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참석한 강좌의 주제는 페미니즘과 '노동'이었다. 마침 《아내가뭄》을 읽은지 얼마 안되었어서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여성들이 노동으로 부터 '배제'되어 있었던 것, 그리고 임금노동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이 불평등한 것이 페미니즘이 노동에 대해 문제제기한 부분이었고, 이런 부분을 다루는 언어 자체가 없다는 것도 문제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등장한 단어가 '인적자본론'이었다. 똑같은 조건일 때 여성보다 남성을 고용하는 이유, 그리고 같은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남성의 임금이 더 높은 이유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이 사회 구조가 남성의 인적자본론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는데, 이는 사회 구조적으로 그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것이라는 얘기를 하면서, 여자가 생애주기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것들로 노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취업전선에 뛰어들면서 여성들은 '결혼할거냐' 는 질문을 실제로 면접에서 듣기도 하는데, '여자들은 결혼하면 직장생활 오래 못하지' 라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결혼하고 출산을 하고 양육을 하면서 계속 일이 중단되는 거다. 애를 어느 정도 키워도 경력단절로 이미 임금은 후려치기 당해서 사회에 복귀하게 되고, 또 그렇게 직장생활로 돌아와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조금 일찍 퇴근을 한다든가 늦게 출근을 한다든가 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거다. 이 때 또한번 여성이란 집단으로서 후려치기 당하게 되는데, 기본적으로 회사에서는 '여자들은 일의 집중도가 남자들보다 낮다'를 전제한다. 이런식으로 업무에 관련되지 않은 어떤 일(대부분은 가족, 가정에 관한 일)에 움직이려고 하니까.
그러나 이때 남자가 움직여준다면 여자들도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너와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에게 지금 당장 보호자가 필요한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면, 너 혹은 내가 그 일을 해결해야 할 거 아닌가. 너가 직장에서 업무에 열중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이 아이에 관한 일을 해결하려고 액션을 취했기 때문이다. 만약, 너가 그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면, 나는 직장에서 일을 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러니까 어느 한 쪽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대체적으로 '여자'가 해왔기 때문에, 그래서 직장 내에서 여자들은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후려치기를 당하는 거다.
아이에게 부모가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으레 우리는 엄마가 가는 게 아빠가 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이랑 좀 더 친근하고 아이를 좀 더 잘 알고 아이랑 오랜 시간을 보낸 게 엄마니까. 그러니 좀 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짐작하는 바이고 또 그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아빠를 이렇게 만들면 될 게 아닌가?
'애너벨 크랩'도 여자를 자꾸 직장 내에 끼워 넣으려고만 하지 말고(in), 아빠를 직장 바깥으로 끌고 나오자(out)고 얘기하는 부분이 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엄마만 하는 게 아니라 아빠도 하자는 거다. 일을 '중단'하는 것을, 여자만 하는 게 아니라 남자도 하자는 거다. 그건 단순히 여자와 남자의 경력을 비슷하게 끌고 가려는 의도이기 이전에,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이 아빠에게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 매 순간순간, 100일과 세 살 때, 그리고 일곱살 때, 그 모든 순간은 그때 단 한 번뿐이며 유일하다. 아빠라고 아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왜 원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엄마라고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아닌 것을, 아이가 자라면서 프로 양육자가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거다. 그렇다면, 아빠도 어릴 때부터 아이랑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구조적으로도 조금씩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첫아이를 가졌을 때, 제레미와 나는 런던에 있었다. 영국의 국민건강보험은 부모 자격을 갖추려면 한참 먼 부모와 신생아를 하루빨리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오드리가 태어나고 6시간 후 우리는 퇴원 서류를 받았다. 우리는 처음 부모가 된 사람답게 경건한 마음으로 아이를 포대기에 감싸고 주차장으로 갔다. 그리고 아이를 앉히려고 렌트한 신생아용 카시트를 차에 어떻게 장착해야 하는지를 두고 약 1시간 반 동안 언쟁을 벌였다. 그렇게 우리가 서 있는 동안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아기가 우리보다 경험 많은 행인들을 불러 세우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우리는 카시트를 대충 설치하고 집으로 왔고, 그 일을 계기로 우리가 육아에 젬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 라 탱고(미국의 인디밴드)의 공연 티켓이 생겼을 때는 정말로 아기를 데리고 갈까도 생각했다. 그 정도로 우리는 바보 같았다.
