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일은 그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갖게 하는듯 해 매우 조심스럽다. 일례로 내가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런 불륜소설 왜 좋아해?' 라고 되묻기도 하고, 거기에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좋아한다고 하면 '너 불륜에 대한 로망이 있냐' 부터 '너 불륜 좋아하더라' 라는 말까지 듣게 된다. 거기에 대고 내가 '아니, 그게 불륜이라서 좋아하는 게 아니고.. '라는 말을 시작할라치면, '그거 불륜 얘기잖아?' 가 되돌아오고, 불륜 얘기 이기는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을 받아버리는 것이다.


그런 참에 내가 이 영화 《5 to 7》을 좋아한다고 하면 거기에 쐐기를 박는거겠구나 싶었다. 이 영화에서도 여자는 서른 네살의 아이가 둘인 유부녀이고 남자는 스물다섯의 싱글이니까. 한줄로 요약해보라고 하면 '유부녀와 싱글남자가 만나 사랑하는 얘기' 일텐데, 그러면 어김없이 나는 불륜 좋아하는 여자가 되어버려... 후아- 심호흡 한 번 하자. 그렇게 생각하려면 뭐, 그러라지. 내가 뭐 별 수 있나.



이 영화에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요소들이 등장한다. 아니, 내 몇 년간의 페이퍼를 읽고 쓴건가 싶을만큼 진짜 모든게 다 등장해. 처음부터 좋은데 끝에 가서는 대환장.. 뭐야, 나 하나를 내포관객으로 삼고 만든 영화야? 묻고 싶을만큼 너무너무 좋다. 이쯤에서 노파심에 말하자면, 그러나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할거라고는 딱히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시 말하지만,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는 게 다 나왔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들도 다 좋아하는 건 아니잖나. 이를테면 뉴욕, 센트럴 파크, 센트럴 파크의 벤치, 구겐하임 미술관... 크- 이만큼만해도 나는 이미 너무 좋았다니까?




남자 '브라이언'은 작가다. 작가라고 말하지만 사실 글을 써서 여기저기 투고를 해도 거절의 답장만 받을 뿐이다. 글을 쓰고 투고를 하고 거절의 답장을 읽고. 그러면서 가끔 산책을 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다. 아직 그의 이름으로 나온 책도 없을 뿐더러 앞으로도 나올지 어떨지 모른다. 그러니 그가 지금까지 이뤄놓은 성과라고 해야 별 거 없다. 아니 아예 전무한 실정. 그런 그가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한 호텔 앞에서 여자 '아리엘'을 만나게 된다.


브라이언은 아리엘에게 첫 눈에 반해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아리엘에게 다가간다. 한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그들은 잠깐 말을 섞었고, 아리엘은 브라이언에게 매일 금요일 이시간에 여기에 있다고 얘기해줘서 그 다음 만남을 기약하게 된다. 그 다음만남에서 브라이언은 이토록 그가 반한 여자가 아이가 둘이며 남편도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리엘은 자기가 평일 5시부터 7시(혼외 정사의 시간!)에 만날 수 있음을 얘기하지만, 브라이언은 그녀가 유부녀라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만남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 그렇게 일주가 가고, 이주가 가고, 삼주가 간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이 상황 때문에 자신을 아무리 막으려고 해봤자 안되었다. 결국 브라이언은 아리엘과의 관계를 시작한다. 아리엘은 프랑스 여자고 프랑스에서 살았다. 브라이언과는 달리 그녀는 남편이 있으면서 이런 관계를 시작하는 것에 대해 큰 부담감을 갖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이면 그 뿐이라면서, 자신의 남편 역시 애인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아주 많이 슬펐다. 많이, 아주 많이. 왜냐하면 아리엘이 자신의 남편에게도 애인이 있다는 걸 밝힌 것은, 그러니 자신이 하는 일도 그렇게 불편한 건 아니라는 것을 뜻하려 한거겠지만, 그러나 나는 브라이언이 되었으므로, 슬퍼지는 거다. 복수, 라는 생각 때문에. 브라이언은 아리엘에게 묻지 않았지만, 나는 브라이언이 되어서 아리엘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 남편도 다른 여자를 만나니까 당신도 홧김에 나를 만나는 건가요?"



