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자이는 전교 1등의 학생이자 동시에 모든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인기인이다. 커징텅을 비롯한 반 남자아이들이 모두 션자이를 좋아한다. 늘 머리를 풀고 다니던 션쟈이가 머리를 묶고 왔을 때, 남자아이들 모두 그 빛나는 외모에 넋을 잃는다. 공부를 잘하는 남자아이도, 말썽장이 남자 아이도, 유치한 남자아이도 모두 션자이를 좋아한다. 그런데 션자이는 어쩐일인지 공부를 못하고 유치한 커징텅에게 관심이 쏠리고, 너는 왜그렇게 공부를 안하는 거냐며 커징텅의 공부를 봐준다. 덕분에 커징텅은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갈 수 있게 된다. '네가 나를 성적으로 앞서면 내가 니 소원을 들어주고, 내가 너를 앞서면 너는 머리를 묶고 와라' 고 약속했었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당연히 션자이가 이겼지만, 션자이는 머리를 묶고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션자이 머리 묶은 모습을 보고 다른 남자아이들 모두 넋을 잃었을 그 때, 거기, 머리를 묶어주길 바랐던 커징텅이 더 특별한 마음으로 션자이를 본다. 어? 자기가 이겨놓고도 왜 머리를 묶고 왔지? 다른 사람들은 알 수도 없는 이 비밀스런 일이 그들 사이에 생긴다.
그렇게 이들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같이 바다에 놀러갔는데, 그때 공부를 잘하는 남자 아이 하나가 션자이에게 묻는다.
-너는 유치한 거 싫어하지?
-응.
-우리중에서 누가 제일 유치해?
-커징텅.
평소 '유치해'를 비난조로 사용했던 션자이이기에, 모르는 사람이 저 대화를 듣는다면 아마도 '션자이는 커징텅을 싫어한다'고 오해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싫어하는 유치함을 잔뜩 가진 커징텅을, 션자이는 좋아하고 있다.
저 장면을 보다가 몇 해전의 내가 떠올랐다. 그 당시 나는 막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있었다. 연애인지 아닌지 헷갈릴 무렵이었는데, 어쨌든 나는 가슴속에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득 담고 있었더랬다. 그 와중에 그 전에 헤어진 전남친을 만나 저녁을 먹었다. 전남친은 내게 '요즘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었고, 나는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그의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라고 물었고, 나는, '잘난척을 잘해'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의 헤어진 전남친은,
"너 잘난척 하는 남자 정말 싫다고 했잖아!"
라며 다소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더라. 어? 내가 그랬던가? 나는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갸웃했는데, 전남친이 연달아 말했다. 내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면서, 잘난척을 일삼는 남자를 보며 싫다고 했다고... 아... 내가 그랬었지.... 그런데 나는 지금 내가 좋아하는 남자가 잘난척 한다고 말하고 있는..............
나는 잘난척하는 남자가 싫다고 하면서 지구에서 가장 잘난척을 잘하는 한 남자를 좋아하고 있었고, 션자이는 유치한 거 정말 싫다고 하면서 가장 유치한 커징텅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 좋아함이란 무엇인가...좋다는 건 뭔가........ 갑자기 그 생각도 난다. 그러니까 한 십오년도 넘은 일인데, 내가 이십대 중반이었을 때 삼십대 중반의 결혼한 언니가 그런 얘길 했었다. '내 남편은 모델처럼 날씬한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평생 바라왔고, 뚱뚱한 여자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나랑 결혼했어' 라고. 아.... 좋아함이란 무엇인가... 그 말을 하던 언니는 덩치가 꽤 큰 여자사람이었던 거다. 인생은 무엇인가. 고등학교 때 우리반에서 똑똑하기로 이름을 날린 아이가 수업시간에 무슨 발표를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는 에이포용지 열 장을 채울 수 있지만, 정작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 중에 하나도 매치가 안될 수가 있다'고. 크- 고등학생 때 이런 사실을 깨닫다니, 너무나 현명하지 않은가! 그래. 내가 어떤 타입을 좋다고 말하고 또 어떤 타입을 싫다고 말하는 건, 사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어떤 사람 앞에서 다 무너지고 만다. 그러니까 나는 한국의 션자이...(응?). 션자이, 당신은 유치한 남자가 싫지만 유치한 커징텅을 좋아하고, 나는 잘난척 하는 남자가 싫지만 잘난척하는 이 남자를 좋아했어요. 당신은 대만의 다락방, 나는 한국의 션자이.... =3=3=3=3=3=3=3=3=3=3=3=3=3=3=3
커징텅은 고등학생인데도 집에서 홀딱 벗고 다닌다. 내가 진짜 깜짝 놀란 장면인데, 커징텅의 아빠도 벗고 다닌단다. 그런데, 엄마는 옷을 다 입고 다닌다. 이건..뭐여..... 커징텅도 커징텅의 아빠도 엄마가 '옷 좀 입고 다니라' 하는데도 그냥 다녔는데, 만약 커징텅의 엄마가 홀딱 벗고 다녔다면 뭐라 했을까. '우리도 벗고 다니니 당신도 벗고 다녀.' 라고 했을까? 이런 쓸데 없는 생각을 그 장면을 보면서 했다.
