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는 제법 쌀쌀해 긴팔 가디건을 걸치고 집에서 나온다. 오늘은 따뜻한 녹차라떼를 마시고 싶어서 회사 앞에 있는 스벅에 들러 동료의 것까지 두유넣은 녹차라떼 두 잔을 주문했다. 주문한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는데, 음료를 만드는 바리스타의 팔에 압박붕대 비슷한 게 감겨있더라. 자주 방문했던 매장이라 좀 안면이 있어서일까, 나는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팔 다치셨나봐요.
그러다 바리스타는 아뇨, 염증이에요, 팔을 많이 쓰니까요, 하더라. 그래서 나는 직업병이군요, 라고 되돌렸더니 바리스타는 네, 라고 하고 이내 덧붙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음료를 만들 수 있어서 행복해요.
아. 게다가 이 말을 하면서 씨익- 웃는 게 아닌가. 나는 그녀의 그 말과 웃음이 너무나 좋아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버렸다. 몇 시까지 근무해요? 물으니 연장하지 않으면 바리스타는 다섯시간 근무해요, 라고 말하더라. 나는 예쁘게 웃는 바리스타가 내민 녹차라떼를 받아들고는 사무실에 왔다. 그리고 책장을 뒤졌다. 제발 독서공감아, 한 권 남아있어라, 하고. 책장을 열자마다 딱- 보이더라. 냉큼 꺼내서는 오늘 날짜와 나의 이름을 적고는, 한 줄 덧붙였다.
웃는 모습이 좋았어요.
라고.
이따 점심 시간에 가서 줄까 하다가 시간을 따져보니 어쩌면 퇴근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동료에게 말한 뒤, 테이크아웃 포장해줬던 쇼핑백에 독서공감을 넣어 까페로 향했다. 아까는 음료를 만들고 있던 직원이 지금은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있었다. 줄을 서서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책을 꺼낸 빈 쇼핑백을 그녀에게 돌려주며 '이거 다시 쓰세요' 했다. 그리고는 연달아 책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선물이에요, 라고. 책을 받아든 직원은 '저요?' 묻는다. 네, 그거 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했더니, 정말요? 저요? 또 묻는다. 그래서 네, 하고 웃었더니, 내가 준 책을 가슴에 꼭 안고는
고맙습니다, 아 감동이에요, 아 정말 저요?
하는 거다. 아....정말 좋아한다. 이 사람은 정말 좋아해. 멋지다. 뭔가 책을 주는 게 쓸데없는 짓이 될 수도 있었는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책을 품에 안았어! 크- 좋다. 좋구나. 멋지다. 행복하다. ㅠㅠ 그녀는 분명 자신의 일에서 나름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음료를 만들 수 있어서 행복해요, 라는 말이 그저 손님에게 건네는 멘트였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녀가 자신의 일 자체에서 행복을 느낀다면, 그 일이 주는 부수적인 것들에서도 행복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를테면 간혹 안면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책 선물을 받는, 그런 일들 말이다.
대학시절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을 때, 그건 아마도 내가 매력적인 탓이 크겠지만, 나는 거래처 사람들로부터도 또, 자주 방문하는 손님들로부터도 아주 많은 것들을 받았다. 어떤 남자사람은 영화표를 주면서 저녁을 먹자고 하기도 했다. 책을 선물해준 손님도 있었고, 자기 마실 거 사면서 내 것도 사주는 손님들도 있었다. 필리핀 대사관에서 근무한다던 외국인은 나 보러 종종 왔고, 일식집에서 일하는 여자사람은 나를 자신이 일하는 식당에 데려가 돈까스와 우동을 준 뒤에, 자기 식당에서 알바를 해주면 안되겠냐고 했다. 편의점보다 돈 더준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거래처 사장중 한 명은 편의점 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놓치지 말라고도 했고, 중학생 남자아이들과 일요일마다 수다 떨기도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첫 직장은 출판사였고 고급 다이어리를 만드는 곳이었는데, 바쁜 겨울에는 나도 개인영업을 돕기도 했다. 그때 부산에 사는 한 나이 많은 고객은 전화해서는, 나는 너한테만 물건을 살것이며, 너가 언제든 부산에 내려오면 편히 묵고가게 해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고객들이 콕 집어 나를 찾아 물건을 주문한다고 말할 때는 온몸가득 짜릿함이 몰려오기도 했다. 이 과정들에서 연애 또한 부수적인 즐거움이었.....................
