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생이 있다. 여학생이다. 그는 의대에 들어온 뒤 일주일만에 휴학을 했다. 그리고 일년을 쉬었다.

“그때 왜 쉬었어요?”

“들어오고 나니까 이게 아니다 싶었어요.”


학생은 예과 2년을 그럭저럭 다녔다. 이제 본과에 들어올 차례. 어머니가 호두과자를 들고 찾아온 건 그 즈음이었다.

“선생님, 우리 미자가 일년 휴학을 한 대요. 어떻게 좀 공부하게끔 해주세요.”

학생을 만났다.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썼지만, 학생의 얼굴에선 그늘이 보였다.

“왜 휴학하려고 하나요?”

“너무 힘들어요...”

본과 1학년은 다니다 말면 다닌 데까지 유리한 법이니 버틸 수 있는 한까지 버티라고 했다.

“내년에 시작할 때 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할 일인데...”

“...알겠습니다. 해볼께요.”

하지만 학생은 오래지 않아 휴학계를 던졌다. 그 어머니께 미안했다.


일년이 지나기 전, 사건이 하나 있었다. 아버님이 전격성 간염에 걸리신 것. 방법은 간이식 뿐이었다. 미자가 전화를 했다.

“선생님, 어떻게 해요?”

난 뭐라고 확답을 주지 못했다. 간이식을 한다해도 살아날 확률은 그리 높지 않고, 또, 그리고.... 간이식을 하면 학생의 경제적 상태가..... 다시 연락을 하지 못한 채 며칠을 보냈다.

“선생님, 아버님 돌아가셨어요. 애써 주셔서 감사드려요.”

난 애써 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올해 2월 20일, 미자는 개강 첫날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일주일을 빠졌다. 내가 미자를 만난 건 이번주 월요일, 난 그에게 밥을 사주며 이 얘기, 저 얘기를 했다. 동기들은 다 본 3인 판이라 같이 밥먹을 사람도 없는 판이었다.

“제가 친구 해줄께요.”

“어, 정말요?”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가끔 밥을 먹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친구라면 해줘야 할 다른 것들은 내게 불가능했다. 그 다음날, 내방으로 불러 라면에 집에서 싸온 김밥을 먹였다.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를 하는 그녀, 미자가 제발 무사히 학교를 졸업할 수 있기를 마음 속으로 빌었다.


두 번 밥을 같이 먹고 나니 은근히 걱정이 된다.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곳인지라 내가 미자와 사귄다는 소문이 나돌면 어쩌나 싶다. 엊그제 벤치에 앉아 이야기하는 걸 많이들 봤을 텐데. 자기 관리가 먼저일까 아니면 그 학생에 대한 배려가 우선이 되어야 할까 솔직히 헷갈린다. 조교 생활을 포함해 13년간 교직에 몸담아 왔지만, 아직까지 학생과 스캔들이 있었던 적은 한번도 없는데. 아예 그럴 건수를 제공하지 않았었는데. 일단 일주에 두 번 정도 밥을 같이 먹자고 했다. 될대로 되라지 뭐.


얼마 전 조교선생한테 생일선물로 원두커피 기계를 받은 적이 있다. 쳐박아 놓다가 김밥 먹던 날 기계를 뜯어보며 “원두커피 사야겠구나” 했더니 오늘 미자가 “어머니가 사줬어요”라며 커피봉지를 가져온다. 이러면 안된다고 하면서 한봉지만 받고 각설탕과 커피 한봉지는 돌려드렸다.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끄응. 세상은 언제나 선한 마음으로만 굴러가는 게 아니다. 그리고 악은 도처에서 끼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역시 이말을 해야겠다. 될대로 되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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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02-28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교수님같아요. 그렇게 세세하게 학생들의 마음을 살피는 교수님 많지 않을 것같아요

2007-02-28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을산 2007-02-28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 여교수님이 관심 가져 주면 좋을텐데요. role model도 되고.....

hnine 2007-02-28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관리라 말씀하신 것과 그 학생에 대한 배려, 두 문제가 꼭 다르지 않아보여요.

비연 2007-02-28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선생님이시네요^^

프레이야 2007-02-28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부리님 반가워요^^ 마태님의 등장으로 같이 오셨네요^^

2007-02-28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룩말 2007-03-01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학생..부럽네요^^

부리 2007-03-02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룩말님/부끄러워요...
속삭이신 분/카툰의 훌륭함보다...님의 미모에 할말을 잃습니다...
배혜경님/우린 원래 바늘과 실 아니겠습니까^^
비연님/부끄러워요...
hnine님/그, 그런가요? 그러니까 이 문제도 제가 잘 해결할 거란 말씀???
기을산님/그런 걸 기대하기엔 환경이 좀 척박하옵니다..
속삭님/제마음 아시죠?^^
하늘바람님/다 살피는 거야 힘들지만, 제게 도움을 요청했으면 할 수 있는 한 해야죠....
 