남자든 여자든 처음에는 이렇게 아는 게 없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가 아기를 더 잘 돌본다는 무언의 전제가 생겨났을까? 이런 상황을 단순히 '남자는 도망치고 싶어 하고 여자는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간주하지 말자. 육아 전문가도 나머지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다를 게 없다. 하다 보면 느는 것이다. 부모 중 한쪽에게 능력치를 쌓을 기회가 주어지면 그쪽은 더 일찍 전문가가 된다. 편의상 그 한쪽을 '가슴 달린 쪽'이라고 칭하자. 일단 빨리 배운 쪽이 전문가가 되고 나면 나머지 한쪽은 상대방을 따라잡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야 한다. 이때 그 전문가는 배앓이, 달래기, 포대기로 감싸기, 그 외 직관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들로 가득한 불가사의한 세게에 발을 들여놓을 적합한 인물을 뜻한다. 나도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이것은 마치 모든 교육 과정을 점심시간에 동네 토플리스 바에서 진행하는 회사의 여자 중역이 된 것과 비슷하다. 이론상으로는 그런 환경에서도 경쟁하며 살아남는 게 가능하지만 그리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삶도 바쁜 데가가, 자동차 제조를 제외하면 인간은 대부분의 테크놀로지 분야에서 경제적 효율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아마 당신은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아휴. 여기로 가져와봐. 빨리빨리 좀 해."
아이가 생겼을 때의 그 느낌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냘프게 우는 이 아이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나중에 커서 골칫거리가 될지도 모르는 이 작고 연약한 존재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인식을 얼마나 하찮게 바꿔버리는지‥‥‥. 오직 자신만이, 진심으로 자신만이 이런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게 아이가 생기면 보이는 가장 흔한 반응이다.
그래서 이때가 평생 동안 거칠 여러 단계 중에서 남다와 여자가 전통적인 접근법으로 회귀하기 가장 쉬운 단계이다. 두 배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간다움의 묘미다. 개인의 독창성에 대한 믿음을 꿋꿋하게 유지하는 한편 광범위하고 믿을 만한 사회적 패턴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능력 말이다. 아빠는 직장에 복귀할 것이고, 그동안 엄마는 새로운 전문 분야를 계속해낼 것이다. 이런 말을 듣게 될 수도 있다.
"그럼요. 패트릭도 일 좀 쉬고 애랑 얼마나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데요. 근데 지금 회사 일이 너무 바쁘거든요. 당연히 똑같이 일을 나눠서 할 거지만, 지금 상황에서 집안일은 제가 하는 게 맞죠. 다음에는 그이가 맡아서 할 거예요!"
하지만 그다음이 오면 패트릭은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어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은 더 말이 안 될 것이다. 좌우지간 그는 파렉스 이유식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할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사회적 패턴은 북극광처럼 거대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단지 우리가 사는 시대만 볼 수 있다. 그런 패턴들이 굳어지는 데 우리가 얼마나 많이 일조했는지를 깨달을때쯤이면 이미 너무 늦었다. (p.253-256)
남자를 직장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은, 오 좋은데? 라고 생각할 순 있지만, 실질적으로 실행하기는 아주 많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육아휴직을 쓴다고 했을 때, 조직 내에서 그를 곱게 보지 않을 확률이 크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육아휴직을 쓰기까지 아빠가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사례도 나와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빠를 밖으로 나오게 하는게 너무나 불가능한, 그저 꿈이기만 한걸까? 이 나라를 포함한 아주 많은 나라에서 그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나 역시 생각하지만, 이미 이를 실행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 바로 노르웨이다. 아니, 이 나라는 대체 뭐지!!!
길지만, 함께 읽어보자.