나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가 상대에게 반한 것과는 상관없이, 상대 역시 나를 온전히 나로 보아주어야 한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정당성이며 정의 혹은 윤리 혹은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을 선택하고 당신이 나를 선택해서 우리의 관계가 맺어지고 시작할 때는, 우리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온전한 당신 그 자체' 여야만 하는 것이지, 거기에 '복수' 라든가 '심심풀이'라든가 '쾌락'이라든가 '연민' 이라든가 하는 다른 것들이 끼어들지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나여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어차피 바람피워 복수할거였는데 상대가 나인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물론 나라고 해서 매번 그렇게 온전히 상대만을 원하는 연애를 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그렇지 않은 연애에 더 많이 몸을 던졌던 것 같다. 어떤 이는 때로 나를 심심풀이 땅콩이라고 여기는 듯했고, 어떤 이는 내가 그렇게 여겨 만나기도 했다. 상대가 내게 다른 의도로 접근한 적도 있고 나 역시 상대를 다른 의도로 받아들인 적도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보여주는 브라이언과 아리엘처럼, 상대가 '애인이 다른 남자가 있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나는 이미 상대에게 푹 빠진 상황이었으므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신 애인이 바람을 피우기 때문에 당신도 피워야해서 나를 만나는거야?"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그것은 매우 중요했다. 나는 당시에 뭐하나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라고 인생에 있어서 자존감이 바닥을 칠때였지만, 그렇다해도, 내가 아무리 자존감이 바닥을쳐도, 어떤 복수의 수단 같은 것으로 이용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너무 반해버려서 그가 하자는대로 하고 싶었고 그가 이끄는대로 가고 싶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면 뭘 어째야할까 싶었고, 너무 좋아서 그냥 눈물이 줄줄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만약 그가 나를 복수의 수단으로 만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나는 기꺼이 돌아섰을 것이다. 아니, 나는 그런 상황에 나를 놓아둘 수 없어, 하고. 그렇게나 반한 상대로부터 돌아섰다는 것에 대해서 몇날을 후회하고 통곡하며 울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수단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상대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만약 내가 상대를 딱히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면, 그가 나를 만나는 의도가 무엇이었든 크게 상관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딱히 온전히 상대를 보고 만나는 게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러나 내가 상대에게 세컨드가 되어도 괜찮은 것은, 내가 상대를 세컨드로 볼 때여야만 한다. 나에게 상대가 우선순위인데 나는 상대에게 세컨드가 된다? 나는 그런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비참해질지언정, 그를 포기할지언정, 나는 그에게 물어야 했던 거다. 혹여 나는 너에게 어떤 수단인거냐고.



그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그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의 만남이 더 이어진거고. 그러나, 그건 말할 수 있다. 그가 만약 자신의 애인과 서로에게 충실한 관계였다면, 그와 내가 만나는 일 자체가 이뤄졌을까?




브라이언은 아리엘에게 나처럼 묻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그 나름의 두려움을 가진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는 그래도 상관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어쨌든 다시 여기에 와 그녀 앞에 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를 감당하고 나온 것일테니까.



