야겠다.

생각보다 냉철한 두 아이들, 엄마 진짜 엄마 눈에만 그래.

 

 

 

 

 

 

 

 

 

 

 

 

 

 

 

 

 

 

생각보다 자존감 높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

 

<베를린 일기>에 이어 꽈배기 시리즈는 한동안 애들이랑 나다니면서도 잘 읽었다.

<고민과 소설가>는 살까 말까 고민하게 만든다.

 

<꽈배기의 맛> 홍상수 얘기에 공감하며 크게 웃었다.

별다를 것 없는 '하는' 이야기들에 예술적 미학적 가치를 입히고 그렇게 추어올려줘야 했나 싶다.

과거에 씨네 21 정기구독하며 혼자 열내던 일들이 그냥 다 뭔가 싶다.

 

김기덕 사단도 마찬가지.

그 아까운 시간들에 뭐하러 힘든 영화 보며 고뇌하며 살았던가.

 

<꽈배기의 멋>에 나오는 릭 애슬리 이야기도 대공감.

 

역시 거의 동시대를 거쳐오며 아재력, 이모력 충만한 사람들은 재미있게 읽어갈 것이고 그 이상이나 이하라면 이게 책이 되나 싶을 것이다.

 

꽈배기나 도너츠는 다른 베이커리 류에 비하면 하급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래도 허기를 채우고 간단한 요기하는 데는 그만이다. 뭔가 책은 보고 싶은데 무거워지는 건 싫을 때 추천.

 

 

아래 책들도 놀이터용

 

 

 

 

 

 

 

 

 

 

 

 

 

 

 

 

 

 

 

<거의 정반대의 행복>은 거의 중반을 넘어가면서도 계속 다 읽을까 말까 고민하게 만드는 책인데 결국 봤다.

 

미취학 영유아 꼬꼬마 시기를 한참 넘기고 나서 육아 이야기 듣는 건 민방위도 졸업한 아저씨가 군대 이야기 듣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힘든 건 아는데 아 뭐 다 그럴 때야 하고 웃으며 등두드려주게 되거나 아 나 때는 말도 말아 더 힘들었어, 난 왜건도 없이 두 아이를 다 길렀다고. ㅋ

 

난다 님 이야기 중에 자신은 육아를 2인3각 경기라 여기고 남편은 계주, 즉 바통을 터치하는 걸로 생각한다는 데 공감이 갔다. 아내들은 힘든 상황에서 조금은 효율이 떨어져도 함께 겪기를 원하고 남편들은 번갈아 순번을 정해 하기를 원한다. 물론 남편, 아내 성향이 반대인 경우도 있다.

 

시호 자랑, 전지적 고슴도치 시점이 거의 책의 3분의 2이긴 하지만 육아하는 젊은 엄마에 대한 사회의 관대하지 않은 시선, 폭력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만했다.

 

아직 '맘충' 소리 나오기 이전에 아이들 꼬꼬마 시기가 지나갔고 특히 그 시기를 시골에서 보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요새 마구마구 든다. 광주나 근교도 요새 조금 갈 만한 식당이나 카페는 다 노키즈존이다.

 

우리 애들은 초등 고학년인데도 그런 카페에 못 간다. 진짜 딴건 몰라도 같이 조용히 책볼 수 있는데 ㅜ.ㅠ 같이 근교에서 경치 보며 책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한다.

 

유병재 책은 익히 보았던 SNS 모음.

아들이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유병재 유규선 토마토 랩을 보고 뒤로 넘어가며 웃어서 같이 보다가 역시 아직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뺏었다.

 

'딸 같아서 딸 치려고' 이게 무슨 뜻이야. 진짜 몰라서 묻는 거겠지

어리숙한 5학년이라 그런지 아직은 성에 무지하다.

 

아니면 내가 어리숙한 걸 수도 있을까.

요즘 하도 방문을 잠가서 단도직입적으로 영상 보냐고 묻기도 했는데 알 수가 없으니.