산전수전 다 겪고 체념하게 된 우리가 노르웨이로 눈을 돌리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빌어먹을 노르웨이 사람들. 선견지명도 있는데다 세심하기까지 하다. 또 천연자원 호황(우리 오스트레일리아는 천연자원 호황으로 벌어들인 돈을 대형 텔레비전을 수입하는 데 다 쏟아부었다)으로 얻은 수익금을 똑똒하게 투자하여 시의적절하게 국부 펀드를 조성했고, 삶의 질은 또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높은가? 생각해보라. 1993년 남성 육아휴직 의무화를 도입하여 남성들이 휴가를 낼 수밖에 없게 만든 나라가 바로 노르웨이다. 노르웨이에는 진작부터 인심 후한 유급 육아휴직 제도가 있었고 1977년부터는 아버지들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육아휴직을 쓰는 아버지들은 고작 3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노르웨이 정부는 1993년 표준 유급 육아휴직을 쓰는 사람이 아빠여야만 수당의 상당 부분을 지급하도록 법으로 정했다.
이 제도는 부모기 초기에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이 생게부양자라는 기존의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꿔놓았다. 노르웨이는 재정적 혜택을 '안 쓰면 소멸하는' 식으로 바꿔서 휴직을 하지 않으면 재정적으로 오히려 손해를 보게 한 것이다. 그래서 최소 몇 주 동안은 나가서 돈을 벌어야 할 것 같은 충동과 실천하는 아버지 노릇이 대개의 경우처럼 충돌하기보다는 조화를 이루게 만들었다.
오늘날 노르웨이의 아버지들 90퍼센트가 육아휴직을 쓰고 있다. 그리고 육아는 물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10년 전 아버지들보다 하루 평균 1시간 더, 1970년 당시 아버지들보다는 하루 평균 2시간 더 많다.
노르웨이의 상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선택권이 보장되고 장려책과 초보 부모일 때부터 육아에 참여할 기회만 주어지면, 남녀 모두 육아를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노르웨이가 갖추고 있는 완벽한 보육시설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하지만 육아휴직의 발전이 스칸디나비아 모델보다 훨신 더딘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아버지가 부모기 초기 단계에 휴직을 하면 장기적으로 볼 때 더욱 적극적인 부모가 된다는 증거가 있다.
자녀를 출산할 즈음에 열흘 혹은 그 이상 휴가를 낸 오스트레일리아의 아버지들은 그 아기가 유아가 되었을 대 육아 관련 활동에 더욱 자주 참여했다. 2013년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4개 국에 대한 OECD 연구에 따르면 육아휴직을 쓰지 않은 아버지들중 유아가 된 자녀를 매일매일 재워준 비율은 19.3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열흘 혹은 그 이상 육아휴직을 쓴 아버지들 중 자녀를 매일매일 재워준 비율은 27.9퍼센트로 더 높았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유급 육아휴직을 여성의 노동 참여 증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최근 토니 애벗 총리는 자신의 유급 육아휴직은 복지 수단이 아니라 다른 제도와 같은 고용 보장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상황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유급 육아휴직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육아 전문가가 될 기회를 동시에 주는 거라고 본다면?
우리 사회는 아버지들에게 육아에 젬병이 되도록 허용할 뿐만 아니라 젬병일 거라고 기대한다. 젬병이 되라고 권장한다. 그래서 막상 젬병이 아닌 아버지를 보면 매번 놀란다.(p.257-259)
아빠들은 아이들이랑 놀아주는 방법을 모른다는 말을 살면서 아주 많이 듣게 되는데, 여자들 역시 처음부터 그 방법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우리 엄마는 지금 당신의 작은 딸에게 월급을 받으면서, 아이 둘과 함께 지내신다. 아이들의 할머니인 우리 엄마는, 아이들과 어찌나 잘 놀아주는지, 아이들과 함께 이얍-이얍- 공격- 파워- 하면서 몸으로 함께 뒹굴기도 하시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들려주기도 하시며, 알고 있는 온갖 노래를 함께 불러주고, 쌀알을 가지고 놀라고 주기도 하시고, 감자를 함께 깎기도 하신다. 지난번에는 첫째 조카가 유치원에서 배워왔다는 셋셋세를 함께 하는 걸 보고 내가 '와 진짜 엄마 대단하다' 하면서 빵터져가며 박수 친 적도 있더랬다. 아이들은 이런 제 할머니를 엄청 따르고 사랑하는데, 우리 엄마가 태어날 때부터 아이들과 노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기 때문일까? 우리 엄마의 유전자에는 '아이 돌보기'라는 특수한 무엇이 끼어들어간걸까?
