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 늘리는 법 -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땅콩문고
박일환 지음 / 유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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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하나

요즘은 일주일에 두 번 학교에 나가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아이들이 하루에 쓰는 단어가 몇 개 되지 않아 놀라곤 한다.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도 짜증나, 화나, 힘들어, 지루해 등등 다양한 표현이 있지만 극혐(애들말로 그켬)으로 압축된다. 저희들끼리 비난할 때는 '인성 쓰레기네' 로 요약된다.

 

# 장면 둘

카페에서 대화가 들린다. 비루한 몸뚱이가 어쩌고.

'비루하다'는 사전적으로

 (鄙陋--) [비ː루하다]

 [형용사] 행동이나 성질이 너절하고 더럽다.

 

돌아보니 출산 후 몸이 다들 좀 불었겠으나 천하고 너절하고 더러운 정도는 아니다. 온라인상에서 뜻도 모르고 재미 삼아 자주 쓰다 보니 여기저기 다 비루해졌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한때는 '비루하다'라고 온라인에 자주 쓴 적이 있다.

 

무한도전에서 자막으로 퍼뜨린 말 '육덕지다'도 소설 등에서 육덕이 크다, 육덕 좋은 식으로 쓰였다.

 

육덕 (肉德)[육떡] 

[명사] 몸에 살이 많아 덕스러운 모양.

 

예능에서 쓰는 어감과 약간은 다르지만 육덕지다까지는 내 기준으로는 봐줄 수 있다. 하지만

백종원 씨가 퍼뜨린 '고급지다'는 어딘가 불편하다.

 

 

<어휘 늘리는 법>에는 언중들의 다양한 언어 현상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다.

 

1. 현대인은 아이어른 할 것 없이 어휘가 빈곤하다.

책을 읽을 시간도 사람들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시간도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저 예능에서 쏟아내는 말초적인 자극적 표현에 길들여져 있다. 누가 더 세게 독하게 재미있게 말하나 겨루고 있다.

 

청소년의 어휘력이 부족하게 된 이유로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예전에 흔히 볼 수 있었던 물건이나 풍경, 관습이 사라지거나 어휘 자체가 바꾸니 탓도 있을 테고, 한자 교육 비중이 낮아져서 한자로 된 개념어를 익힐 기회가 적었을 수도 있다. 반면에 청소년일수록새로 생겨난 말에 대한 적응력은 무척 높은 편이다.        20쪽

 

 

책을 읽는 동안 한국사회 전체의 문해력이 높기는 하지만 중장년층의 어휘력이 빈곤하다는 통계에 많이 놀랐다. 학교를 졸업하면 책을 잘 읽지 않고 지식의 변화 주기가 빠른 사회라 장년층 이상에서 그 속도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 아이들이 어휘가 빈곤하다 타박하는 나도 새로 만들어진 말이나 기술용어 등에 취약하다.

 

2. 어휘가 중요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어휘가 지식 습득의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며 단어를 물어가며 폭발적으로 사고를 확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교직생활 이후로 글을 쓰는 필자답게 그간 문학작품에서 접한 다양한 어휘를 소개하고 있다.

 

삽상하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 마음이 아주 상쾌하다, 라는 뜻의 형용사를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밖에도 대하소설에 나오는 다양한 우리말 표현이 소개되어 있다.

 

아무래도 요즘에 학생들은 자연이나 전통문화에 대한 단어를 영단어 외우듯 수능을 위해서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김소월, 백석의 시를 읽다보면 학생들은 도무지 무슨 소리이고 왜 아름다운지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아 씁쓸하기도 하다. 많이 접해보지 않아 낯설고 어색한 탓일게다.

 

3. 자신만의 어휘를 만들어 써도 좋다.

자신만의 어휘라는 건 사전에는 없지만 내가 만들어내어 주변과 쓰면서 뜻이 잘 통하게 된 말이다.

 

우리 아이들이 말을 배울 때는 자신들이 만든 신기한 단어를 많이 쓰곤 했다. 새우깡이니 감자깡이니 하는 스낵류를 먹을 시기에 '자갈치'를 접하고서 이건 왜 '문어깡'이라고 안 하냐고 했었다.

