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골의 서
로버트 실버버그 지음, 최내현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책장에 꽂혀 먼지만 쌓여가던 또 한 권의 책을 들고 커피숍을 찾았다. 책을 펼치고 ‘작가의 말’을 읽는 순간 내가 싫어했던 [다잉 인사이드]를 쓴 작가의 책임을 알게 됐다. 로버트 실버버그는 추앙받는 SF 작가일지는 몰라도 [다잉 인사이드]에서 접한 그의 장광설은 오늘날 나 같은 독자가 읽기엔 너무나 고리타분했다.


이 책 역시 ‘작가의 말’에서부터 고루함이 밀려왔다. 거기다 작품의 플롯을 다 밝히는 걸로도 부족해 본인 입으로 플롯은 별거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작가의 겸손함이라고 좋게 생각하고 읽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남자 대학생 넷이 ‘영생’의 전설을 찾아 동부에서 서부로 자동차로 여행을 떠나 별일 없이 ‘두개골 사원’에 도착해서는 종교에 동화되는 게 전부다. 총 376쪽인데, 앞에서 한 50쪽 읽은 다음 뒤에서부터 100쪽 정도만 읽어도 무방하다. 나머지는 전부 [다잉 인사이드]에서 이미 접했던 당대 미국의 반문화 정서가 담긴 잡설(듀나처럼 좋게 말하자면 사변)에 불과하다.


영생을 준다는 사원에 도착한 이후가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텐데, 작가는 의도적으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수사들과 육체노동, 명상, 체조, 섹스로 시간을 보내며 주인공들은 종교(랄까 뭐랄까)와 동화된다. 영생은 진짜인가? 이렇게 건강하게 평생 사는 게 바로 영생은 아닌가? 이렇게 살며 정신을 마개조하면 언젠가 육체적 죽음조차 초월하게 되는 건 아닐까? 아예 믿지 않는 티모시를 제외하면 주인공들조차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각에 빠져든다. 이게 퍽이나 의미 있는 철학적 질문인지 아닌지는, 상상에 맡긴다. 뉴에이지나 오리엔탈리즘에 경도했던 당대 많은 미국인(혹은 미국 평론가)에게는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는 화두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이 소설에서 그나마 인상이 깊었던 건 다른 부분이다. 사원에 도착한 후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수사들은 주인공들끼리 자신의 가장 어두운 비밀을 고백하라고 명령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하라는 거다. 네드는 삼각관계였던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괴롭히다 두 사람 모두 자살하게 방조했음을 고백한다(죄책감은 별로 느끼지 않는다). 상류층 티모시는 여동생을 강간했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보수 기독교도 올리버는 유년시절 동성과 유사 성행위를 한 적이 있다. 마지막으로, 유망한 젊은 학자 일라이의 놀라운 학문적 성취는 사실 표절의 결과물이었다.


내 가장 어두운 비밀은 뭘까. 어둠을 입 밖으로 내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어둠은 사라질까? 이 책에서는 그 고백 의식 거의 직후 ‘예정된 파국’(역설이다)이 일어나고 소설은 열린 채 끝난다. 현실에서는, 십중팔구 어둠은 죄에서 온 것일 테고, 죄란 십중팔구 피해자를 전제한다(소설에서는 올리버만이 예외다). 피해자에게 닿지 않는 고백은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만족 혹은 자기 연민일 뿐. 이런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게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 같다만.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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