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라는 자신의 노래 '바람이 분다' 에서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라고 했더랬다. 맞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어디 추억만 다를까. 나와 너 사이에 있었던 아주 많은 일들은 우리 서로에게 완전히 다른 식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 뭐니뭐니해도 섹스가 그렇지 않을까. 숱한 남자들이 섹스 후에 '좋았어?'라고 묻는건 사실 대체적으로 '네가 만족했는지 알고싶어'의 물음이 아니라, 이미 답이 정해진 물음일 것이다. '응 좋았어.' 이 말을 듣기 위해 묻고, 그 말을 기어코 들어낸 후에는 '나는 섹스머신이지 우후훗' 하려는 게 아닐까. 여자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자신과 섹스를 한 남자들이 자신이 섹스를 아주 잘하는 줄 알고 있다는 데에 깜짝 놀란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럴때마다 당황스럽다고. 그러나 어릴 때부터 남자의 자신감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배운 우리는 응 좋았어, 라고 말해버리고 만다.
나나는 육체적 매력이 어마어마한 여자다. 비너스 역으로 연극 무대에 데뷔했는데, 세상에, 많은 남자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 거다. 첫 공연 후에만도 집에 찾아온 남자가 여럿이다. 스무살도 안된 어린 남자부터 유부남까지, 나나와 잠자리를 가진 남자는 많은데, 나나는 그중에서도 뮈파 백작과 꼭 연애를 하고 싶었다. 뮈파 백작이 우아해보이고 돈도 많아 보여서 어떻게든 꼬셔보고 싶었다. 그게 잘 안되어서 마침 자기에게 구애를 하던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심지가 굳은 뮈파백작은 흔들리지 않으려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나의 관능미에 굴복하게 되고, 그렇게 허구헌날 괴로워하다가 드디어 뮈파백작은 나나랑 자게 된다.
그날 밤 그녀는 뮈파 백작과 잤다. 그러나 재미는 없었다. (p.254)
아.... 재미가 없었다니........ 쓰읍....... 그랬구나.... 하고 다음장을 넘기는데, 석 달 뒤가 나온다. 석 달 뒤의 뮈파 백작을 보자.
게다가 그는 석 달 전부터 관능의 도취 속에 살았기 때문에 그녀를 소유하겠다는 욕망 외에는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것은 뒤늦게 눈을 떠서 허영심도 질투심도 자리잡을 곳이 없는, 마치 어린아이 같은 탐욕이었다. 오직 구체적인 느낌만이 그를 자극했다. (p.257)
재미는 없었다고 나나가 생각한 그 시점부터 뮈파 백작은 관능의 도취 속에 살았단다. 나나는 재미없는데 뮈파 백작은 어린아이 같은 탐욕에 시달려 살았단다. 뮈파 백작은 나나를 잃을까 두렵고 나나가 거짓말 하는 게 괴롭고 나나가 자기를 버릴까 걱정된다. 아,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뮈파 백작은 어린아이 같은 탐욕에 시달리는데, 나나는 재미없었어...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제르베즈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읽었던 터라 《나나》에 대한 기대가 몹시 컸는데, 중간까지 읽은 지금 나나는 재미없다. 그만읽을까 생각할 정도로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 그리고 나나에 대해서도 또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딱히 공감이 되질 않아서 그런 것 같다. 공감되지 않으면 멀찌감치 떨어져서라도 뭔가 재미가 있어야 되는데 재미가 없고 지루해. 화려한 연극 무대와 자기 육체에 흠뻑 빠진 나나 라는 여주인공이 나오는데도 아아, 재미없어.... ㅠㅠ 이 책 두꺼운데 아직 절반 밖에 못읽었고, 그만 읽을까 싶지만, 아니야, 그래도 에밀 졸라니까 끝까지 읽어보겠어! 한다. 먼저 읽은 친구가 《제르미날》은 정말 재미있다고 하는데, 아아, 나나가 재미 없으니까 제르미날에 대한 욕망이 1도 안생긴다. 목로주점이 짱인 것이야. 나는 얼른 나나 읽고 남동생에게 권하려고 했는데, 남동생한테 굳이 읽으라고 하지 않아도 되겠다. 쩝...