그들은 그렇게 대화를 하고 섹스를 하고 연애를 한다. 산책을 하고 같이 술을 마신다. 아리엘은 공개적인 곳에서 키스할 순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남편이 알게 되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자신은 이미 공식적으로 다른 사람의 아내인데, 비공식적으로 그 역할을 저버리는 걸 들켜서는 안되는, 여기는 미국이니까. 게다가 그녀의 남편은 아주 잘나가는 외교관이다. 사회적 지위도 있고 교양도 있다. 그는 브라이언을 만나서도 아주 다정하고 예의바르게 잘 대해준다. 마치 자신의 식구인것처럼 또다른 일원으로 여겨준다. 브라이언에게는 그간 알지 못했던 세계가 하나 더 열린 셈이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부모에게도 아리엘을 소개시키지만, 브라이언의 아버지는 이 관계가 영 못마땅하다. 왜 아니겠는가. 게다가 브라이언에게 새로운 미래가 다가오려고 한다. 그가 투고한 원고가 뽑혔고 이에 잡지에도 실리며 상금도 받게 된것. 시상식에 그는 가장 사랑하는, 너무 사랑하는 아리엘을 초대하고 싶지만 아리엘은 다섯시부터 일곱시까지만 시간을 낼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거다. 내가 나 스스로를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순간,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축하를 받고 싶은 순간, 그 순간에 함께할 수 없다는 것.




브라이언에게는 이제 작가의 길이 열린 듯하다. 아리엘은 그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렸음을 축하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관계는 지속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브라이언에게는 욕심이 생긴다. 작가라는 새로운 미래와 더불어, 아리엘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옆에 서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 사랑이 깊어지면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그러니 브라이언은 이들 사이의 룰을 깨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나의 아내가 되어달라고, 그리고 나는 네 아이들의 좋은 부모가 되어주겠다고. 그렇게 그들 사이의 룰을 어긴다.



이건 브라이언이 던진 승부수였다. 브라이언 역시, 자신이 누군가의 세컨드가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세상에는 자신의 첫번째로부터 자신이 세컨드로 취급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상대에게 기대하는 건 내가 상대를 대우하는 만큼 상대가 나를 대우하길 바라는 게 아닌가.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러니 브라이언은 승부수를 던져야했다. 지금의 이 자리로는 난 만족하지 못해, 네 옆에 당당하게 서고 싶어.



아리엘 역시 그의 청혼 앞에 이제 기로에 놓였다. 지금은 동시에 남편이있는 가정과 애인이라는 두 가지를 가져가고 있었지만, 이 반지앞에 예스 혹은 노 를 말함으로써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자, 나는 이제 선택해야 한다. 남편과 아이들이냐 혹은 애인이냐. 이 선택은 그녀에게 매우매우 어려웠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사실 사랑을 믿지 않으며 살아온 아리엘이었고, 남편은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생활은 만족스러웠고 아이들을 너무 사랑한다. 그녀도, 갑자기 그녀의 인생 이때쯤에 첫 눈에 반하고 사랑하게 될 남자가, 그러니까 한 번도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남자가 나타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러니 남편에게 룰을 어기고 나는 이제 애인을 선택할게, 라고 말하고도 싶다. 그러나 같이 산 세월이 있는 만큼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도 지켜야할 게 있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깊은 고민을 하고 다음날 그에게 반지를 돌려준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다시는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말한다.




브라이언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한다. 다시는 그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항상 그녀가 서있는 그 호텔 앞을 지나가야 할 일이 생기면 몇 블럭 돌아갔다. 그리고 글을 쓴다. 그는 책을 내는 작가가 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자신이 돌려받은 반지를 호텔의 벨보이를 통해 아리엘에게 다시 전달한 터다. 이 반지는 그녀에게 잘 도착했을까?


시간은 흘렀고 그 사이사이 그는 아리엘을 그리워한다. 길을 걷다가 닮은 사람을 보면 가슴이 뛴다. 그러나 닮은 사람이었지, 아리엘은 아니었다.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자,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나는 그들이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들이 하는 사랑이 다른 사랑보다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우리 모두의 사랑이 마찬가지다. 남들이 보기에 나라고 뭐 특별한 사랑을 했을까? 사랑은, 바깥에서 보면 다 그저 그런 똑같은 사랑일 뿐이다. 똑같은 연애일 뿐이다. 그러나 그 비극은 면면을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이유로 다르듯이, 그 평범한 사랑도 당사자에게는 매우 크고, 특별하고, 소중해진다. 브라이언에게는 아리엘이, 아리엘에게는 브라이언이 그랬다. 그들은 헤어졌고, 다시 만나지 않았고, 각자의 삶을 충실하게 살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가진 가장 큰, 너무나 큰 사랑이었고 추억이었고 힘이었다.



