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읽은 '필립 로스'의 『유령 퇴장』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젊은 시절 4년을 살고(상대는 이미 나이들어 있었다), 그 후의 오십년간을 그 4년의 기억으로 버텨온 여자가 나온다. 영화 『루시아』에서 남자는, 어느날 우연히 바닷물속에서 섹스한 이름 모를 여자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가 없다. 새로운 여자가 생겨도 그랬다. 여자 역시 마찬가지, 애인이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이름 모를 남자와의 격렬한 물속의 섹스가 잊혀지지 않았고 그 날 밤으로 인해 임신도 해서 아이도 낳았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여자와 남자는 기차안에서 우연히 만나 꼬박 하루를 함께 지낸다. 함께 걸어다니고 이야기하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싹트게 되지만, 그들은 연락처를 주고 받지 않는다. 4년은, 하루에 비해 길긴하지만 어쨌든 이 모든 이야기들에서는 '단 한 번의 만남'이 아주 강렬한 영향을 미치고, 그 기억 혹은 그 상대를 도무지 지워낼 수 없다는 공통점들이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찾으려고만 하면 내가 예로 든 것 보다 더 많이 찾아낼 수 있다. 예전 이승환 노래중에 '남잔 첫사랑을 잊지 못한대~' 라는 가사가 나오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건 완전히 맞는 말도 아니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다. 첫사랑이어서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잊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 그건 첫사랑일 수도 있고 열일곱번째 사랑일 수도 있다. 그건 남자도 그렇고 여자도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그 누군가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가진채로, 그러나 저기 저 배꼽 밑으로 꼭꼭 숨긴 채로, 그렇게, 그런 일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일상을 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연애도 하고 이별도 하고 또 결혼도 하고.... 그러면서 살게 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가슴에 품었다면, 언젠가는 그게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것 같다. 영화 『루시아』에서 남자는 여자를 찾아가게 되고 비포 시리즈는 안봤지만 그들도 뭐 어떻게든 만나게 되지 않던가. 영화 『세렌디피티』도 마찬가지. 결혼한 상대가 있었음에도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를 찾기 위해 험난한 시간들을 보낸다. 이건 곁에 있는 사람한테 너무 상처가 되니, 누군가를 가슴에 품었다면, 그 가슴에 품은 사람과 결국은 함께하게 되는 것이 서로를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최선인 것 같다. 뭐, 사람일이 그렇게 내 생각대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아, 이런 얘기를 왜 했냐면, 최근에 읽는 책 역시 그런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루카는 6년전에 혼자 타이베이로 여행을 갔다가 단 하루, 남자대학생을 만나 안내를 받고 그 남자로부터 강한 기억을 받는다. 자신이 사는 나라 일본으로 돌아와 그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남자가 준 전화번호를 잃어버려서 연락할 수가 없다. 시간은 흘렀고 그녀는 직장을 다니고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그런데 회사 업무상 타이베이로 발령받게 되고, 그렇게 6년만에 타이베이로 다시 날아가게 된 것이다. 타이베이에서 보내는 시간이 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영어이름이 '에릭'이라던 그 남자를 만날 수가 없고, 가끔, 그 남자일지도 모르는 남자가 찍힌 신문기사의 사진을 오려낸 것을 들여다본다. 그러다 8년만에 그 남자의 소식을 직장 동료로부터 듣게되는데, 그가 일본에 있다는 것이다!!!!!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에릭 역시 그녀를 잊지 못했고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러던 중 고베지진이 발생해서 걱정되는 마음에 무작정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는 거다. 맙소사.....그렇다면 지금 그가 일본에 가 있는 까닭도, 어떻게든 우연히 그녀를 만나길 원하기 때문일까? 그 오래전의 단 하루의 만남, 그것이 하루카를 타이베이로 오게 하고 에릭을 일본으로 가게한 것일까?