커징텅은 자신이 언제나 자신감에 차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션자이 앞에서는 거절당할까 두려워한다.
크- 몇 번 언급했었는데, 예전에 정일우가 나오는 시트콤에서, 정일우는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인 서민정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선생님은 왜이렇게 저한테 힘이 세죠?
물리적인 힘이야 정일우가 더 셌고 또 시트콤의 설정은 정일우가 싸움도 잘하는 거였다. 그런데 좋아하는 서민정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사람이 되고야 만다.
커징텅은 그래서 두렵다.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지만, 션자이로부터 대답을 듣고 싶진 않다고 말한다. 대답을 듣고 나면 이 관계가 끝나버릴 수도 있으니까. 자기가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고서는, '이건 묻는 게 아니니까 대답하지 말라'고 한다. 좋아한다는 감정이 커서 말은 해야겠고,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 이 관계를 끝내기는 싫고. 만약 너를 좋아해, 라는 고백 앞에 '난 아니야' 를 듣는다거나,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어' 라는 걸 듣는다면, 그걸 알게된 이상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는거니까. 아아, 커징텅, 그때의 너는 얼마나 초조하고 두려웠니. 얼마나 자신의 약함을 실감했니.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보기엔 별 거 아닌 이유로 그들은 헤어진다. 그렇게 2년이 지났는데, 션자이가 학교를 다니는 타이베이에 지진이 일어나고, 커징텅은 션자이에게 전화를 해 안부를 묻는다. 너 괜찮아? 거기 여관도 무너졌다는데? 2년동안 연락도 없던 커징텅은, 2년 내내 션자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타이베이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는 순간 바로 션자이에게 전화를 하니까. 2년간 그들은 연락없이 지냈고, 네가 없는 사이에 나는 네 친구이자 내 친구인 누군가와 잠깐 사귀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헤어졌다고.
-왜 헤어졌어?
-걘 날 좋아하지 않았어.
-아니야, 걔가 널 얼마나 좋아했다고.
-누구도 너만큼 날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어.
크- 이것은 정말이지 평생 살면서 한 번도 오지 않을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아는' 일. 그리고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확신하는 일. 서로 사랑을 속삭이고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한다고 해도, 수시로 불안감은 찾아온다. 이 사람은 여전히 나를 사랑할까? 이 사람은 나를 얼마나 사랑할까? 이 사람 혹시 나한테 정떨어진 건 아닐까? 이 사람 혹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사랑은 언젠가 끝나지 않을까? 사랑을 한다고 속삭이는 와중에도 불안함은 슥슥 고개를 내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너만큼 날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어' 라고 알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 얼마나 행운인가! 앞으로 션자이가 다른 누구를 만나고 또 사랑을 한다고 해도, 이런 경험 만큼은 가슴 속에 깊게 간직하게 되지 않을까. 누군가로부터 오래, 깊이 사랑받았다는 느낌.
