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엔 회사 업무에 큰 환멸을 느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다고 생각했고,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오면 출근하지 말까, 하는 생각을 오후 내내 했다. 이 일을 이제 그만하고 싶다, 그만두고 싶다, 나는 내 보직이 정말이지 끔찍하다, 라고도 생각했다. 내가 맡은 일, 내가 해내야 하는 일, 사실 따지고보면 크지 않은 그 사소한 일이 하루종일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서, 내 에너지는 이미 고갈된 상태였다. 우울했고 울적했고 기운이 쫙 빠졌다. 저녁에 있을 리베카 솔닛의 강연회에 기쁜 마음으로 가기는 애시당초 틀린 것 같았다. 솔직히, 가기 싫었다. 강연이고 뭐고, 그냥 집에 가 퍼져 눕고 싶었다. 와인 한 병을 안주도 없이 쭉쭉 들이켠 다음에, 뻗어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 얼마나 가고 싶었던가, 리베카 솔닛이라니, 나는 얼마나 만나고 싶었던가! 나는 억지로 억지로 지친 몸을 이끌고 건국대학교로 갔다.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났고 나 오늘 좀 지쳤었어, 하고는 강연장에 도착했다. 좌석을 배정받고 자리에 앉았는데, 정말이지 몸이 천근 만근,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시간이 되었고 리베카 솔닛이 등장하는 순간, 갑자기 와- 하는 마음이 되었다. 오길 잘했다, 너무 좋다, 내가 살아 생전 리베카 솔닛을 내 눈앞에서 보다니, 그 사람의 목소리르 바로 들을 수 있다니!! 리베카 솔닛이다!! 하는 마음으로 뭔가 눈물까지 날 것 같아서, 아아, 역시 왔어야 했어, 오길 잘했어, 하고 등장의 순간부터 감동에 젖었던 거다.
그러나 그 감동도 잠시, 나는 솔닛의 강연시간을 즐길 수가 없었다.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나눠준 출력물도 충분히 좋았고(친구들 복사해줘야지!), 강연 내용과 질문, 그에 대한 답도 물론 당연히 좋은 내용이었다. 특히 남성 페미니스트들에게 너무 많은 룸을 차지하게 두지 말라는 말은 인상 깊었다. 그들이 여성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해 가르치게 두지 말라 하셨다. 남자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학을 듣는 이유는 여자에게 페미니즘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누군가의 트윗 내용도 떠올랐다. 페미니즘을 공부했다고 해서, 거기에 대해 관심있다고 해서, 실제로 여성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야, 페미니즘은 말야~' 하면서 가르치려 든다니, 좀... 쪽팔리지 않나?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건, 페미니스트로서 발화하며 겪게 되는 고통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억압당하는 고통, 둘 중에 하나를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었는데, 이게 정확한 워딩은 기억 안나므로, 지금 트윗에서 후기를 검색해보고 오겠다. 이런 거였다.
"여성으로서 살면서 당할 수 있는 벌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생각을 자신있게 밝히는 것에 따라오는 벌, 또 하나는 내 생각을 말하기 두려워서 웅크리고 있는 벌. 살면서 둘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지는 여러분들의 몫이다."
저 말은 나를 진짜 후려쳤는데, 나는 내가 전자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을 말하면서 그에 따른 두려움 혹은 누군가의 공격을 당하면서 벌을 받고 사는 쪽이라고. 내가 그렇기 때문에 그 두려움을 갖기 싫어 '말하지 않는 쪽'을 이해하지만, 그들은 또 그들만의 벌을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뭔가 커다란 바위가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거다. 그 사람의 성격과 성향에 따라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도 다를 것이고, 아마도 우리는 그중에서 '차라리 이 고통을 택하리라' 하게 되는 것일테다.