시간이 흘러 브라이언의 책은 서점에 베스트셀러로 진열된다. 그는 어엿한 작가의 삶을 산다. 시간이 흘러 서점 앞을 지나다가 진열된 브라이언의 책을, 아리엘은 본다. 자신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연인이 내어놓은 책. 그리고 그 제목에 담긴 그들의 오래전 대화. 그녀가 그 서점 앞에서 그 책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떤 마음이었을까.


시간은 계속 흐르고 브라이언은 결혼을 해 아이도 낳았다. 그는 날씨 좋은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아이가 탄 유모차를 끌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는다. 오, 구겐하임! 나 알아, 나 알아, 나 거기 알아!!

그리고 구겐하임 앞에서 갑자기,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아리엘의 가족과 맞닥뜨린다. 오래전에 보았던 아리엘의 아이들은 성장해 있었다. 당연하다. 그들 가족은 서로 마주서서 각자 인사와 안부를 건넨다. 그 사이, 아리엘은 자신이 끼고 있던 장갑을 잠시 벗는다. 아리엘의 손에는 브라이언이 오래전에 돌려준 반지가 껴있다. 브라이언은 그 반지를 본다. 그 반지를 브라이언이 봤다는 것을 안 아리엘은 다시 장갑을 낀다. 그리고 그 가족은 헤어진다. 각자의 가족과 함께.




그 후에 이어지는 브라이언의 독백.




"당신이 나의 어떤 책을 좋아하든

그건 모두

한 독자를 위해

쓰여진 것이다."




나는 내려야할 지하철역에서 내렸고, 이 마지막 장면을 보기 위해 역앞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울었다.


왜 어떤 사랑은 때가 아닌 때에 내리는지, 좋은 비는 때롤 알고 내린다며, 그렇다면 좋은 비가 아닌 건가. 왜 그 때에 그들은 만난걸까. 그 때 거기에서 그런 식으로. 왜 그들에게는 그런 만남이어야 했을까.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가슴에 품은 채로 산다는 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각자가 놓인 환경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지만 그러나 마음 속 성소에 품은 한 사람. 브라이언은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쓴다.


어쩌면 이게 최선이었겠구나. 이게 나았겠구나.

이래야만 했을까? 묻고 이래야만 했겠구나 나 혼자 대답한다.

반지를 받고 어떤 걸 포기하고 둘이 함께하는 삶이 더 아름다울 거라는 보장은 어디있담.

어쩌면 삶은 이런식으로 한 사람에게 계속 살라고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게 나을수도 있겠구나, 어쩌면 이게 최선이겠어.

비극이고 슬프고 애틋하다는 것은 이 이야기의 단면일 뿐인거야.

삶에 있어서 어떤 것들은 놓기가 그렇게나 아쉬워도 놓고 돌아서야 하는건가.



영화 속에서 수시로 보여주는 센트럴 파크 벤치에는 다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날

 

 

 

길고양이 같은 표정의 오후를 핀셋으로 담벼락에 꽂아두고 나는 당신의 입술을 당겨왔다. 당신은, 나는 피 흘리는 짐승이었다. 늑대 발톱을 물어뜯으며 한 세기 전의 동굴 속을 달렸다. 티베트 여우의 눈빛 속은 따뜻하고 경이로웠지만 이별은 언제나 눈썹 위에서부터 고이기 시작하지. 당신의 손가락 끝이 조금씩 지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란 걸 알았다. 담벼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당신의 입술은 분필 가루처럼 공중으로 흩어져 펑펑 꽃이 되거나 퍼렇게 멍들었다. 당신이 떠나던 날 천지에 매화 잎은 다 지고 대숲에 짓던 바람의 집처럼 사소한 일에도 새들은 떠났으며 떠난 자리마다 물 밑이 환했다.