애너벨 크랩은 자신의 책에서 첫 부분에 자신이 글을 잘쓴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이 오래오래 계속 글을 써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엄마가 아빠보다 아이들과 더 친하고 잘 놀 수 있는 이유는 아이들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같은 얘기를 다시 하자면, 아빠가 아이들과 노는 데 서투른 이유는,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현저히 적었기 때문이다.
면 녗 전, 나는 남자 동료 한 명이 다른 직장 동료들에게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미안, 오늘은 같이 술 못 마시겠어. 보모 노릇을 해야 하거든!"
그러자 다른 여자 동료가 싸늘하게 말했다.
"자기 애를 보는 게 보모 노릇은 아니지!"
맞는 말이다. 자기 아이라면 보모 노릇이 아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아이를 보살피는 것은 엄마 책임이고 아버지는 보조라는 인식이 강하다. (P.215-216)
현실적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 죽겠는데 아빠 엄마 모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지~ 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실현가능성이 없는 말인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채워가기 위해서는, 누군가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와야 한다. 그리고 전 세게적으로 그 생계부양자의 역할을 남자에게 짐지웠다. 직장 내에서 평등평등 아무리 외쳐봤자 그래서 평등해질 수가 없다. 아주 갈 길이 멀지만, 위에 언급한 노르웨이처럼, 사회적으로 아빠가 육아 휴직 받는 분위기를 만들고, 그렇게 육아를 함으로써 나라에서 지원을 받게 된다면, 그렇다면 많은 것들이 점차적으로 달라지지 않을까. 이렇게 쓰고 있지만 특히나 이 나라에서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주아주 멀 거라는 걸 안다. 멀기만 할까. 실현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지만, 누구나 다 아는, 아주 기본적인 전제는, 아이를 낳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거다. 이 나라가 아이를 키우는 데 대체 뭘 얼마나 해준다고 자꾸 아이를 낳으라 낳으라 하는건가. 가임기여성분포도.. 같은 걸 뿌려대는 나라에는 정녕 어떤 답이 있는가. 지금 내가 아빠와 엄마가 함께 육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 지점과 가임기여성분포도를 뿌려대는 그 지점의 간극은 정말이지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먼가. 이건 무슨 우주에 혼자 떨어진 느낌 같은건데...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혼자 우주에 남겨진 앤 해서웨이의 기분이 이런걸까....
아주 오래전에, 그러니까.. 몇 년전인지 기억도 안나는데, 끝에서 세번 째 남자친구였나...여튼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혼해서 애 낳으면 뉴질랜드 가서 살자..같은 말을 했는데, 그 이유가 나는 아이들을 가두는 게 아니라 풀어두고 싶어서였고, 그렇게 풀어두는 동안 혼자 이지 않을거란 걸 전제해서였다. 그렇지만 그건 어떤 추상적인 로망에 대한 것이었고, 현실에서는 그에게 '나는 결혼해도 아이는 안낳을건데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었더랬다.
나는 현재까지는 출산과 육아를 선택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특별한 어떤 계기가 생기지 않는다면 선택하지 않는 삶을 살 것 같다. 그렇지만 혹여라도 내가, 뒤늦게, 누군가와 아이를 낳고(혹은 입양하고) 키우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다면,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 엄마로서 혼자이고 싶지 않다. 내가 비혼모의 입장이라면, 그건 혼자 해내기로 선택한 것이겠지만, 만약 나에게 아이의 아빠와 함께 사는 삶이 주어지고 그 역시 내 선택이라면, 아이가 자라는 과정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 아빠와 함께이고 싶다. 조카가 자라는 걸 보면서 매 순간순간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하고 또 조마조마했는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 모든 시간들을 나 혼자 지켜보고 싶지 않다. 물론, 이것이 현재 상황에서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하면 보수가 더 높은 누군가가 나가서 돈을 벌어와야 한다. 나는 지나치게 이상적인건지도 모르겠다.
어제 강좌도 흥미롭게 들었고, 들으면서 막 짜릿짜릿했다. 공부는 역시 좋은 것이라고 막 흥분해서 수업에 참여했는데, 하아- 나중엔 정말이지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수차례 들었다.