 

메일이나 문자 메시지를 쓸 때면 저는 항상 엎드립니다. 정말 엎드리는 것은 아니고 마지막에 제 이름을 쓴 다음 '엎드림'이라고 썼어요. (중략) 앞에 소개한 김상득 씨의 경우 '엎드림'이라고 보냈더니 그걸 본떠서 '일으켜 세움' 또는 '마주 엎드림', '더 납작 엎드림' 같은 말을 사용해서 답신을 보내온 이가 여럿 있었다고 한다.           79-80쪽

 

유쾌한 장면이다.

이처럼 나만의 어휘를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연애할 때 별칭을 짓는다거나 친구들 이름을 형용사로 활용하는 경우를 떠올려보니 빙그레 미소 짓게 된다.

이름이 미정인데 지각을 자주 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참 미정미정거린다, 고도 했었는데.

 

4. 우리말의 풍부한 자산 지역말, 방언을 스스럼없이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단어를 그 지역 상황에 맞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유정의 동백꽃은 실은 강원지역에서는 노란 빛이 도는 생강나무 꽃을 뜻하며 김동인의 감자도 1920년대에는 고구마와 감자를 한데 섞어 감자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이 지역에 와서 5년을 살았는데도 사람들은 내 말투만으로 여기 분 아니죠, 라고 한다. 내가 아무리 여기 오래 산다 해도 '느자구'라든가 '귄있다'를 상황에 맞게 살려 쓸 자신은 없다. 제일 적응이 안 되었던 말이 '-하시게요'였는데 명령이 아닌 극존칭이었다.  

 

강원도 사람들은 '뼝대' 혹은 '뼝창'이라는 말을 쓴다, 표준어로 하면 절벽이나 벼랑에 해당하는 말인데, 뼝대와 절벽은 같은 말이긴 하지만 귀에 와 닿는 느낌이 다르다. 강원도가 산간 지역이라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어도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작접 가서 험한 산세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99쪽

 

아이들 어릴 때 잠시 강원도에 산 적이 있는데 북한말 억양과 낯선 어휘에 당황한 적이 간혹 있었다. 그러나 강원의 지형을 표현하기에는 그 지역 말만한 것이 따로 없을 것이다.

 

5. 번역어, 사회적 어휘 자산 늘리기 관련한 장에서는 일본 난학자들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많은 어휘를 새로 만들어 쓰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래도 일본의 어휘를 그대로 차용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는 점이 아쉽다.

 

6. 습작기 소설가들은 간혹 사전을 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자신만의 어휘를 늘리려면 여러 책 특히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서 늘리는 편이 낫다.

 

여기에 덧붙여 책을 읽기만 하는 것으로 한계가 있는듯하다. 어릴 때 책에 한참 빠져서 뭔가 남들이 안 쓰는 말 어른들이 쓰는 말, 문어체를 그대로 일상에서 쓴 적이 있다. 담임선생님이 편찮으시면 '정양을 잘 하시고' 이런 식으로 말했으니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까.

 

한정된 분야의 책을 읽기보다는 여러 계층,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휘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회화 학원에서 영어로 말할 때 무슨 뜻이냐고 묻고 답하고 했듯이 국어생활에서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

번외로

야민정음, 급식체에 대한 생각도 뭉게뭉게.

 

요즘 유행하는 야민정음, 시각적으로 표기가 비슷해 보이는 글자를 다른 글자로 바꾸는 놀이를 한글 파괴라고만 볼 것이 아니라 창의적인 언어 유희 방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귀엽다를 '커엽다'라고 하는 것이나 멍멍이를 '댕댕이'라고 하는 정도는 봐줄 수 있고,

너무 암호같은 것은 사실 꺼려진다.

 

 

어찌 되었든 간에 국립국어원, 국어 규범에만 얽매이는 언어생활이 아닌 창의적이고 풍부한 언어생활을 위해서는 자신이 자주 쓰는 말, 주변의 언어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얇지만 여러 면에서 언어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이었다.

 

어휘가 풍부한 것도 좋지만 상황에 맞게 적재적소에 정확한 단어를 쓰려면 별도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연유로 앞으로 글을 읽고 쓸 때마다 사전을 자주 찾아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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