타이탄의 미녀
커트 보네거트 지음, 이강훈 옮김 / 금문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토탈 리콜>이란 영화에서 화성에 간 아놀드 슈와제네거는 아주 어렵게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넣는다. 화면에 나온 사람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

“안녕? 일이 잘 못되었으면 지금 자네는 머리에 수건을 감고 이 테이프를 보고 있을 거야.”


<타이탄의 미녀>에서 주인공은 화성으로 보내진 뒤 기억이 지워지고,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남긴 메시지를 나중에 자기가 발견한다. 여기까지는 <토탈 리콜>과 비슷한 것 같지만, 그 이후의 스토리는 판이하게 다르다. 아놀드가 공기를 무기로 화성인을 지배하려는 독재자와 분연히 맞서 싸우는 반면, 이 책의 주인공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주인공이 적을 깨부수고 평화를 가져온다는 귀에 익은 결말을 이 책에서 기대해선 안된다. 나름의 재미가 있고, 저자가 기독교를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지만, 문학적 내공이 낮은 나로서는 저자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책 뒤의 20자평을 보니 저자인 보네거트가 “인생의 의미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을 제기할 뿐 아니라 그 의문에 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답은 내게 보이지 않았다. 인생에 과연 정답이 있는지, 그리고 저자가 제시한 정답이 맞는지는 차치하고라도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책을 읽은 보람이 있을텐데, 내 문학적 내공을 탓할 수밖에.


내가 좋아하는 어느 분에게서 선물받은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난 언제쯤 ‘타이탄의 미녀’가 나오는지가 궁금했다. 친구끼리 얘기할 때도 미모 얘기만 나오면 눈이 번쩍 떠지는 내게 있어서 미녀 주인공의 불행은 곧 나의 불행이고, 미녀의 해피엔딩은 곧 나의 행복이니까. 다시 말해서 미녀가 나와야 책에 더더욱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미녀는 끝까지 나오지 않았고, 주인공이 어둠 속에서 절세의 미녀인 줄 알고 범했던 여자는 결코 미녀가 아니었다. 미녀를 등장시키지도 않으면서 제목을 ‘타이탄의 미녀’라고 짓다니, 이건 곤란하다. 나처럼 ‘미녀’란 단어만 들어가면 혹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목을 그리 붙인 건 아닌지? 미녀마케팅에 속지 맙시다!


* 잠시 다른 얘기를 해보겠다. 리서치 앤드 리서치(Lesearch & Lesearch)의 조사에 의하면

-이주의 마이리뷰 중 특정인이 알라딘 가입 후 첫 번째로 쓴 리뷰의 비율: 0.1%

-두번째부터 다섯 번째: 5.7%

-6~10번째: 12.5%

-11~15번째: 24.1%

-16~20번째: 10.3%

-21~30번째: 2.1%.......

리서치 앤드 리서치사는 이 통계수치를 근거로 “서재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사람에게 격려 차원에서 이주의 리뷰에 뽑아주는 경우가 많다.”고 결론내렸는데, 이 리뷰는 내가 서재를 만들고 쓰는 열한번째 리뷰다. 이주의 리뷰가 발표되는 다음주 월요일 오후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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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5-11-05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마나 부리님이 열한번째 리뷰바께 안된다니 놀라운걸요?

물만두 2005-11-05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리서치땜에 부정타겠어요~ 에궁 저도 읽어야하는데 ㅠ.ㅠ

파란여우 2005-11-0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갠신히 3번 탔어요.뭐..
에효, 저는 담주 월요일에 5천원이나 탈 수 있을래나 몰러유..
그나저나 미녀 얘기 없이ㅡ제목만 그랬다니, 나쁜 책에요 후후^^

Joule 2005-11-05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미녀가 나오는 영화를 좋아해요. 미녀가 나오는 영화라면 3류라고 해도 눈 동그랗게 뜨고 볼 수 있는데 못생기고 용감하기만한 여배우가 나오면 그다지 별 감흥이. 그래서 못생기고 연기만 잘하는 수잔 서랜든이 전 싫어요.

수퍼겜보이 2005-11-05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잔 서랜든이 못생겼다뇨!!!!!!!