 

이런 책이라도 차차 봐주어야 하나 싶다.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딸 같아서 추행하고 아들 같아서 갑질하는 행태가 사라질 수 있을까.

 

다 쓰고 나니 전형적으로 의식의 흐름에 따른 페이퍼네.

 

잔걱정 많고 자존감 낮은 엄마는 *'짜잔한' (저자들에게는 죄송스러운 표현이지만 상황이 그렇다고요. 공원에서 애들 수발들며, 혹은 밥하며 혹은 수업 가며 이동 중이거나 틈새에 읽기 편하다는)  책들에  기대 무더위와 미세먼지 가득한 이 시기를 나고 있다는 것일뿐.

 

 

*'짜잔하다'도 내가 이런 상황에서 쓰니 뭔가 전라도 스웩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사전적으로 '짜잔하다=못나다'라고는 나오지만 막 정겹게 못난 그런 느낌이다.

자매품으로 '귄있다' 역시 못생긴 건데 진짜 매력있고 끌리고 그런 상황이라 한다.

 

귄있다라는 소리를 처음 듣고 귀인있다로 알아듣고 엉뚱한 소리 했었다.

 

참, 스웩 뜻을 찾아보니 셰익스피어가 <한여름밤의 꿈>에서 먼저 썼다고 한다.

 

오늘은 빌려온 이 책도 좀 보고

1권이 겨우 들어온 <안나 카레니나>도 보련다.

 

 

 

 

 

 

 

 

 

 

 

 

 

 

 

그나저나 도서관 미스터리

 

고전 시리즈는 1권만 늘 대출중인 게 진짜 미스터리.

 

그래도 언젠가는 고전들도 차차 읽어나갈 수 있다는 큰 꿈을 품고

신새벽의 페이퍼를 마감하고 아침을 챙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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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주말 그리고 월화에 걸쳐 스산한 책들만 파고들었다.

 

미아베 미유키의 <모방범>은 듣던 대로 명성에 걸맞게 단번에 읽어낼 수 있게 흡인력이 있었다.

 

읽다가 미사를 갔는데 마리코와 요시오 할아버지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범인들에게 농락당하는 철저하게 순결한? 피해자라서 그런지 더 감정 이입되어 읽었다. 의연한 삶의 태도로 큰 감동을 준 요시오 할아버지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내용 유출 주의)

 

아리마 요시오는 범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이고, 대담한 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범인이 손녀를 방패로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것을 보고 그녀의 죽음을 확신하는 사람이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인만큼 추측의 범위에 두면 되는 것도 과감히 사실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다. 아무리 처참하고 고통스럽더라도, 허황된 희망이나 낙관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다.        1권    276쪽

 

1권에서는 사건이 전개되면서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 그것을 다루는 언론들의 행태가 소개된다. 2권에서는 가해자들의 성장배경과 가해자들에 대한 추적이 주를 이룬다. 3권에서는 범인의 검거와 뒷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검거 과정이 사실 그간의 엄청난 사건들에 비하면 좀 싱겁게 예측 가능하게 끝나는 면이 있다.

 

 

 

 

 

 

 

 

 

 

 

 

 

 

 

 

사회파 추리소설이지만 심리묘사가 뛰어나 여기저기 서표를 붙이며 읽었다. 1, 2권에 좀 많이 붙이다가 3권에 이르러서는 좀 맥없이 끝나는 감이 있어 별로 붙이지 않았다.