수업은 저녁 일곱시부터 아홉시까지 진행되는데, 일단 퇴근하고 일곱시까지 맞춰 가려면 정말 서둘러야 한다. 칼퇴를 해야 하는 게 우선이고, 퇴근하고 나서도 후다다닥 바삐 나가야 하며, 종종걸음을 걸어야 하고, 지하철이 온다 싶으면 그걸 타기 위해 긴장해야 한다. 그렇게 만원 지하철 안에 낑겨서 혜화역에 내리면, 또 종종걸음으로 연구소까지 최선을 다해 걸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저녁을 먹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게 수업에 참여하면, 처음엔 신난다. 막 흥분되고 뭔가 새로이 알게되는 게 기쁘다. 그렇지만 배가 고프고,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다가도, 빨리 끝나고 밥먹고 싶다..라는 생각 같은 걸 하게 된다(응?). 게다가 지난 주 첫 강좌도 그렇고 어제 강좌도, 예정된 시간인 아홉시를 훨씬 넘겨 끝났는데, 나는 일단 예정된 시간에서 초과되는 것, 그러니까 내 시간계획을 벗어나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이라, 아홉시를 좀 넘겨가면서부터는 계속 시계만 봤다. 게다가 그 후에는 집중력이 초스피드로 떨어진다. 피로가 쓰나미로 몰려와... 날 좀 보내줘. 아홉시를 넘겨가면서부터는 머릿속에 수 천개의 생각이 날아다녔다.
퇴근후 평일에 공부한다는 게 쉽지 않구나, 일주일에 한 번인데도 부담이구나, 아홉시 넘기면 집중력 엄청 떨어지는구나, 내가 이걸 계속 해야할까? 그렇지만 이걸 하지 않는다면 이 시간에 내가 뭘 하고 있었을까, 술을 마시거나 침대에 누워있었겠지, 그렇다면 일주일에 한 번쯤을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게 확실히 더 낫지 않나, 그렇지만 이렇게 아홉시를 넘겨가면 극도의 피로함이 찾아오잖아, 2월달 강좌도 듣고 싶었는데 그건 신청하지 말까, 그렇지만 와서 공부하면 또 흥분되고 재미있잖아...등등.
아홉시 사십분을 넘기면서부터는 대박 스트레스가 찾아오고 이젠 화도 나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고 싶어.... 하아-
주경야독 힘들구나.
친구랑 그 시간에 끝나 후다닥 밥을 먹으러 식당을 찾고서는, 아,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공부 힘드네, 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친구도 나도, 그렇지만 이렇게 와서 들으면 너무 좋아, 라고도 얘기했다. 아아 우리의 삶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왜 같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노는 건 괜찮은데 공부하는 건 이다지도 극도의 피로함을 주는가...공부란 이렇게나 힘든 것인가..그동안 내가 공부를 안해봐서 몰랐어요....
이게 진짜 누가 시켜서 한 공부였으면 정말 화딱지 나서 어쩌지를 못했을 것 같은데, 내가 하고자 선택한 것이라서 그나마 나은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었고, 하면서 재미있다. 그래서 계속 하고 싶은데, 퇴근 후에 번개같이 날아가서 밥도 못 먹고 두 시간 이상을 앉아있는 거 너무 힘들다.... 그 두시간동안 계속 수업을 받아들이고 반응하고 하는 머리 쓰는 일들은, 아아, 벅차.... 음..... 앞으로는 그냥 예전처럼 혼자 책을 읽을까... 고민하게 된다. 어제 머리 너무 많이 썼어... 하아-
주경야독 힘들어요.
그렇지만 내 선택....
아침엔 어제의 피로함이 남은 탓인지 밥맛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침을 거를 수는 없는 법. 그래서 나는 오늘 아침 오랜만에 스벅에 들러 양파베이컨파니니.. 인가, 그거랑 아메리카노 먹었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망고 같은 남자가 조잘조잘 수다 떨면서 나를 웃겨 주고 있었다. 내가 이 강의를 들으러 간다고 하니 '지옥의 페미니스트가 되어서 돌아오라' 고 말하는 남자다.
어휴, 내가 신청한 강좌가 아직 네 번 더 남았고, 나는 2월달에 어떻게 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2월달 강좌도 땡기는데... 흐음..
일단 오늘은 퇴근 후에 술을 마셔야겠다. 어복쟁반 먹으러 가야징!! 피곤한데 신나네... Or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