각설하고,
암튼 그래서 오늘 아침은 기분이 좋았다는 거다. 헷 :)
어제는 여자동료1과 치킨에 소주를 마셨다. 여자동료1은 자신의 여자친구 얘길 해주었다.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의 폭언에 시달린다는 것. 남자는 여자에게 못생기고 무능력하고 아무도 너를 좋아하지 않는다, 는 등의 말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너한테는 나밖에 없다'는 말을 한다는 거였다. 내가 참 어이가 없어서...아니, 그런 여자를 왜 사귀는거지? 자기말대로 그녀가 못생기고 무능력하고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그럴 사람이라면, 왜 자기가 사귀고 있냐는 말이다. 대체 왜 자기가 사귀는 사람에 대해 그렇게 가치를 뚝 떨어뜨리는 일을 하는 걸까? 나는 동료에게 '그녀는 왜 그에게 헤어지자고 하지 않아?'라고 물으니, 헤어지자고 하면 남자가 무릎 꿇고 빈다는 거다. 제발 헤어지자고 하지 말라고,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하아-
이건 무슨 새로운 형태의 병신출현..인가.
아, 다른 사람의 애인에게 병신이라고 해서 심히 미안하다만, 그런 남자가 병신 같음을 도무지 부인할 수가 없다. 나로서는 진짜... 받아들일 수가 없어.
나는 그렇다. 멋진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 싶다. 옷도 깔끔하게 입고 예의와 매너를 갖추고 생각이 깊은, 그런 남자를 사귀고 싶다. 어디에 내놔도 움츠러들지 않을, 자신감 있는 남자를 애인으로 곁에 두고싶다. 나는 결코 못생기고 능력도 없고 자신감도 없어서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그런 남자를 애인으로 두고 싶지 않다. 내가 내 가치를 높이산다면, 내가 사랑하고 옆에 있도록 허락할 사람에 대해서도 높은 가치를 부여해야 하지 않는가? 형편없는 사람을 애인으로 둔다는 건, 나 스스로가 형편없다는 것 아닌가? 왜 그토록 형편없는 여자를 옆에 두면서 자존감을 낮추려하고, 그러면서도 헤어지는 건 거부하는거지?
그러다 이번호 시사인에서 이런 글을 봤다. 마침, 이번호 시사인의 굵은 표제가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 이었다. 천관율 기자의 글이다.
(사진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진화심리학에 대해 나는 잘은 모르지만, '여성의 가치를 줄여 잡아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도구'가 학대라는 것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갈까봐 불안한 심리 때문에 그러는건가, 라고 생각하면서, 참 못났다...싶다.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아도 옆에 있게 할 방법은 많은데, 어쩜 써도 그런 방법을 쓰냐.
내 옆에 있는 너는 멋지고 찬란하고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라고 가치를 높인다면, 그 말을 듣는 상대 역시 자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면서, 나에 대해 이렇게 제대로 봐주는 사람 옆에 있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맨 오른 쪽에, '남성들의 머릿속에는 연애 시장에서 협상력이 딸릴 때에는 여성의 자긍심을 손상시키라는 전략이 내장되어 있는지 모른다'는 말은 듣기에 좋지 않다. 나는 '남성들의' 머릿속에 그런 것이 내장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어떤' 남성들의 그런 속성이 발현되는 것일 뿐. 상대의 가치를 절하하는 것은 남자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남성의 시선에 갇힌 여자들도 마찬가지, 여자의 가치를 남성의 시선으로 평가하고, 그래서 '개념있는' 여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남성들이 볼 때'라는 전제를 담아 실현하려 한다. 일전에 올렸던 나에 대한 악플중에 '남성들이 보면 비호감일거다' 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저런 글을 쓰는(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내가 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호감을 줄걸? 게다가 저런 글을 쓰는 사람을 좋아하는 주변인들이라면, 나 역시도 거부한다. 나는 나 스스로 개념있고 똑똑한 사람, 약자의 편에 서는 사람이고 싶지, '누군가가 봤을 때' 개념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살지는 않는다. 누군가에게 호감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살지도 않는다. 나는 나 자신으로 살면서, 그런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옆에 두고 싶고, 이런 내가 '다른 이들에게 비호감으로 보일까' 걱정하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다고 믿는다.