 

돈과 몸을 물물교환하면 뒤끝이 없다. (중략) 그러나 구리하시 히로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치아키의 내면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치아키의 생명을 담보로 그녀의 감정을 마구 흔들며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치아키가 한 번도 가격을 붙여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것에 값어치를 매길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바꾸어 말해, 비밀스런 공간에 간직해두고 있는 것일수록 더 비싼 값어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소녀였다면 자신의 몸만을 돈을 받고 팔 수는 없었을 것이다. 2권 85쪽

 

작가가 가출 소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단순한 몸의 거래가 아닌 값을 매길 수 없는 '자존'의 거래다. 성노동자라는 말은 허울 좋은 말뿐 그렇게 자존을 심각하게 훼손해야 하는 노동이라면 노동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사이코패스인 범인들은 피해자의 내밀한 과거를 억지로 이야기하게 하고 가족들에게 나중에 알리고 조롱하는 일을 반복하며 자신들이 전지 전능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생명을 무조건적으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든지, 사회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든지 그런 생각을 조롱하는 지향성?"

노리코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든 것보다도, 따분하지 않은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지향성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잠깐 생각하고는 덧붙였다.

"응, 맞아. 가장 두려운 것은 인생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고, 아무런 자극도 없는 인생을 보낼 바에야 죽는 편이 낫다는 그런 지향성." 3권 284쪽

 

히로미나 피스 둘 다 어린시절에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했고 자신들의 명석한 두뇌와 멋진 용모를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데에 쓰고 만다.

 

"진정한 악이란 이런 거야. 이유 따위는 없어.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원한, 애증, 돈, 그런 이유가 잇다면 피해자도 납득할 수 있겠지. 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 거야. 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 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 그야말로 완벽한 '악'이야."   2권 203쪽

 

무고한 여성들을 희생시킨 '피스'는 악의 화신이었다. 

 

'피스'는 특히 자신이 모든 범죄를 기획해 연출하는 전지전능한 유일무이한 신적인 존재라는 데에 자부감을 갖고 있다가 그것 때문에 파멸한다. 르포작가 시게코가 '피스' 역시 다른 범죄의 모방범일 뿐이라 몰아붙이자 생방송에 자신의 악행을 고백하고 만다.

 

'악'을 두고 독창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작업일게다.

 

이밖에도 미야베 미유키가 여성을 타켓으로 한 강력 범죄가 자주 일어날 때 여성들은 어떤 심리 상태가 되는지 그 불안과 공포를 잘 살렸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팔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가장 공포스럽지 않은가?

 

 

 

 

 

 

 

 

 

 

 

 

 

 

 

 

 

오래 전에 받아둔 책이다.

 

이제야 다 읽고 나니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기분이다.

 

<모방범>에 비하면 잔혹함이 덜하지만 가상의 범죄보다 더 오싹하다. 평범한 인간의 그럴듯한 이유를 붙인 소소한 악이 더 무섭다. 악이라 믿지 않는 악이 더 무섭다.

 

교양 있고 지각 있던 장모가 딸을 잃고 사위의 불륜을 확인하면서 황폐하게 변해가는 과정이 소름 끼쳤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불륜에 빠진 대학교수가 아내와 여행을 떠나다 아내는 즉사하고 자신은 전신마비 상태로 살아남아 (사위의 불륜이 기록된 딸의 유품을 확인한) 장모에게 학대당한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의 이름은 '오기'.

 

'오기'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마음이나, 잘못 적힌 것이라는 뜻이 있다.

 

다 읽고나니 주인공 이름에 대해 그 두 가지 해석 다 가능하다는 생각도 든다.

 

남이나 운명에 지기 싫어 열심히 살았지만 뭔가 잘못 적힌, 본래 쓰려던 것과는 다른 것을 써버린 듯한 인생이 되어버렸다.

 

큰 사고로 장애를 입고 이렇게 생의 막다른 데까지 치닫다 보면 의사든 주변 사람이든 의지를 좀더 가지라고 한다.  

 

말조차 할 수 없는 주인공은 '의지'로도 부족해 진짜 어떤 '오기'를 품고 끝까지 생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지만 결국 거대한 구멍에 빠지고 만다.

 

아프지 않았을 때는 마주칠 가능성도 없었던 교양 없고 양심은 더 없는 간병인의 살냄새와 감촉, 간병인의 망나니 아들이 입술에 축여준 싸구려 위스키에 감동하기도 하는 생의 아이러니라니.