부리 2005-11-07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퍼겜보이님/제가 그런 거 아니어요...
쥴님/오오 미녀로 소문난 님도 그렇듯 미녀에 탐닉하는군요. 저같은 범인이야 더하죠^^
여우님/뭐든지 명실상부해야 합니다. 미녀가 안나오는 미녀 책이란...
만두님/안녕하십니까. 저희 리서치사를 앞으로도 자주 이용해 주십시오
싸이런스님/그러게 말입니다. 책은 제가 읽는데 리뷰만 마태가 쓴다는 설이 있어요
 
하루가 소중했던 사람들
김혜원 지음 / 도솔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어머니가 있었다. 어느날 며느리가 보낸 김밥을 먹으려던 시어머니는 왠지 이상하다는 느낌에 젓가락으로 김밥을 찔러봤다. 젓가락은 새까맣게 변했다. 그제서야 시어머니는 깨달았다. 자기 아들도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어머니는 경찰에 재조사를 의뢰했고, 교통사고를 낸 운전사와 그를 면회온 며느리와의 녹취록에는 돈 4천만원을 왜 입금하지 않았냐고 다그치는 운전사의 증언이 담겨 있었다.


돈을 빼앗기 위해 금은방을 하는 부부를 죽이고, 운전기사까지 죽인 후 마당에 묻고도 몇 달을 아무런 가책 없이 산 사람이 있었다. 도박빚을 갚기 위해 제자를 유괴한 뒤 그를 살해한 학교 선생도 있었다.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17명을 죽인 희대의 살인마도 있었다. 난 이들이 나와는 다른 종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호랑이가 사슴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은 평생 교화되지 않은 채 야수의 본성을 지니고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쓴 김혜원님은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끊임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30년을 바쳤다.


그 결과는 자못 놀라웠다. 17명을 죽인 김대두는 죽기 전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재소자들에게 전도했으며, 금은방 사건의 범인 박철웅, 남편과 시어머니를 죽인 여자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남은 생애를 보냈다. 그들이 쓴 참회의 편지들을 보면서 난 내가 그간 잘못 생각했음을, 그들에게 잘못된 편견을 가졌음을 깨닫게 된다. 죽는 순간까지 억울하다고 외치며 죽어간 사형수의 얘기에서 오류에 가득찬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탁월한 문장력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오랜 세월 사형수를 돌본 경험이 어우러진 이 책을 읽다보니 사형수들도 한 인간이며, 사형제도의 존속이 꼭 필요하냐고 주장하는 저자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의 시각이 빛나는 대목. 저자는 여성 사형수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이 안에 들어온 여자들, 하나같이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이어요. 똑똑하고 잘났어요. 그 잘남을 못봐주고, 여자라고 자꾸 누르고 구박하니까 모로 터질 수밖예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한다 해도, 저자의 다음 말에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여성들이 저지르는 흉포한 범죄의 배경에는 남성의 습관적 폭력이나 성폭행 같은 권위적인 횡포가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데도 그들은 가족과 자식들에게마저 외면을 당한 채 쓸쓸한 죽음을 맞거나 고독한 수형 생활을 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아내를 죽인 남편의 경우 온 집안의 버림을 받는 예가 아주 드물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일자리가 없어진 미래의 대안으로 자원봉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재소자들의 친구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그들에게 감춰줬던 인간의 마음을 되찾게 해주는 일은 자원봉사 중에서도 가장 보람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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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07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5-07-07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제가 아무리 잘 썼다고 해도 그런 칭찬은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쑥스럽습니다...'리뷰의 지평을 새로 열었다'는 표현도 그렇구, '리뷰에 있어서 신의 경지에 접어든 게 아닌가 싶다'는 말도 받아들이기가 거시기하네요... 그리고...맨 마지막에 하신 "사랑한다"는 구절을 읽고보니 그 앞의 칭찬들이 이 말을 하기 위한 에피타이저가 아니었나 의심이 갑니다.... 하여튼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비로그인 2005-07-0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그며느리는 왜 김밥에다 먹물을 넣었죠?
아니다 정력에 좋으라고 오징어 먹물 넣은거 아닌가요?

비로그인 2005-07-0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또 근데 그 숨긴 댓글 한줄짜리죠?

마태우스 2005-07-0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날리님/이번엔 절대 한줄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엿섯줄이나....

싸이런스 2005-07-07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냐...이런...일도.....광팬으로서 몸을 사려야겠다는 생각이 점점.....스타와 사랑은 꿈속에서나 아름답다..

클리오 2005-07-07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음, 이 책이 그책이죠?? 그 페이퍼와 약간 톤이 달라지신 것 같은데요?