아직 8년차 밖에 읽지 못했고 앞으로도 몇 년의 이야기다 더 남아있다. 나는 아직 책의 절반도 읽지 않았다. 그러니 8년차에 만나는지, 아니면 9년차, 10년차에 만나게 되는지, 만나긴 만나는지 알 수가 없다. 책 자체의 문체라든가 분위기 같은 건 내 취향이 아닌데,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흥미롭다. 만나라, 만나라, 만나라... 나는 자꾸 바라고 있는 것이다. 가슴 속에 품은 사람은, 만나야해! 왜, 일전에 가네시로 가즈키도 자신의 단편소설 <연애소설>에서 그랬잖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놓으면 안된다고!!
만.나.라.
만.나.라.
만.나.라. 라고 쓰는 순간 쟌다라 생각이 나는군.....쟌다라...
돈을 벌어야 된다. 돈을 벌어야 돼. 저렇게 가슴 속에 누군가를 품고 있는데, 그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은데, 근데 그 사람이 비행기 타고 가야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비행기 값을 벌어야 되잖아......게다가 간다고 만날지 못만날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잠잘 곳이 필요하고, 먹을 것도 사 먹어야 하고.... 역시 돈이 필요하다. 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데 돈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가..... 일단 그 사람을 만나면 비행기값 갚을게요, 만나지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비행기값을 먼저 내게 하진 말아요....라고 하면 비행기를 안태워주겠지.
내 머릿속엔 뭐가 들었을까?
갑자기 글 쓰다가 궁금해졌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직 에릭의 이야기가 나오질 않았다. 왜 일본에 갔는지, 결혼은 했는지 어땠는지... 하루카는 남자친구가 있는데 '아 졸 좋아!'의 느낌이 아니다. 이건..이럴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든다. 가슴 속에 누군가를 품은 채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거나 사귈 수는 있지만, 가슴 속에 누군가를 품은 채로 '아 졸 좋아 영혼이 찢겨나갈 것 같아' 하게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만약 누군가를 만났는데 진짜 너무 좋아서 미치고 팔짝 뛰겠다면, 가슴 속에 품은 누군가가 지워지게 된다. 사람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게 가능할 수 있지만, 그 사랑의 강도가 똑같기는 힘든 것 같다. 어느 한쪽에는 좀 애정이 덜간달까.. 어쨌든, 에릭은 일본에 가있고 하루카는 타이베이에 와있다. 각자의 나라에 있을 때도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은 서로의 나라에 가있어서 만나지 못했다. 이들이 만난다면, 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펼쳐갈까?
"고작 하루 타이베이에서 함께 지냈을 뿐이잖아. 그 후로 한 번도 못 만났어. 그런데도 왠지 서로에게 마음이 남았고 한쪽은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다른 한쪽은 일본에서 타이완으로 와서 일하잖아." (p.161)
회사 때려치고 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러 밖으로 나갈까, 하다가, 비행기값... 같은 거 모아두려면 돈은 벌어야 되고....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남의 연애 얘기에 내 돈벌이를 버릴 생각을 하지 말자, 라고 다시 결심을 굳히게 되는 것이다.
그나저나,
사주를 본다면 나의 4월엔 '립스틱운'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며칠 전 밤에 혼자서 술을 마시다가 취해서 티븨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오, 견미리가 화장품 홈쇼핑을 하고 있다. 그런데 피부가 완전 물광..이야. 게다가 가격도 저렴해! 저건 사야해! 하고 질러버렸다. 하나는 엄마 쓰라고 줘야지, 생각하면서. 다음날 점심 시간때쯤, 아아, 지금 쓰고 있는 팩트가 있는데........아직 많이 남았는데...........이건 과소비야 싶어서 전화를 걸어 주문을 취소하겠다고 했더니 이미 출고작업이 되었다며 반품을 하라는 거다. 음... 그냥 쓸게요, 했다. 그래서 어제 그 박스가 도착했는데, 사은품으로 주는 립스틱이 들어 있었다. 홈쇼핑 광고 할 때부터 립스틱 3종중에 색깔은 랜덤발송이라 했던 터라, 으으, 두근두근, 무슨 색깔일까, 궁금했더랬다. 그랬는데.... 하아-
오렌지... 가 왔다. 오렌지.... 오렌지.....