 

간병인도 못 믿고 그 비용마저 아까워 장모가 직접 오기를 간병하면서 오기의 존엄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장모는 오기의 이전 불륜 상대를 병실로 불러내어 오기의 망가진 삶을 보여준다. 오기는 그런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녀를 바라지만 다시 그녀가 오기를 찾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생전에 아내가 한 남자가 아내를 배신하고 이름을 바꾸어 다른 곳에서 다른 여인과 사는 소설을 읽고 울 때 오기가 그런 아내를 달래준 적이 있다. 자신의 유일무이함이 곧바로 다른 걸로도 대체될 수도 있다는 데 절망한 아내를 그때의 '오기'는 이해하지 못했다.

 

깊고 어두운 구멍에 누워 있다고 해서 오기가 아내의 슬픔을 알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내를 조금도 달래지 못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아내가 눈물을 거둔 것은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지,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는 아니었다.

 오기는 비로소 울었다. 아내의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럴 때가 되어서였다. 209쪽

 

결말이 다했다, 진짜.

 

각자의 슬픔, 구멍은 고유하다, 정말.

 

오기는 참혹한 사고를 겪고 살아남아 불륜을 후회한다거나 아내를 추억하는 일 없이 자신의 몸상태 회복과 이전 상대와의 만남, 좀 더 나은 상태만을 열망한다. 물론 이것에 대해 비난하거나 욕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을 것이다.

 

집 밖으로 탈출하려다 장모가 파놓은 구멍에 빠져서 울면서도 그간의 자신의 생을 후회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을 위해 울어줄 때가 되어서 운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생의 깊은 구멍에 빠진다 해도 전에 구멍에 빠졌던 이들을 이해한다거나 그들의 슬픔을 똑같이 겪을 수는 없다.

 

그 누구도 타인의 슬픔을 대신해 그만큼은 슬퍼할 수 없다는 것.

비정한 생의 진실만이 엄정하게 남는다.

 

 

 

 

 

 

 

 

    

 

 

 

  

 

 

 

어쩌다 눈에 띄어 도서관에서 집어든 책인데 아직은 읽고 있다.

 

사람은 함께 산 배우자를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형태로 종지부가 찍힌 후에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고는 좀 더 대화를 나눠볼 걸 그랬다, 얘기를 들어줄 걸 그랬다고 후회한다.
그러나 가령 살아 있을 때 대화를 나누고 얘기를 들어주었다 한들, 그래서 과연 이해가 깊어졌을까.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배우자 역시 타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이다. 가족은 생활을 함께하는 타인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홀가분하다. 

 

 

어쩌다 보니 <홀>과도 일맥상통하는 구절이다.

 

중반까지 읽고 있는데 가족관계에 대한 쿨하고 건조한 시선에 공감하기도 하면서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가족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겠지.

 

 

 

 

 

 

 

 

 

 

 

 

 

 

 

 

딸이 그렇듯이 나도 어둠이나 구멍을 들여다보는 걸 이 나이까지 참 무서워한다.

 

그런데 요 며칠 스산한 책을 읽다보니 참 버겁다.

 

이런 책들만 보다보니 버겁고 오싹해져서 딸아이가 밤에도 무서움 없이 자주 보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기 나오는 어둠이나 구멍은 스산하지 않고 뭔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듯한 그런 느낌을 준다.

따스한 삽화가 더해져서 더 그렇다.

 

수프를 만들어주는 토끼, 머리 감겨주는 라쿤, 방아깨비 과학선생님 다 정겹다.

 

마음을 꺼내 닦아줄 수 없으니 머리를 감겨준다는 라쿤의 말처럼

혼탁한 마음을 닦아주고 마음 속 깊은 구멍을 메울 뭔가가 필요하다.

 

너무 며칠간 음지의 책들만 봐서 주문.

 

 

 

 

 

 

 

 

 

 

 

 

 

 

 

 

 

 

 

 

 

 

 

 

 

 

 

 

 

이 책들이 배송중이라고 뜨네.