이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강연 자체는 내게 우울함을 가져다줬다. 솔닛이 영어를 쓰는 사람이니 당연히 통역이 있을 것이고,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솔닛이 말을 하고 그 말이 끝나면 통역사가 통열을 해주는 순간, 강연자인 솔닛과 나 사이에는 시간차가 생기는 거다. 만약 내가 영어에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솔닛이 말을 하는 그 순간순간의 감정을 바로바로 포착할 수 있었을텐데, 나는 그게 안되는 거다. 강연장에 모인 800명의 사람들중 다수는 영어를 다 알아듣는 것 같았다. 솔닛이 말을 하면 그 말을 듣고 웃으면서 반응을 한 거다. 그러나 나는 솔닛이 말할 때 웃지 못했고, 그 후에 통역사를 거쳐 듣게 될 때는 이미 시간차가 생겨버려 웃을 수 없었다. 다만, '이 부분에서 웃었겠구나' 하게 되는 거다. 그러니 나는 강의를 온전히 즐길 수 없게 되는 거다. 이 좋은 내용을 앞에 두고, 앞으로 페미니스트로서 어떻게 하겠다, 라는 다짐보다 더 앞서, '영어 못하는 나'가 나를 후려치는 거다. 하아- 내가 제때 피드백을 하지 못한다는 것, 누군가가 끼어들어 통역해줘야만 내가 강연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거. 이게 나를 너무 우울하게 하는 거다. '좋은 가르침을 받고 크게 깨우쳐 세상을 더 넓게 보게 됐다'는 후기 같은 걸 안고 부푼 가슴으로 집에 돌아가고 싶었는데, '영어 못하는 나'만이 나에게 가득찬 거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래서 정희진 쌤과 윤김지영 쌤의 강연이 더 생각났다. 이현재 쌤의 강의를 들을 때, 그 분의 흥분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던 때도 덩달아 떠올랐다. 그분들의 강연을 들을 때는 그분들의 흥분, 분노가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었는데, 솔닛의 생각이 내게 전해지려면 우리 사이에 시간차가 있고, 나는...백프로 즐길 수가 없었어... 영어, 뭐지?
나는 내가 전체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는, 일부는 알아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팝송을 틀어놓고 정신 뽝- 집중하면 절반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처럼, 이게 슬픈 노래인지 기쁜 노래인지, 연인에게 돌아오라고 말하는건지 꼴도 보기 싫다는 건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솔닛의 강연도 내게 그러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솔닛의 강연은 여행지에서의 영어와 달랐다. 아주 달랐다. 여행지에서 이게 얼마냐고 묻는 건, 엠파이어 스테이트는 어느 쪽으로 가냐고 묻는 것은 솔닛의 강연과 달라도 한참 달랐다. 여행지에서는 상대와 내가 눈을 맞추고 제스쳐를 써가면서 어느정도 서로의 말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지만, 솔닛의 강연은 그런 어느 정도로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 강연장을 나오는 나는 울적했다.
강연을 같이 들은 친구와 고기를 구우면서(맛도 없었어...), 소주를 마시면서 강연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친구도 나처럼 강연자와 나 사이의 시간차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바로바로 영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지 너무 신기해했어. 영어 공부 해야겠네...하는 무거운 마음이 되어 후기를 나눴다. 그 날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토로하고 친구로부터 다정한 위로도 받았다. 잠깐 친구 얘기를 하게 되는데, 이 친구는 참.. 새삼 고맙게 느껴지는 게, 언제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거다. 들어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텐데 잘 들어주고, 게다가 어떤 것도 내게 강요하질 않는다. 여행을 함께 계속 하게 되는 것도, 이 친구와 항상 강연을 같이 듣게 되고 술을 마시게 되는 것도, 이 친구가 내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고 강제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 모든 울적함이 나의 '욕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내내 그 욕심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욕심이 없었다면 받지 않았을 스트레스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내가 '영어로 알아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사실 영어 사용자와 나 사이에 통역이 필요한 건 너무나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외국에서 살았던 것도 아니고, 어학연수를 받은 것도 아니고, 고작 학창시절 배웠던 영어가 전부인데, 영어에 대해 시간을 들여 공부하지 않았으면서 영어를 다 알아듣기를 바란다니, 그것은 욕심 아닌가. 회사 일도 그렇다. 별 거 아닌 일이었고, 나는 그저 '원래 저렇지' 넘겼으면 됐을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잘해서 보고해야지' 같은 생각같은 걸 하니까 스트레스가 오는 거다. 결국 욕심이 문제 아닌가. 사람에 대한 것도 그렇다. 김경미 시인의 시처럼, '내가 세컨드다, 나는 그저 세컨드이면 된다'의 마음으로 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세컨드 따위 되고 싶지 않아!' 라는 바람이 생기다보니 또 스트레스를 받고.... 그저 내가 무언가 되고 싶다, 잘하고 싶다, 최고이고 싶다, 이런 욕심만 버리면 세상만사 다 해결되는 게 아닌가 싶어지는 거다. 결국, 욕심이 문제인 거 아닌가...
