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 연구로 권위자인 외국인 교수 부부가 우리 학교에 왔다.
우리나라에서 미라를 연구하는 몇 안되는 사람인 탓에 내가 그분을 오후 4시 반부터 접대하기로 했는데,
3시가 조금 넘어 서울서 그들을 태우고 오기로 한 해부학 선생한테 전화가 왔다.
"큰일났습니다. 차가 너무 안밀려 지금 와버렸습니다."
그래서 난 3시 10분부터 무려 7시간 동안 그들과 행동을 같이하면서
숙소에 갈 때까지 말상대를 해야 했다.
강연을 할 때, 그리고 저녁을 먹을 땐 다른 선생들이 있었지만
그 외의 시간엔 나, 영어 선생인 미녀분, 해부학 선생 이렇게 셋이서
그들을 상대했는데, 각각에겐 이런 단점이 있었다.
미녀: 영어에 두루 능통하고 영국에서 산 적도 있어 얘기가 통하지만,
미라 연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해부학 선생: 연수도 안갔다 왔는데 영어를 꽤 잘했다. 하.지.만. 말주변이 없어서
유려하게 대화를 이끌어가진 못했다. 그가 교수 부부를 서울서 천안까지
모시고 오는 동안, 분위기는 아주 썰렁했단다. 거의 말 없이 왔다나?
나: 소개팅 때 8시간 동안 쉬지 않고 떠든 경험이 있듯이 잠시의 침묵도 허용하지 않는
화술의 소유자. 하지만 영어를 잘 못하고, 발음이 특히 안좋아 사람들이 잘 못알아듣는다.
이런 상황이라면 미녀분이 대화를 주도할 것 같지만, 그건 아니었다. 우리말로 유머 수준이 경지에 오른 사람은 영어를 잘 못해도 외국인을 웃길 수가 있으니까.
미녀분이 도와주긴 했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그네들을 웃긴 건 역시 나였다.
조교 시절 독일인 미녀가 왔을 때, 사람들은 내가 영어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녀를 그렇게 웃길 수 있는지 신통해했다.
그 시절 난 그녀가 좋아하던 '호떡'과 '생큐' 이 두단어를 가지고 그녀를 웃겼었는데
어제 역시 내가 구사한 영어는 중2 수준의 단어들, 예를 들면 이렇다.
나: (부인을 보며) 홧스 더 시크릿 인 매리지 석세스 포 포티 이어스? (40년 동안 결혼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끈 비결은 무엇인지요?)
후진 발음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이 내 뜻을 이해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사람들은 영어, 영어를 외치며, 외국인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잘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좀 영어에 신경썼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 게 한두번이 아니니까.
하지만 난 좀 다르게 생각하고 싶다.
영어는 하나의 수단일 뿐, 소통의 본질은 아니라고. 영어를 잘하면 뭐하나. 할말이 없는데.
미팅과 똑같이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하는 말이라곤 가족관계, 일, 사는 곳, 음식 이게 다지 않는가?
그래서 난, 우리말로라도 다른 사람들과 공통의 관심사를 찾아가며 능수능란하게 대화할 수 있다면 외국인과의 소통도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련다.
한가지 더. 이왕이면 그 나라에 대한 지식이 있다면 이야기하기가 좀 더 편하다.
호주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에 살고, 런던 UCL(런던의과대학? 유명한 대학이란다)에 근무하는 그들에게 난 호주의 테니스 스타 로드 레이버와 패트 캐시에 대해 이야기했고-
남자가 테니스를 아주 잘친단다-이스라엘에 있는 '통곡의 벽'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는 신이 나서 거기에 대해 얘기했다 (팔레스타인 얘기를 하고싶어 입이 간지러웠다..^^).
중요한 건 영어가 아니라 소통의 기술을 익히는 거다.
소개팅은, 그걸 익힐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