어제는 퇴근 무렵에 몹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별 거 아닌 일이었지만 어쨌든 보쓰 때문에 나는 확 짜증이났고, 그러자 어묵탕이 먹고 싶어졌다. (응?) 사실 인과관계가 그렇게 되는 건 아닌데...어쨌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어묵탕에 소주를 먹고 싶었고, 일전에 제부가 어묵탕을 맛있게 끓여줬던 게 인상깊었던지라 퇴근하면서 제부에게 전화를 걸어 어묵탕 끓일 때 뭐 넣었었어요? 물었고, 제부가 말해주는대로 아이폰 메모장에 적었다. 뭐 사실 적을 것도 없이 국간장, 다시다, 무우, 고춧가루 약간...같은 거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엄마에게 메세지를 보내 퇴근 후 바로 집에 갈거라 알렸고, 집에 가서 어묵탕 끓여먹을 거라 어묵 사갈거다 얘기했다. 엄마는 알겠다며 지금 아빠랑 시장에서 칼국수를 먹고 있다 하셨다. 나는 그참에 시장에서 어묵 좀 사다달라고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엄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가 칼국수 먹고 들어가면서 어묵 사갈까?
나는 씐나서 응, 안그래도 부탁하고 싶었어, 엄마 집에 무우 없으면 무우도 사다줘, 했더니 엄마는 응, 엄마가 들어가면서 어묵이랑 무우 사갈게, 하시는 거다. 나는 이 사소한 일이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감사했다. 그리고 엄마는 집에 제육볶음 있는데 상추 사갈테니 싸먹을래? 하셔서 내가 응!! 했다. 집에 소주는 있으니 안사도 되고, 시장에 들리지 않아도 되니, 나는 시간을 절약한 셈이었다. 우후훗. 엄마는 한차례 다시 전화해서는 집에 김밥도 있는데 계란물 입혀 부쳐 먹으라는 거였다. 알겠어, 그건 집에 가서 생각해볼게, 하고는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서 집에 가는 길에 이 일에 대해 칠봉이에게 말하니, 칠봉이는 혹시 엄마가 어묵탕도 끓여두시는 거 아닐까, 했고, 나는 아니, 설마... 그리고 내가 그걸 부탁할 순 없지. 내 술안주인데, 엄마가 어묵을 사다주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끓여달라고까지 해...하고는 집에 갔는데, 엄마가 어묵탕을 끓이고 계셨다!!!!!!!!!!!!!!!!!!!!!!!!!!!!!! 엄마 사랑해 ♡
나는 정말 지쳤었고, 우울하고 짜증이 났었고, 스트레스 가득했었는데.... 왜 내게 이런 보쓰가 내려져서 나는 이토록 힘이든가, 하면서 또 스스로에 대한 원망도 했었다. 어째서 내 성격은 이모양이어서 그냥 넘기지를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가, 내가 지금보다 좀 더 무심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것을... 같은 거 생각하고 집에 왔는데, 엄마는 나를 위해 어묵탕을 끓이고 계셨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는 이 작은 일에 어쩐지 폭풍감동 하게 되어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엄마랑 마주보고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엄마 고맙다고 했다. 이러이러했는데 엄마가 이러이러해주니 너무 고마워. 그리고 덧붙였다. 엄마, 나는 부모복, 엄마복이 있는 것 같아. 엄마가 나를 사랑해주는 거 내가 너무 잘 알아서 이렇게 화가 나도 버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 같아, 라고. 엄마는 어묵탕 가지고 뭘 그러냐고 하는데, 아니 엄마, 너무 화난 채로 집에 왔는데 엄마가 나 먹으라고 어묵탕 끓이고 있는 걸 보니까 아아, 나는 이 사랑으로 견딜 수 있는거구나 싶더라고. 