떠난 자리마다 물 밑이 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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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9-10-17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락방님 글만으로도 너무 저릿해요~ 😭

다락방 2019-10-18 07:39   좋아요 0 | URL
가을입니다, 보슬비님.... ㅜㅜ
 

알라딘에서 진행하고 있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가 11월이면 꼬박 일 년이 된다. 매달 한 권씩의 책을 읽어왔으니 12권의 책을 함께 읽은 셈. 누군가 함께 읽으면 미루기보다 읽게 된다는 것이 처음 시작 의도였지만, 나에게 더 큰 의도는 여성학 책을 알라딘에 더 많이 노출시키자는 데 있었다. 계속 글을 쓸 것, 그래서 알라딘에 그 책을 계속 노출 시킬 것. 내가 기대한만큼 아주 많이, 빈번하게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러나 이 같이읽기를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계속 일어났다. 일어났다기엔 좀 과장된 표현인데, 최근 일주일만 해도 10월, 11월 도서인 [제2의 성]이 계속 서재에 노출된 것. 내가 쓰고 다른 멤버 1이 쓰고 어젯밤에는 멤버 2와 멤버3도 썼다. 이 오래된 책이 이 같이읽기가 아니었다면 이 즈음에 어떻게 서재에 보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좋든 싫든 어쨌든 함께하기로 해서 글을 쓰는 이상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극이 된다. 혼자였으면 아, 다음에, 하고 미뤄둘 책읽기를 같이 읽기 때문에 어떻게든 읽고자 한다. 설사 완독을 못한다해도 완독해야지, 라는 마음을 어느 정도 더 길게 유지할 수 있는 것.

나야말로 혼자였다면 완독하지 못했을 책들을 이걸 통해 완독해낼 수 있었다. 지금 제2의 성이 제일 고비이긴 한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주말에 읽고 폭풍쓰기를 해보자...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다. 까페에 가 진득하게 읽어도 좋을 것이다. 내게는 커피 쿠폰이 여러개 남아있다. 친절하고 다정하게도 나의 어떤 친구들은 내가 커피 마시며 책 읽는 걸 나보다 더 좋아해 내게 커피 쿠폰을 슝슝 날려주는 것이다. 으하하하하.

















알라딘에 여성주의 책을 더 자주 노출시키자,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극이 되자, 미뤘던 책을 읽자는 것들이 이 같이 읽기를 하는 작은 사회적 목표였다면, 나 개인적으로도 아주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고(내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매달 완독하며 이 같이읽기를 진행한단 말인가!! 자뻑 터짐.), 무엇보다, 이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나는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책을 읽는다고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나의 경우에는 책을 읽음으로써 생각과 판단이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을 사는데 많은 불편함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나는 내가 그전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는데 한걸음 다가갔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가 2020년에도 이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를 계속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부지런히 읽고 공부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여성주의 책들을 읽는 일은 스스로에게 다 쌓인다. 배경 지식이 되기도 하고 중요한 지성이 되기도 하며 무엇보다 감수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여러분 읽자, 계속 읽자. 그리고 읽은 것에 대해 생각하고 계속 쓰자.


여성주의 책들을 읽노라면 내 젠더 감수성이나 여성주의적 지식이 늘어나는 장점이 있지만 오, 세상에 이렇게나 똑똑한 여성들이 많이 있다는 것에도 매우 감탄하게 된다. 그 감탄은 나의 의지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렇게나 똑똑한 여자들이 이렇게나 많이 얘기하고 있었어! 나도 더 많이 읽고 쓰고 똑똑해지고 사회를 조금이나마 바꾸어보는 데 일조하겠다는 의욕 같은게 슬그머니 자라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두 유 노 왓 아 민?




