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탈호러 1
로버트 블록 외 지음 / 서울창작 / 1993년 6월
평점 :
품절


어렸을 때 빌려 읽고 충격받았던, 그러나 크면서 잊고 말았던 책을, 대학에 와서 좋아하는 선배에게 다시 받게 되었다. 무슨 베헤리트도 아니고… 이렇게 야밤에 상상이 끝없이 뻗어간다. 이 책은 내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 꽂혀 있던 [네크로노미콘]이요, 희곡 {노란 옷의 왕}이다.


당시 가장 충격적인 작품은 역시 첫 수록작 {흉폭한 입}이었다. {지옥으로 가는 열차}와 {90억 가지 신의 이름}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특히 후자는 게놈 프로젝트 혹은 오늘날 딥러닝까지, 컴퓨팅 파워의 발달만으로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 가능해지는 것을 목격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바벨의 도서관은 어떤가. SETI 프로젝트는 또 어떤가. 연산력의 비약적인 상승은 뭇 인간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줄 수 있다. 물론, 지옥 문을 열어젖힌 [이벤트 호라이즌]처럼 상상 밖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더 꼽자면 {블러드차일드}도 있다. 비교적 최근에 정발판([블러드차일드], 비채, 2016)을 읽은 적이 있는데 솔직히 이게 [토탈호러]에도 수록되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다른 수록작들에 비하면 소재의 자극성이나 SF에서 으레 기대하는 상상력의 확장 같은 면에서 인상은 약한 게 사실이다. 끝으로 {신천지의 악몽}의 설정은 킹왕짱 바퀴벌레 외계인과 비장하게 싸우는 [테라포마스]를 떠올리게 한다(아, 웃기면 안 되는데 웃기다).


{흉폭한 입}으로 돌아가자. 텍스트의 ‘정교한’ 그로테스크함을 영상화해보면 [택시더미아]의 자기 몸을 박제하는 시퀀스가 머릿속에서 기어 올라온다. 자신을 먹는다는 점에서는 [인 마이 스킨]도 떠오른다(무수한 보디 호러의 목록과 함께). 그리고 이런 것보다 더 아래 층위에서 이 작품이 내게 던지는 건 이거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인간의 집념은 자신의 생존에 우선한다. 생물로서 가장 우선인 생존조차 뒷전인데 다른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집념이 대의명분이라면 오히려 좀 고루하지만, 사랑이라면 어떨까. [마인탐정 네우로] 11권에서 사별한 연인을 디지털로 재현하기 위해 전 세계 컴퓨터를 장악하려는 하루카와 교수라든가(“미화하지도 않고, 퇴색시키지도 않고, 단 1비트도 다르지 않은 널 만들겠어.”), [모렐의 발명]에서 사랑하는 여자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영구기관이자 광역 홀로그램 녹화기요 상영기, 실로 인간의 영혼까지 기록하는 기계’를 만든 모렐, 그리고 다시 그 영상 속의 여자에게 매료된 나머지 육신을 버리고 영상의 일부가 되기로 하는 화자라든가.


나는 [S.T.A.L.K.E.R.]의 소원기계도, 로버트 노직의 경험기계까지도 모조리 여기에 끌어들일 수 있다.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하는 기계가 존재한다면, 당장 뇌에 플러그를 꽂지 왜 현실을 하루 더 살아야 하는가.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런 게 존재하기만 한다면, 누가 파란 약을 삼키지 않겠는가. 왜 자신을 파괴하지 않겠는가.


S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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