사전 투표도 했으니 여유롭게 읽어봐야겠다.

 

다시 양지의 독서로 나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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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과 오늘 오전에 걸쳐 틈틈이 <화차>를 다 읽었다.   

초등이라지만 전담육아는 힘들어.

그래도 아이들이 친구랑 노는 사이 다 읽어 고맙네.

과일, 아이스크림도 주고 중간중간 흐름이 끊기기는 했지만 이 여름에 몰입도 최고다.

 

<이유>, <눈의 아이>, <화차> 순서로 미미 여사를 만났는데 정말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가답다.

 

일본 사회가 지난 시절에 겪었던 문제를 우리 역시 그대로 겪고 있다. 요새도 사회면에 심심치 않게 일가족 자살이라든가 빚에 몰린 사람들의 범죄라든가 하는 소식이 나온다.

 

짧게 몇 줄 보도되고 말지만 그런 빚을 진 가정이 생기면 도미노같이 주변이 모두 같이 쓰러지는 걸 보았다. 

 

갚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일까?

갚을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이 쉽게 빚을 낼 수 있게 만드는 구조가 문제일까?

 

질낮은 일자리, 장시간의 노동으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너무나 손쉽게 소비를 택한다는 것, 아니 과소비가 아니더라도 대도시에서 자신이 머무를 공간을 마련하는 데 너무나 돈이 많이 든다는 게  우리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이다.   

 

소설을 다 보고 오후에 Btv로 김민희의 <화차>를 보았다. 김민희의 연기도 좋았고 교코 이미지와  맞는 부분도 있지만, 뭔가 더 서늘하고 신비한 여인, 약간 더 지적 이미지가 있는 배우가 했어도 좋았을듯하다. 유선이나 선우선이 일단 떠오른다. 

 

김민희는 뭔가 너무 쉬운 선택 같아 그 점이 아쉽다.

이선균하고 친척 형사님 죄송하지만 원작 느낌이 살지 않아요. ㅜ.ㅠ

 

방대한 분량을 담아내려다 보니 여기저기 각색이 되었는데 약혼자가 직접 교코를 찾아다니는 설정이다 보니 감정이 극단에 이르고 결말은 많이 아쉽다. 그 불쌍한 여인을 그렇게 극단으로 몰아가야 하는 건지.

 

그래도 중간중간 원작 설정을 많이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난 그냥 미미 여사의 결말과도 같이 교코의 서늘하고 자그마한 그 어깨를 잡고 말을 걸고 싶다.

 

처음에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고민하면서.  

 

 

 

 

 

 

 

 

 

 

 

 

 

 

 

오전에 <화차> 다 보고 고른 책들이다.

<꽈배기의 맛>은 도서관 갈 때마다 야금야금 보다 이번에는 빌려왔다.

아들이 요리책이냐고.

 

넌 요리책 보면서 이렇게 웃을 수 있니?

 

<엄마들>은 처음부터 그냥 엄청 세다.

 

표지를 보고 생계를 위해 드잡이하는 엄마들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다. 이 책은 남들이 기피하는 노동을 하며 그 와중에 열렬히 연애하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비릿한 치정 이야기가 많다.

 

작가분이 여자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아들'이라고 나온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정말. 이런 아들도 있구나. 엄마 밥, 엄마 돈,만 외치는 아들이 아닌 엄마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는 아들이 엄마의 진짜 인생을 담았다. 어릴 때 소래포구나 서울 근교 가든에서 보았던 꼴사나운 중년 무리( 이제 내가 그 나이가 되었네 )에게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고 자신의 처지에서 맛볼 수 있는 작은 사치나 행복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문자 그대로 비루하고 초라해 보여도 그렇게 한 생을 건너가야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남편은 있지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거나 부재중이다. 생계를 위해 청소일, 마트 판매, 식당일 등 같은 고된 노동을 해야 하고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해 밤업소에서 만난 시원치 않은 사내들과 연애라도 해야 버틸 힘을 내는 것이다.