나는야 세컨드 1
김경미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 드라이브 나가자던 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번째,
첫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 이 아니라 늘 다음, 인
언제나 나중, 인 홍길동 같은 서자, 인 변방, 인
부적합, 인 그러니까 결국 꼴지,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 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고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토요일에 여동생네 집에 가서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술잔을 앞에 두고, 정말 사소한 일, 누구에게 말하기도 창피한 일인데, 나는 이런 일에 아직도 스트레스를 받아, 내 성격이 문제인 것 같아, 그냥 무시하면 되는데 그게 잘 안돼...라고 하자 여동생은 그랬다. 언니, 그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고 해도, 내가 상처받았던 일이라면 거기에 대해서 번번이 상처받을 수밖에 없어, 그게 인간이야, 사람은 같은 일로 번번이 상처받아, 라고 하는 거다. 아아, 동생아, 너는 어떻게 그렇게 현명한 사람이 되었니, 어떻게 그렇게 제때에 제대로된 말을 해주니. 내가 이 회사에 15년을 다니면서 아직도 이런 걸로 스트레스 받는 내 성격이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런 내 자신이 너무 싫었는데, 동생은 그랬다. 누구나 번번이 같은 일로 또 스트레스를 받는 거라고...
그러고보니 매사 그런 식이었다. 회사에서의 일도,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도, 그리고 사람에 대한 욕심까지도... 번번이 나를 상처주는 건 언제나 같은 식으로 반복되었다. 아마도 내가 이런 성향의 사람이라서이겠지만, 인간이란 게 무릇 그렇게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인 건 아닐까. 나도 그냥 인간이고, 나 역시도 특별히 더 예민한 부분과 특별히 더 강한 부분을 가진, 그냥 한 명의 여자사람일 뿐인데...내가 뭐라고 모든 일에 다 강하게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한걸까.
그리고 계속 욕심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욕심만 버리면 돼, 내가 욕심만 버리면 매사가 다 헐렁한 일이 되어버려, 내가 욕심을 버리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라고. 그렇지만, 지금까지 내 삶이 욕심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세컨드가 되자고 수없이 다짐해도, 그보다 더 많이, 나는 세컨드가 되기 싫다고 생각하는 걸. 세컨드 싫어!! 라고 버럭버럭 소리치고 싶은 걸. 그렇다면 이런 내게 계속 스트레스와 상처는 따라오는 것인가....
나는 이번이 아닌 '다음'이 되기 싫어.
첫번째가 아닌 두번째가 되기 싫어.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표현되기 싫어.
엉엉 ㅠㅠ
금요일은 그렇게 여러가지로 내 에너지를 쑤욱- 가져가버렸고, 나는 어제 저녁 여섯시반부터 자버렸다. 아니 그러니까,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서 책도 읽고 구몬영어도 하고 그럴랬는데, 하하하하, 잠깐 눈뜨니 몇 시였더라? 아무튼 정신 안차려져서 조금 더 자자, 했고 그렇게 또 밤에 눈떴다가 아아 눈 감겨, 하고 계속 자고, 새벽 세시에 눈 한 번 또 떴따가, 아아, 아침을 맞이하자, 그러고는 더 자버려서, 결국 어제 저녁 여섯시반부터 오늘 아침 다섯시반까지 잤다.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게 뭔일이래 대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계획했던 걸 아무것도 못했어!!!!!! 역시 체력 소모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심한 육체적 움직임보다, 과음보다, 스트레스다.... 스트레스가 내 육신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그게 어떠한 것으로 생긴것이든간에, 극심하게 신경쓰는 게 있다면, 그것은 나를 갉아먹어... 그나저나,
구몬영어는 어떡하지? 구몬영어도 주인 따라 역마살이 있는지, 내 가방에 들어간 채로, 회사로도 따라갔다가, 집으로도 따라갔다가..... 그렇지만 꺼내어져 하게 되지는 않는, 그저, 이에저에 뻐딜 닙다이...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이르고 가는것인가......... 구몬이여....내가 미안해........그렇지만 그거슨 너의 팔자, 나란 주인을 만난 너의 운명의 데스터니........
아아, 더 자고 싶다. 회사 같은 거 안다니면서 살고 싶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너를 만난건 정말 행운이야
황무지 같은 이 세상에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이렇게 넓은 세상 한가운데 그댈 만나건 나 역시 기쁨이야
가시 나무같은 내 맘에 그댈 만나지 못했다면
**힘겨웠던 지난날을 견딜 수 없어
어딘가에 한 줌의 흙으로 묻혀있었겠지
바라보고 있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아직 네게 말은 안했지만 내가 살아있는
살아숨쉬는 이유
우리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닌거야 운명이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