이렇게 이 책 읽기를 같이 해오던 멤버들과 11월에 만나기로 했다. 그간 수고했다는 의미로. 이거 진짜 보통일 아니다. 처음 읽어왔던 책들은 얼마나 벽돌 같았는지. 사두고 안읽은 책들이었는데 비로소 읽을 수 있었다니깐. 진짜 의미있는 시간이었고 고생스런 시간이었다(대학원 대신 선택하기로 나쁘지 않았어!). 내가 읽고 싶은 다른 책들이 저렇게나 쌓여있는데 시간을 내어 이 같이읽기 책을 읽어낸다는 것은 분명 에너지와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신뢰의 일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만나는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일!



다행스럽게도 모임의 멤버들이 모두 날짜에 대해 긍정해 주었고, 히히, 어느 분들은 저 멀리 지방에서 오시기도 한다. 나이쓰~ 나는 너무 기대되고 신나서 미쳐버릴 것 같다. 우리는 아마 만나면 제2의 성 얘기는 1도 안하게 될 수도 있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성의 변증법의 ㅅ 얘기도 안나올 수도 있겠지만, 아아, 이 동지의식을 어쩐담?



그나저나 장소 선정이 문제다. 여러명이 다같이 질펀하게 수다를 나누면서 먹고 마실 공간은 어디가 좋은가. 일단 다들 처음 만나는 거라 굽거나 끓이는 식당은 안된다. 그러면 음식 조리에 집중하느라 수다랑 멀어져. 한정식 집이라든가, 중식 집이 좋으려나. 이왕이면 작은 룸을 하나 잡으면 더 좋을텐데. 장소에 대해서는 멤버님들, 혹여 좋은 곳 생각나면 추천해주세요.




그나저나 일단 12월은 한 달 쉴 생각인데, 2020년에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거 너무 힘들었단 말이야 ㅠㅠ

그나저나2, 모임까지 나는 제2의성 완독을 할 수 있을까? 이제 겨우 프롤로그를 넘겼을 뿐인데? 흐음...




아무튼 여러분 계속 힘내주세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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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10-17 15: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이 읽고 다른 알라디너님들 페이퍼 읽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아, 나랑 똑같은 데 줄을 치셨구나 혹은 어? 이런 구절이 있었네? 하면서요.
우리 모두 수고 많았어요. 다락방님이 있어서 힘낼 수 있었구요.
가장 큰 난관 <제2의 성>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칠 때까지 화이팅!!!

다락방 2019-10-17 15:28   좋아요 1 | URL
저야말로 단발머리님께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단발머리님 덕에 계속해올 수 있었어요. 힘을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그나저나..
제2의 성이 참... 거시기합니다. 제가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요? 읽지는 못하고 못읽을까봐 두려워하기만 하고 있어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우리 가급적이면 다 읽고 만납시다. 빠샤!

2019-10-17 1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17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26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9-10-28 08:11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
 
파이브 투 세븐
빅터 레빈 감독, 안톤 옐친 외 출연 / 비디오여행 / 2016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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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센트럴 파크, 구겐하임, 드디어 작가, 그리고 유일한 사랑.
마지막 장면은 몇 번이나 돌려봤다.
이 영화속에서는 브라이언이 나였다.

˝당신이 나의 어떤 책을 좋아하든 그건 모두 한 독자를 위해 쓰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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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줘! 제니퍼 - 아웃케이스 없음
카린 쿠사마 감독, 메간 폭스 출연 / 20세기폭스 / 201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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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잡하기가 [배드 티쳐]랑 쌍벽을 이룬다.

2009년도 작품이라니, 메간 폭스도 아만다 사이프리드도 잘 나가기 위해서는 이런 영화를 반드시 거쳐야 하는걸까.
슬프다..

˝남자들만 죽으니까 호신용 스프레이 가지고 다녀˝

별을 하나 더 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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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 티처
제이크 캐스단 감독, 저스틴 팀버레이크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도대체 이런 건 왜 만든건지... 이 한심한 스토리가 어떻게 되려나 끝까지 봤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었다. 조잡하기 짝이없다.
카메론 디아즈 데려다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냐..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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