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루시아』에서 여자는 남자와 이별을 한 후에 혼자 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간다. 그녀는 '빠에야'를 달라고 식당 직원에게 말하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빠에야는 2인부터 주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애인하고 헤어진 것도 서러운데 먹고 싶은 건 둘이 와야 먹을 수 있다니. 너무해. 그녀는 운다. 빠에야를 먹을 수 없어 운다. 애인하고 헤어지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그가 과거의 여자를 잊지 못했다는 걸 그녀가 몰랐다면, 그녀와 그가 여전히 다정한 애인이라면, 그렇다면 둘이서 사이좋게 빠에야를 먹을 수 있을텐데. 애인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하는 감정을 나눌 사람이 없다거나 섹스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거나 하는 문제로만 끝나지가 않는다. 애인이 없다는 건, 먹고 싶은 걸 먹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루시아에게 빠에야를 1인분만 해서 팔란 말이다, 식당들아!!!!!
(아..근데 나 진짜 글 잘 쓰는 것 같다. 뭐랄까. 키보드에 손만 가져다대면 생각지도 못했던 글들이 막 튀어나와.. 나는 글 쓰는 천재.... 내 글은 손이 쓴다........)
'파스칼 키냐르'의 『신비한 결속』도입부 에서 '클레르'는 친척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혼자서 고향을 찾다가 배가 고파 혼자 식당에 들어간다. 그런데 식당 주인이 탐탁지 않아 한다. 그 장면을 읽는데 영화 『루시아』 생각이 나더라. 여자 혼자 식당을 간다→ 생각대로 순조롭게 잘 먹을 수가 없다의 과정으로 진행되면 나는 그냥 루시아 자동연상...
클레르는 평생 한 남자만 '진정으로' 사랑했다. 아니 방점은 '사랑했다'에 찍히는 거라고 봐야겠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었지만, 결혼한 남자도, 자신의 아이들도 사랑하지 않은 채로 그들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는 어릴 적에 그가 사랑했던 '시몽'을 찾아왔고, 사십육세에 다시, 시몽과 사랑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얼마 가지 않아 끝나버리고 만다. 이미 아내가 있던 시몽은 아내와 아이들을 떠날 수 없었고, 그렇게 클레르에게 헤어짐을 말한다. 클레르는 절망한다. 절망 정도가 아니다. 아, 클레르...
아니 근데, 사십육세에도, 사십칠세에도 사랑 때문에 울고 절망해야 한다면... 세상은 뭐지..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이 들어도 사랑 때문에 힘들 수가 있단 말인가. 사십세쯤 되면 사랑하나 잃었다고 우는 건 그만해야 되잖아,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사십 오세를 넘어가도 또 울고...그렇게 육십에도 울고 칠십에도 울고..그러는건가... 어쨌든 그녀는 사십육세에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절망을 하고...그리고 죽을때까지 평생, 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생 그를 그리워한다. 그를 그리워하며 그녀는 일도 손에서 놓고 먹는 것도 마다한다. 그녀는 하루에 열 시간 이상을 걷는다. 계속 걷는다. 그녀가 부지깽이처럼 말라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그녀는 눈만 뜨면 일어나 걷고 걷고 또 걷고 먹는 건 마다하고 또 걷고 계속 걷고 가끔 바닷물에 얼굴을 박고 그 물을 마시고 걷고 또 걷고 잘 때만 집에 들어온다. 그녀에게서는 이제 자연 모든 것들의 냄새가 난다. 아아, 여자여... 어느 부분에서의 클레르가 나 같았다. 물론 열시간 이상을 걷고 일도 팽개치도 식음도 팽개치는 부분에서는 절대 나같지 않고. 다른 부분에서는 나 같았는데, 그걸 언급하고 싶진 않다. 어쨌든,
사람에겐 누구나 그런 존재가 있는 것 같다. 결코 자신의 삶에서 아웃시킬 수 없는 존재. 필연적으로 맺어진 인연인 가족이 아니라, 완전한 타인이었음에도, 인생의 어느 시점에 만나고 헤어져도, 내 삶의 축에 늘 부재로 존재하는, 그런 존재. 클레르에겐 시몽이 그랬다. 시몽과 헤어지고난 후에도 늘 시몽의 뒤를 좇았고, 시몽을 바라봤다. 시몽이 퇴근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시몽도 그걸 알고 있었다. 클레르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시몽이 죽고난 뒤에도 클레르의 삶에는 계속 시몽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자신의 옆에 살거나 숨쉬는 게 아님에도, 그녀의 인생엔 언제나 시몽이 있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잊혀지거나 하는, 그런 게 아닌 사람. '이디스 워튼'은 자신의 소설 『순수의 시대』에서 '마음 속 성소'라는 표현을 썼었는데, 부재의 존재는 마음 속 성소에 그 사람을 두었다는 표현과 같은 뜻인 것 같다.
그 후로 그들 사이에 더는 연락이 없었다. 그는 자기 마음속에 일종의 성소(聖所)를 만들어 놓고 비밀스러운 생각과 열망가운데 그녀를 간직해 두었다. 그곳은 조금씩 그의 진짜 삶이자 이성이 활동하는 유일한 장이 되어 갔다.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민음사, p.324)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숱한 사람들과 새로운 만남을 갖고 헤어지고 또 누군가와는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성소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누군가를 간직하며 살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대상은 언젠가부터 입밖으로 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사람이겠지만, 클레르에게 그 대상이 시몽이었음은, 클레르가 살고 있는 곳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 나는 걷고 또 걷고 계속 걷는 클레르를 알고 이해한다. 어떤 절망은 그렇게 계속 걷게 만드는 거다.
걷고
또 걷고
계속 걷고...
그가 가는 곳에 나도 가리라.
그가 사는 곳에 나도 머물겠노라.
그가 죽는 곳에 나도 묻히리라.
「룻기」 (파스칼 키냐르, 『신비한 결속』에서 재인용)
누나의 눈이 갑자기 반짝이면, 시몽과 관련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였다. 시몽을 생각할 때만 얼굴에서 빛이 났다. 그토록 그를 생각하기 때문에 누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p.123)
하지만 그 역시, 바위들 위로 걸어 다니는 그녀를 바다에서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헤매고 다니며 자신을 지켜보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하루 온종일 시간대별로 그녀를 눈으로 뒤쫓았다. 누나도 마찬가지로 바다에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다가 지겨운데도 낚시를 하는 척하고, 제자리에서 맴돌고,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맺어지길 원치 않는 그를. (p.156)
"하느님께서 슬퍼하십니다. 슬프다고 하느님 당신께서 말씀하셨어요. Tristis est anima mea(내 마음이 슬프도다). 그런데 단지 슬픔만을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죽고 싶을 만큼 삶에 환멸을 느낀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너무나 슬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 마음이 죽고 싶을 정도로 슬프도다.`" (p.261)
그녀가 건방지고 냉담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오직 한 남자만을 사랑하는 까닭에 어느 누구의 비위도 맞추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에게도 곁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시몽을 사랑하므로 오직 그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했다는 뜻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들의 스토리를 쭉 지켜본 내 말을 믿어도 좋다. 그녀는 본질적으로 거의 처녀였다. 오직 한 가지 명분, 즉 시몽에 대한 사랑만이 그녀의 삶에 동기를 부여햇다.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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