 

하나하나 다 우울한 사연이다.

그래도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당당하게 삶과 맞서는 이 엄마들을 누가 손가락질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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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시작한 일로 학교측, 학부모와 상대하며 가끔 마음 상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며칠 동안 책으로 만난 여러 여인들의 삶 그리고 엄마의 삶과 비교하면

얼마나 안온하게 살아가는 것인지.

 

겨우 내 책값, 커피값 정도 벌지만

이마저도 못 버티면

자립, 자존과는 영영 멀어진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멋진 선물이지만 엄마라는 말로만 자신을 정의해서는 안 돼. 충만한 사람이 되도록 해. 그게 네 아이에게도 이로울 거야. 17쪽

 

실패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져. (중략) 하지만 무엇보다도 충만한 사람으로 남는 것에 더 신경 써.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져. 너의 기본적인 욕구들을 채우도록 해. 18쪽

 

다 아는 이야기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읽지 않으려다 보았는데

단순명료하게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조근조근 들려주고 있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현재 한국에서는 너무 오염되어서 함부로 쓰기 힘든데

그냥 나로 살아가는 게

아이에게나 나 자신에게나 이롭다는 

전혀 과격하지 않은 주장이 담겨 있다.

   

요즘 내가 다시 나로서의 감각을 찾다보니

아이들에게 상당히 너그러워진 걸 보면 알 수 있다.

 

때이른 더위가 찾아왔지만

서늘한 이야기들

올여름도 잘 부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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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 늘리는 법 -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땅콩문고
박일환 지음 / 유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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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하나

요즘은 일주일에 두 번 학교에 나가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아이들이 하루에 쓰는 단어가 몇 개 되지 않아 놀라곤 한다.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도 짜증나, 화나, 힘들어, 지루해 등등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극혐(애들말로 그켬)으로 압축된다. 저희들끼리 비난할 때는 '인성 쓰레기네' 로 요약된다.

 

# 장면 둘

카페에서 대화가 들린다. 비루한 몸뚱이가 어쩌고.

'비루하다'는 사전적으로

 (鄙陋--) [비ː루하다]

 [형용사]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

 

돌아보니 출산 후 몸이 다들 좀 불었겠으나 천하고 너절하고 더러운 정도는 아니다. 온라인상에서 뜻도 모르고 재미 삼아 자주 쓰다 보니 여기저기 다 비루해졌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한때는 '비루하다'라고 온라인에 자주 쓴 적이 있다.

 

무한도전에서 자막으로 퍼뜨린 말 '육덕지다'도 소설 등에서 육덕이 크다, 육덕 좋은 식으로 쓰였다.

 

육덕 (肉德)[육떡] 

[명사] 몸에 살이 많아 덕스러운 모양.

 

예능에서 쓰는 어감과 약간은 다르지만 육덕지다까지는 내 기준으로는 봐줄 수 있다. 하지만

백종원 씨가 퍼뜨린 '고급지다'는 어딘가 불편하다.

 

 

<어휘 늘리는 법>에는 언중들의 다양한 언어 현상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다.

 

1. 현대인은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어휘가 빈곤하다.

책을 읽을 시간도 사람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예능에서 쏟아내는 말초적인 자극적 표현에 길들여져 있다. 누가 더 세게 독하게 재미있게 말하나 겨루고 있다.

 

청소년의 어휘력이 부족하게 된 이유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예전에 흔히 볼 수 있었던 물건이나 풍경, 관습이 사라지거나 어휘 자체가 바꾸니 탓도 있을 테고, 한자 교육 비중이 낮아져서 한자로 된 개념어를 익힐 기회가 적었을 수도 있다. 반면에 청소년일수록새로 생겨난 말에 대한 적응력은 무척 높은 편이다.        20쪽

 

 

책을 읽는 동안 한국사회 전체의 문해력이 높기는 하지만 중장년층의 어휘력이 빈곤하다는 통계에 많이 놀랐다. 학교를 졸업하면 책을 잘 읽지 않고 지식의 변화 주기가 빠른 사회라 장년층 이상에서 그 속도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 아이들이 어휘가 빈곤하다 타박하는 나도 새로 만들어진 말이나 기술용어 등에 취약하다.