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내가 진짜 엄마복 아빠복 형제복 다 타고났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렇게 엄마랑 얘기하다가 엄마 처녓적 얘기도 하고 신혼 무렵 얘기도 하면서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퍼뜩, 분노의 포도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로저샨의 선택에 대한 부분에서 내가 빡쳤다는 페이퍼를 얼마전에 썼는데, 그 때 나는 '내가 로저샨이라면 그 선택 하기 싫다'고 했더랬다. 댓글들로 여성분들이 그 부분 자신들도 찜찜했다고 하셨는데, 어느 분이 '어느 엄마가 딸한테 그런 선택을 하게 하겠냐' 하셨던 게 기억난거다. 그 댓글 읽고 나는 '어? 그러네? 나는 내가 로저샨일 경우만 생각했는데, 로저샨의 엄마라면? 하게 된거다. 내가 로저샨의 엄마였으면 나는 로저샨의 엄마같은 생각, 그 선택을 딸에게 무언으로 부탁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니 별 고민의 여지도 없이 '아니'인거다. 그래서 나보다 더 오래전에 태어난(이라고 해봤자 고작 이십년 정도긴 하지만), 그리고 더 어렵고 가난하게 살았던 엄마한테 물어보고 싶어진 거다. 일단 딸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는 나는 밝히지 않았었으나, 요즘 좋은 글을 한껏 써주고 계신 syo 님의 페이퍼에는 나와 있으므로, 궁금하신 분은 그 분의 최근 페이퍼를 읽어 보시면 되겠다.
나는 책의 줄거리를 말하고, 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말하고 또 마지막에 이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엄마에게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 로저샨의 선택에 대해 말을 시작했는데, 내가 엄마한테 '엄마는 어떨 것 같아?' 묻기도 전에 화를 내시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야 어떤 엄마가 그러냐!' 하시는 거다. '나라면 너한테 그러라고 하지 않아!' 하시면서, 음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나누어줄 수 있다, 죽어가는 사람을 그렇게 살릴 생각은 할 수 있다, 그런데 내 딸한테 젖을 먹이라 한다고? 야, 안돼. 그걸 왜 하냐. 야..그걸 ... 하시면서 엄마는 엄청 분노하셨어. 아아... 엄마.........
그러니까 딸이 되는 나와, 엄마가 되는 우리 엄마 모두가 '그러기 싫다' 하는 일, 그것을 스타인벡은 자신의 책에 결말로 떡하니 써놓은거다. 나는 엄마랑 얘기하다가 그랬다.
젖도 없는 놈이 왜 남의 젖가지고 함부로 그러는걸까, 엄마?
오늘은 연휴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 나의 스트레스를 다스리자고 생각한다. 연휴가 끝나면 매주 수요일에 페미니즘 강의를 두달간 들으러 다니기로 했고, 연휴가 끝나면 한 청년과《제2의 성》을 함께 읽기로 했다. 아아 바뻐.... 바쁘구나..... 바쁘네? 나 너무 바빠서 막 쓰러지면 어떡하지? 보약 한 재 지어먹어야 하나 진짜? 제2의 성은 2017년 안에 완독이 목표인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어이쿠, 구몬이 또 밀렸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연휴동안 여행이 계획에 있고 긴 비행이 당연히 따르는 바, 그래, 이렇게나 밀린 구몬, 추석연휴라고 2주치를 줘서 양이 엄청 많아져버린 구몬, 비행기 안에서 해버리겠어!! 했지만, 나의 친구들이 말렸다고 한다..... 심지어 한 명은 구몬을 끊어버리라고 했어... 아아.............아니야, 내가 해보이겠어, 기어코 해보이겠어, 영어의 신이 되겠다!!!!!!!!!!!!! 나는 이제 막 be going to 와 will 을 마친 참인데, 아아, 이제는 어떤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영어의 신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