위에서 말한 그 여자친구는 자신의 남자친구에게 말했다고 한다. 너 그렇게 자꾸 내 자존감 깎아내리며 내 가격을 후려치기 하고싶은가본데, 나는 잘 알아, 어디 나가서 내가 모자라거나 못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내 자존감은 결코 내려가지 않아, 라고 했단다. 크- 브라보!
내 방의 책장을 보면 안읽은 책이 정말이지 어마어마하게 많다. 아마도 알라디너라면 나같은 사람이 많을텐데, 그렇게 안읽은 책이 쌓여있어도 오오 읽을 책이 없어 새로 사야겠네, 이러면서 또 사게 된다. 그런데 어제는 문득 책장을 둘러보다가 읽지 않은 책들의 제목들을 훑으면서, 아 이거 당장 읽고 싶다, 하는 게 너무나 많은 게 아닌가! 다 내가 읽고 싶어서 산 책들이었다. 아, 다 읽고 싶다. 이것들 모두를 다 읽고싶다, 하면서 뭔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되는 거다. 크- 페미니즘에 대한 책도 사둔 게 몇 권 더 있고, 소설을 비롯하여 최근에는 인문서적을 사둔 것도 많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읽고싶다. 다 읽고, 알고, 감상하고, 생각하고 싶다!! 저 시사인에 인용된 《이웃집 살인마》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최근에 알라딘에서 감은빛님과 별족님이 논쟁하신 핵문제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고싶다 생각한 차에, 어제는 마립간님의 핵에 관련된 포스팅을 보고, 아, 이것도 알고 싶다, 공부하고 싶다, 하는 생각이 샘솟는거다. 그렇지만 마립간님이 포스팅하신 책은 어쩐지 좀 어려워보이고 또 너무 두껍고...그래서 쉬워 보이는 책들을 찾아보고 또 아무개님으로부터 추천도 받았다.
그렇지만...장바구니에 넣어두고는 보류했다. 사도...아마 안읽을거야. 또 공부하고 싶은 생각만 가진 채 책장 어딘가에 쑤셔박아놓겠지 ㅠㅠ 또 안읽은 책들에 추가하게 되겠지... ㅠㅠ
칠드런 액트를 읽고부터 뭔가 다 읽고싶어지는 마음이 생긴 것 같다. 그 책을 읽는 동안 생각하고 고민하고 감동했던 것들이 잊혀지지 않아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내게 이런 마음, 이런 생각을 하게 해준 게 소설이라는 게 또 너무 좋다.
어제는 나보다 어린 친구와 대화를 하던중에, 그 친구의 드립을 내가 알아먹지 못해 아, 이것이 세대차이인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그때 친구가 말했다. 이런 거 몰라도 돼, 너는 이런거 모르는 대신에 나에게 칠드런 액트의 줄거리를 얘기해주고 감동포인트를 얘기해주잖아, 라는 게 아닌가. 크- 좋다. 힛.
그렇게, 나는 또 장바구니에 책을 몇 권 더 추가했다. 시사인을 보니 《동사의 맛》은 아주 감칠맛 나는 책일 것 같다. 신간을 검색하다가《어떤 날들》을 보고 '앤드루 포터'? 아..아는데 누구더라, 하고 무심히 넘겼는데 갑자기 뽝-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하고 깨달음이 오는 게 아닌가. 내, 그렇다면 읽으리라!!《어느 날 서점 주인이 되었습니다》는 내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었는데, 아른님이 '다니엘 글라타우어가' 나온다고 언급해주셨다. 아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이 책의 저자는 다니엘 글라타우어랑 지인이란다. 아, 나도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지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다!! 《오베라는 남자》도 표지보고 안끌렸는데, 앤의다락방님의 인용문을 보고는 냉큼 장바구니로 슝- 넣었다. 크- 세상엔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아!! 내일쯤엔 이 중에 많은 것들을 덜어내고 몇 권만 골라 또 지르게 되겠지...인생이란 끊임없는 책지름의 반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