 

2. 어휘가 중요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어휘가 지식 습득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며 단어를 물어가며 폭발적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교직생활 이후로 글을 쓰는 필자답게 그간 문학작품에서 접한 다양한 어휘를 소개하고 있다.

 

삽상하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마음이 아주 상쾌하다, 라는 뜻의 형용사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밖에도 대하소설에 나오는 다양한 우리말 표현이 소개되어 있다.

 

아무래도 요즘에 학생들은 자연이나 전통문화에 대한 단어를 영단어 외우듯 수능을 위해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김소월, 백석의 시를 읽다보면 학생들은 도무지 무슨 소리이고 왜 아름다운지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아 씁쓸하기도 하다. 많이 접해보지 않아 낯설고 어색한 탓일게다.

 

3. 자신만의 어휘를 만들어 써도 좋다.

자신만의 어휘라는 건 사전에는 없지만 내가 만들어내어 주변과 쓰면서 뜻이 잘 통하게 된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는 자신들이 만든 신기한 단어를 많이 쓰곤 했다. 새우깡이니 감자깡이니 하는 스낵류를 먹을 시기에 '자갈치'를 접하고서 이건 왜 '문어깡'이라고 안 하냐고 했었다.

 

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를 쓸 때면 저는 항상 엎드립니다. 정말 엎드리는 것은 아니고 마지막에 제 이름을 쓴 다음 '엎드림'이라고 썼어요. (중략) 앞에 소개한 김상득 씨의 경우 '엎드림'이라고 보냈더니 그걸 본떠서 '일으켜 세움' 또는 '마주 엎드림', '더 납작 엎드림' 같은 말을 사용해서 답신을 보내온 이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79-80쪽

 

유쾌한 장면이다.

이처럼 나만의 어휘를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연애할 때 별칭을 짓는다거나 친구들 이름을 형용사로 활용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니 빙그레 미소 짓게 된다.

이름이 미정인데 지각을 자주 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참 미정미정거린다, 고도 했었는데.

 

4. 우리말의 풍부한 자산 지역말, 방언을 스스럼없이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단어를 그 지역 상황에 맞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유정의 동백꽃은 실은 강원지역에서는 노란 빛이 도는 생강나무 꽃을 뜻하며 김동인의 감자도 1920년대에는 고구마와 감자를 한데 섞어 감자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이 지역에 와서 5년을 살았는데도 사람들은 내 말투만으로 여기 분 아니죠, 라고 한다. 내가 아무리 여기 오래 산다 해도 '느자구'라든가 '귄있다'를 상황에 맞게 살려 쓸 자신은 없다. 제일 적응이 안 되었던 말이 '-하시게요'였는데 명령이 아닌 극존칭이었다.  

 

강원도 사람들은 '뼝대' 혹은 '뼝창'이라는 말을 쓴다, 표준어로 하면 절벽이나 벼랑에 해당하는 말인데, 뼝대와 절벽은 같은 말이긴 하지만 귀에 와 닿는 느낌이 다르다. 강원도가 산간 지역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어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작접 가서 험한 산세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99쪽

 

아이들 어릴 때 잠시 강원도에 산 적이 있는데 북한말 억양과 낯선 어휘에 당황한 적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강원의 지형을 표현하기에는 그 지역 말만한 것이 따로 없을 것이다.

 

5. 번역어, 사회적 어휘 자산 늘리기 관련한 장에서는 일본 난학자들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많은 어휘를 새로 만들어 쓰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래도 일본의 어휘를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점이 아쉽다.