내가 살면서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는 색이며, 앞으로도 살 일이 없을거라 생각되는 색이며, 발라볼 욕망을 1도 느껴본 적이 없는 색인데....오렌지...........오렌지라니.............토마토 색깔 같은 거 올것이지...............
그렇게 실망을 했지만, 특유의 긍정적 성격이 발현된다. 부르르, 긍정적 생각이 나를 싸고돌며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다. 어차피 내가 내 돈주고 살 생각이 아니니 발라볼 일 없는 거였잖아, 그렇다면 이렇게 공짜로 주어졌을 때 발라보면 되잖아? 라고. 부르르.....내 온 몸을 싸고도는 긍정적 기운......
색깔은 오렌지와 다홍이 섞인 빛인데, 으음, 자, 한 번 발라보자!! 그렇게 나는 발라본 것이다.
사실 발색샷 찍으면서 그냥 아이폰 카메라로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wondercam 어플로 찍으니 이 어플이 자체 뽀샵을 해주는데 피부를 물광으로 만들어주고 눈동자 크게 만들어주고 잡티 다 없애주고 얼굴 턱선 깎아주기 때문에, 댓글들에서 피부 좋다..는 말이 자꾸 나오고...그것은 나의 양심에 너무 거리끼는 것이었다. 아아, 아닌데... 저건... 내 얼굴이 아닌데...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아이폰으로 찍었는데...하아- 도저히 못봐주겠는 거다. 삭제삭제. 다시 그냥 어플로..... 그렇게 찍은 발색샷!
색이 얌전하고 실제로 보면 저거보다 약간 찐하다. 발라보니 내 생각과 달리 너무나 잘 어울리고 편한 거다. 회사 동료1도 보고는 '너무나 잘어울린다'며 호들갑 떨었고, 다른 부서의 동료2는 나를 보자마자 립스틱 색이 너무 예뻐요~ 한다. 아...나는 어떤 색을 사도 상관없겠다. 뭘 발라도 다 잘어울려!! 그래서 동료에게 말했다. 난 왜 다 잘어울리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아무 색이나 바르기만 하면 다 어울려, 다!!!!!!!!!!!!
최근에 헤어진 애인은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뭐, 그 전에 헤어진 애인도 나보다 어렸지만.. 음.. 나에겐 연하의 남자를 유혹하는 치명적인 매력같은 게 있나? 어쨌든 이 애인은 나보다 어린데 심지어 동안이라서, 간혹 이십대로 오해받기도 하더라. 나는 동안도 아닌데다 그보다 나이도 많았던 터라, 뭐랄까, 좀 신경 쓰였더랬다. 지금이라도 좀 관리를 해줘야 되지 않을까... 나이 많은 게 티나더라도 이모뻘로 보일순 없지 않나, 싶어서, 생애 처음으로 아이크림을 샀었다. 고가의 아이크림.... 그간 아이크림을 발라온 적이 없었고, 선물 받거나 샘플을 받게 되면 죄다 엄마를 줬더랬다. 아이크림은 나와는 아주 상관없는 아이템 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젊은 남자를 만나(응?) 처음으로!! 눈가 관리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서, 백화점에 가, 고가의 아이크림을 질러버렸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이왕 사는 거, 나이 들어 시작하는거니 좋은 걸로 사자!!
해서 사서 쓰고 있었는데, 이 아이크림을 이제 다썼다.
펌핑해도 더이상 나오지 않는 아이크림을 손에 쥐고 여러가지로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거 비싼데...다시 사야하나......라고 생각하다가, 이제 그만두자, 했다. 부질없어..아이크림 쓴다고 갑자기 내가 동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사실 이거 발랐다고 눈가가 환해지거나 한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리고 이제 연하의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걍 말자. 그 돈으로 스테이크나 사먹자. 인생......
오늘은 동료직원과 오후에 간식으로 할라피뇨와퍼를 먹기로 약속했다.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