2005-07-08 0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7-08 1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7-09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부리 2005-07-1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분/어머 날조라뇨! 안되겠어요. 한번 맞짱 떠요!
클리오님/헤헤헤... 님 서재에 댓글로 달겠습니다
싸이런스님/무슨 말씀인지 난해하옵니다. 하여간 전 님 편입니다
따우님/지나친 의심은 긴 머리에 해롭습니다^^

로드무비 2005-09-20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 박철웅에 관한 책을 오래 전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죽기 전의 참회가 비겁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는데......
 
만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1997년 10월
평점 :
품절


 

다자이 오삼의 <만년>을 읽었다. 일본 문학 특유의 몽환적이고 신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작품이었지만, 내가 이해력이 부족한 탓인지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이 책은 여러 편의 단편이 묶인 소설집이다. 그런데 난 네 번째 단편을 읽을 때야 비로소 이 책이 단편집이라는 걸 알았다. 첫 단편 <잎>의 ‘나’와 다음 작품인 <추억>의 ‘나’가 동일인인 걸로 착각한 탓인데, 그러고 나니까 전혀 다른 배경이 나와도 “주인공이 상상하는 거겠지”라고 생각하게 된 것. 일단 쑥스럽고, 내 이해력이 민망하다. <미션 임파서블 1>을 이해하지 못한 이해력이니,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읽고 난 느낌을 정리해 본다.


-작가 중에는 자신의 죽음을 소설 속에 암시하는, 아니 자기가 소설에 쓴대로 죽는 작가가 있다. 갑자기 생각하려니 떠오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레이몬드 카바는 <숏컷>에서 권총자살을 하는 사람을 등장시킨 뒤 자신도 총으로 죽었고, 이 책의 저자도 동반자살을 기도하나 여자만 죽는 소설을 쓴 뒤 정말로 동반자살했다. 어느 게 먼저일까. 자신이 느끼는 충동을 소설로 쓰는 것일까, 아니면 소설에 쓰인대로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걸까.


-표제작인 <만년>은 샐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이 책이 훨씬 먼저 나왔으니 샐린저에게 ‘표절’의 의심을 품어야겠지만, 표절 시비가 붙는 건 언제나 무명 작가다. <낭만파 남편의 편지>를 쓴 안정효가 조금만 늦게 그 소설을 썼다면 영락없이 쿤데라를 표절했다고 오해될 뻔한 것처럼.


-전에 이 책의 번역이 엉망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그와 관계없이 이해 안가는 구절을 하나만 열거한다.

[이때의 웃음소리는 그들조차 미처 생각지 못할 정도의 대사건을 낳았다]

병원 입원실에서 사람들이 떠들고 웃고 그런 것이 어떤 사건을 낳았을까?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겼는데 글쎄...담당 간호사가 간호부장에게 끌려가서 혼나고, “뭐 그런 거 가지고 야단을 치냐”고 환자와 보호자들이 불평한 게 전부다. 대사건이라면 적어도 격분한 환자가 불도저로 병원을 밀어버린다던지 그런 거여야지 않을까? 아니면 오사무가 활동하던 30년대는 간호부장에게 혼난 게 ‘대사건’이었을까.


첫 만남은 참으로 중요한 법이다. 오사무는 이 작품 말고도 몇 개를 더 남겼지만, 별로 읽고픈 생각은 안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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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6-03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분, 큰일났습니다. 부리가 드디어 일을 내려나 봅니다. 글쎄 주간 서재순위 21위까지 치고 올라왔습니다. 리뷰까지 쓰는 걸로 보아 확연한 의지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리뷰에 절대 추천해 주지 맙시다!

비로그인 2005-06-03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태님보다는 부리님이 좋아요. 그렇지만 추천 절대로 안했음!

sweetmagic 2005-06-03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이 다 하실 거면서 ~

stella.K 2005-06-03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리님은 순위에 들지 못하게 하랬더니...할 수 없군요. 이벤트 하시는 수 밖에. 마태님이 부리님 좀 잘 설득하세요.^^

줄리 2005-06-0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좀 치사한거 같다. 그래서 추천해야지~

날개 2005-06-03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추천을 유도하는군요..흐흐~ 난 너무 잘 넘어가는것 같애...