별 거 아닌 일로 그들이 서로 등졌을 때, 그래서 그 비가 오는데 서로에게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싸우며 돌아섰을 때, 그들은 서로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자 운다. 커징텅이 너무 엉엉 울어서,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가 유치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마음이 너무 찢어지게 아팠다. 헤어지고 우는 건 정말 너무 고통이야... 엉엉 우는 커징텅을 보는 것은 갑자기 나로 하여금 커징텅이 되게 했다. 아아, 나는 션자이가 되었다가 커징텅도 되었다가....
그 장면에서 [지붕뚫고 하이킥] 이란 오래된 시트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마지막회였는데, 신세경과 신신애가 떠나던 날, 고작 여덟살인 정해리는, 이 이별이 서러워 운다. 그때 나도 같이 울었는데, 나는 이 아이가, 고작 여덟살인 이 아이가 이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때문에 너무 아파서, 그 눈물이 너무 아파서 같이 울었다. 이별은, 성인에게도 힘든데, 이 나이 먹은 나도 아직 이별에 엉엉 우는데, 여덟살 아이가 정든 친구와 헤어지게 된다는 걸 대체 어떻게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너무 아플 것 같아서, 아, 쓰다가 또 눈물 날라 그러네 ㅠㅠ, 그 아이에게는 생애 처음 맞닥뜨릴 그 이별을 감당하기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 힘들고 아픈 걸 눈물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같이 울었다. 아, 진짜 이별하고 우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너무 고통이야...
션자이와 커징텅은 서로 좋아했고 또 친하게 지냈었는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헤어진다. 커징텅은 션자이에게 등을 보인다. 션자이는 커징텅의 등을 보면서 거기에 다가서지 못한다. 그냥 그때 뛰어가서 와락 안았으면, 그러면 다시 커징텅이 돌아서서 함께 안아주었을지 모르는데, 그런데 션자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 쉬어라, 청춘들이여.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좀 쉬어라.
겨울 휴관
무대에서 내려왔어 꽃을 내미네 빨간 장미 한 송이
참 예쁜 애구나 뒤에서 웃고 있는 남자 한때 무지 좋
아했던 사람 목사가 되었다 하네 이주 노동자들 모이
는 교회라지 하도 괴롭혀서 도망치더니 이렇게 되었
구나 하하하 그가 웃네 감격적인 해후야 비록 내가
낭송한 시라는 게 성직자에게 들려주긴 참 뭐한 거였
지만
우린 조금 걸었어 슬며시 그의 딸 손을 잡았네 뭐
가 이리 작고 부드러울까 장갑을 빼려다 그만두네 노
란 코트에 반짝거리는 머리띠 큰 눈동자는 내 눈을
닮았구나 이 애 엄마는 아마 모를 거야 근처 미술관
까지 차가운 저녁 바람 속을 걸어가네 휴관이라 적혀
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다가 헤어지려네 전화번호
라도 물어볼까 그가 나를 위해 기도할 거라 하네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서로 뜻밖의 사람이 되었어 넌 내 곁을 떠
나 붉게 물든 침대보 같은 석양으로 걸어가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서로를 등지고 뛰어갔던, 이라는 구절이 생각나서 이 시를 가져왔는데, 또 이 시를 다시 읽다보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네. 다른 여자랑 잠자겠지 나는 쉬겠네 그림을 걸지 않은 작은 미술관처럼....
내가 쉬긴 쉬겠지만,
다른 여자랑 잠자지마...
아아, 그나저나 이 영화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영화인데, 내가 비극으로 만들어버렸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쓰다보니 나의 의식의 흐름은 이 영화를 비극으로 만들어버렸어..... 자꾸 커징텅 울던 장면 생각나서 그래 ㅠㅠ
이 영화가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개봉관을 찾으려다가, 굿다운로더로 700원 밖에 안한다는 걸 알게됐다. 그래서 굿 다운로더로 봤다. 님들, 저의 패이버릿 《리틀 포레스트》는 굿다운로더 1,000원이고요, 이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굿 다운로더 700원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아, 《노팅힐》은 굿다운로더 소장 5,000원이지만, 소장가치 충분하니 같이 결제.......
아메리카노를 그란데 사이즈로 마시고 있는 수요일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