 

6. 습작기 소설가들은 간혹 사전을 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자신만의 어휘를 늘리려면 여러 책 특히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서 늘리는 편이 낫다.

 

여기에 덧붙여 책을 읽기만 하는 것으로 한계가 있는듯하다. 어릴 때 책에 한참 빠져서 뭔가 남들이 안 쓰는 말 어른들이 쓰는 말, 문어체를 그대로 일상에서 쓴 적이 있다. 담임선생님이 편찮으시면 '정양을 잘 하시고' 이런 식으로 말했으니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한정된 분야의 책을 읽기보다는 여러 계층,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휘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회화 학원에서 영어로 말할 때 무슨 뜻이냐고 묻고 답하고 했듯이 국어생활에서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

번외로

야민정음, 급식체에 대한 생각도 뭉게뭉게.

 

요즘 유행하는 야민정음, 시각적으로 표기가 비슷해 보이는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꾸는 놀이를 한글 파괴라고만 볼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언어 유희 방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귀엽다를 '커엽다'라고 하는 것이나 멍멍이를 '댕댕이'라고 하는 정도는 봐줄 수 있고,

너무 암호같은 것은 사실 꺼려진다.

 

 

어찌 되었든 간에 국립국어원, 국어 규범에만 얽매이는 언어생활이 아닌 창의적이고 풍부한 언어생활을 위해서는 자신이 자주 쓰는 말, 주변의 언어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얇지만 여러 면에서 언어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이었다.

 

어휘가 풍부한 것도 좋지만 상황에 맞게 적재적소에 정확한 단어를 쓰려면 별도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연유로 앞으로 글을 읽고 쓸 때마다 사전을 자주 찾아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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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카페에 간혹 가보았지만 그렇게 마음에 드는 곳은 찾지 못했는데

지난주에 정말 귀한 곳을 발견했다. 

 

누추한 분이 이리 귀한 곳에가 연상될 정도

 

혹은 홍대병 환자같이 나만 알고 싶은 곳.

 

하지만 여러 블로그, 인스타 등에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서 가오픈이고 평일인데도 사람이 있는 편이었다.

 

노키즈, 노스터디

 

다른 식당들 노키즈존은 조금 이해가지 않는 면도 있었는데 이곳은 이해된다.

 

그래서인지 큰소리로 대화하는 사람이 없고 같이 와서도 다들 자기 책만 보는 분위기이다.

 

물론 혼자 오신 분이 상당수. 

 

 

입구도 정갈하다.

 

 

음료를 준비하는 곳과 그리고 음반들이 한쪽 벽면에 가득. 

 

이쪽 벽면에는 사진, 영화, 예술 책들로 가득하다.

귀한 책들 이렇게 보게 해주시니 감사하다.

 

팝업북과 예술만화들이 한쪽 벽에 정돈되어 있다.

 

 

2층에도 책이 가득

 

여기 혼자 책보는 분이 계셔서 찍다 말았다.  

 

 

 

내가 가져온 책도 보고 비치된 책들도 보다가 집에 갈 시간이 되어 일어섰다.

 

다음에는 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때 가보아야지.

 

이책 저책 엄청 떠들어보았는데 이 세권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의 노래> 속 슬픈 가정사에 마음 아프다가 <익명의 엄마들>, <한씨네 삼남매> 보고 웃을 수 있었다.

 

<익명의 엄마들> 재치 최고!

 

 

저런 순간이 있다.

 

 

어쩌면 아빠들은 이해못할 그런 기분.

 

엄마들에게 때로는 정신과 시간의 방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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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6-04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액자 속, 컵에 있는 이름이 카페 이름?? ^^
Sontag은 수전 손탁일것 같은데 Eicher 는 누군지 모르겠어요.
올려주신 책들 모두 눈길이 가네요.

뚜유 2018-06-04 07:5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사장님이 수전 손택과 만프레드 아이허를 좋아하셔서 그렇게 지으셨다고 해요. ^ ^

좋은 책들이 가득한 아직은 고요한 곳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