부리 2005-06-03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날개님/오늘이 금요일이거든요. 대세가 결정되는 날인데 추천 하심 안되는데....
줄리님/아참 나 부리지! 맞아요 마태는 정말 치사해요. 왜 자기만 맨날 30위 안에 들어야 하고 전 안되나요? 자기가 빠지면 안되나? 피.
스텔라님/흑흑 님의 댓글을 보니 제가 이래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잘못했어요 흑. 이벤트라...
매직님/아닙니다. 마태는 제 글 잘 추천 안해줍니다!! 매직님이 추천했죠 사실은? 다 아라요
별사탕님/제 편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알라딘의 쿠테타!! 그날이 얼마 안남았습니다

인터라겐 2005-06-03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무조건 추천을 눌러야 하는 사명감으로 똘똘 뭉쳐있다구요..,..지금~~
 
너, 싸이코지?
싸이코 짱가 지음 / 자유로운상상 / 200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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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에 있는 마트에 갔다. 책 한권을 읽은 뿌듯함을 만끽하기 위해. 역시나, 책을 안읽은 사람들의 어깨는 처져 있었고, 얼굴에는 생기라곤 없었다. 나는 평소 안피우던 담배를 꺼내물었다. 달았다.


‘팝콘심리학’(이하 팝콘)>에 엄청난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보다 두달 전에 나온 장근영의 첫 번째 책, <너, 싸이코지?>를 읽게 되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 책은 두 번째 책보다 못했다. 두 번째 책이 워낙 뛰어난 탓도 있지만, 테마 자체가 인간 심리에 국한된, 약간은 더 학술적인 책인지라 아무리 쉽게 설명을 해놔도 지루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건 뭐, 내가 정신과에서 어느 정도 이 책에 나오는 장애들을 배웠던 탓도 있을 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팝콘에서 읽었던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데, 특히 44쪽의 easy child 얘기는 팝콘에도 나왔을 뿐 아니라 불과 열페이지 뒤에 다시금 상세히 설명을 해놨다. 사람들은 중복에 민감해 아무리 재미있는 거라도 두 번째 읽으면 식상하기 마련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책을 쓸 때 한번에 왕창 써내려가기보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 쓴 걸 모아서 책을 냈기 때문이다. 편집의 중요성이 느껴지는 대목. 그렇기는 해도 저자의 뛰어난 글솜씨는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며, 저자가 그린 멋진 카툰들이 도처에 산재해 책장을 술술 넘기게 만든다.


팝콘이 어디 가서 유식을 자랑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라면, 이 책은 실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예컨대 다음 대목, “...갈등을 빚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나야 하는 경우... 그런 서먹한 상황에서 상대방과 친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안그래도 한바탕 한 친구를 오늘 만나는데, 이 방법을 써봐야겠다. 그런데, 뭘 도와달라고 하지? 등을 긁어 달라고 할까?

“어떤 사람이 당신과의 만남에 자꾸 늦는다거나 빠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만나고 있는 상황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진우맘님이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을 안비치는 건, 우리가 싫어졌기 때문일까.


저자는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지 말라면서, 감옥과 회사의 비유를 든다. 몇 개만 옮긴다.

-감옥에서는 4평짜리 방에서 지내고, 회사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한평짜리 책상에서 지낸다.

-감옥에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면회올 수 있지만, 회사에서는 전화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감옥에는 가끔 변태적인(가학성이 있는) 교도관들이 있다. 회사에서 우리는 그들을 ‘상사’라고 부른다.


마지막 ‘상사’ 얘기에서 소리내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 중에는 글을 잘쓰는 사람이 유난히 많다. 이제 겨우 두권의 책을 냈지만, 장차 그가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스타 심리학자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점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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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5-03-16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트까지 써 먹으시네요. 강의를 몸소 실천 중? 흐흐

로드무비 2005-03-1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안 푸세요? 뻔뻔한 로드무비.^^
(지송해서 추천 누르고 가유.)

클리오 2005-03-16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강의를 몸소 실천하시는 노력을 보니, 눈물겹습니다.. ㅎㅎ

부리 2005-03-17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리오님/부끄럽습니다^^
쥴님/어맛, 들켰다! 리뷰를 읽고나니 괜히 저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로드무비님/죄송합니다. 풀어야 하는데 요즘 제가 어려워져서요...
깍두기님/제가 아니면 누가 실천하겠습니까. 솔선수범해야죠

하루(春) 2005-03-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와서 흔적 남겨요.

플레져 2005-03-2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트에 가다... ㅎㅎㅎ 이제서야 보았네요.
책 읽고 나서 갈 만한 다른 장소를 물색중입니다, 요새.

진/우맘 2005-05-26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이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을 안비치는 건, 우리가 싫어졌기 때문일까.

설마!!!!! ^^

인터라겐 2005-06-03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팝콘...그책 재밌었지요...전 그책을 읽음으로서제가 얼마나 행복한지 느꼈잖아요..
쓸데없는데 신경안쓰고 사는게 얼마나 큰 행복일런지...ㅎㅎ 그런의미에서 추천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