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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ㅣ 우리 시대의 질문 2
윤보라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5년 7월
평점 :
나는 엄마에게 '많이 이상해진 딸'이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었다. 여러가지 '이상한' 딸의 징후를 보여왔고 그런 말을 들었지만, 최근엔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엄마와 나는 '동거'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엄마는 동거에 대해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내가 실질적으로 동거를 할 수도 있음을 피력하자 갑자기 '그건 안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만약 동거를 하다가 남자랑 헤어졌을 경우 망쳐지는 건 여자인 내가 되기 때문이란 거다. 임신이라도 하면 어쩌냐, 라고 했고 임신하지 않게 조심하면 되지, 라고 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무얼 두려워하는지.
결국 엄마는 그 말을 했다. '결혼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남자랑 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안되는 거라고.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되물었다.
엄마, 그러면 내가 칠십살까지 결혼하지 않을거면, 칠십살까지 처녀로 늙어 죽어야돼, 성관계 한 번도 안하고?
엄마는 그래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엄마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엄마는 여태 그런 식의 사고를 교육 받았고,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엄마의 생각과 달랐다. 그래서 말했다.
엄마, 내가 왜 그래야 해? 나 결혼 안해도 남자랑 사귀면서 잘거야. 남자랑 자는 기쁨이나 쾌락 같은 거 포기하면서 살진 않을거야. 엄마도 남자들이 결혼 전에 잔다는 건 알잖아, 근데 나는 왜 그러면 안돼?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너 어쩌다가 그렇게 이상해졌'냐고.
나는 그렇게 '이상한 딸'이 되어버렸다.
언제까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오랜 시간을 나 역시 '아빠'와 '선생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세상을 보는 눈, 사회를 보는 눈, 모든 눈들이 아빠와 선생님에게 맞춰져 있었다. 아빠와 선생님의 말은 옳으며, 그러므로 그 말은 나의 사고와 판단의 잣대가 되었다. 아빠가 욕하는 정치는 욕먹을 정치이고, 선생님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나쁜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더 쉽게 얘기하자면, 아빠가 데모하는 대학생을 빨갱이라고 말하면, 나는 그들이 정말 빨갱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나는 '아빠와 선생님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고, 그러자 과거에 내가 했던 말들 내가 내렸던 판단들이 머릿속에 하나씩 둘씩 떠올랐다. 어떤 것들은 조금 후회되었지만,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절망스러울 만큼 어리석은 말과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가슴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내가 얼마나 잘못된 눈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했었는지, 이건 너무 늦게 알아서 야속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아빠 엄마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다른 식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방향에서 보면 아빠 엄마가 맞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이럴때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붉혀야 했고, 그때마다 나는 아빠로부터 '빨갱이'란 말을 들어야 했다. 나는 아빠에게는 빨갱이 딸이 되었고, 엄마에게는 '이상한' 딸이 되었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남동생을 빨갱이로 선동한 딸이 되어있기까지 했다.
여성학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면서 또 친구들과 대화를 하면서 나의 어릴 적의 발언들과 판단들이 자꾸 떠올라 괴로웠다. 그때, 내가 어렸다고 해도 해서는 안될 것들을 너무 많이 해버린 것 같아 스스로가 미웠다. 여성비하의 수많은 말들 속에 나 역시 있었다. 이제라도 다른 식으로 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려다가, 이 책에서 '루인'의 글을 읽고 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루인'은 이 책에서 <혐오는 무엇을 하는가;트랜스젠더퀴어, 바이섹슈얼 그리고 혐오 아카이브>란 글을 썼는데, 이 책을 통틀어 나로 하여금 가장 당황하게 만든 글이다. 이 편에서 루인은 말한다. 성소수자들 사이에서 양성애자가 동성애자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이게 내게는 무척이나 놀라웠는데, 우선 내가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거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놀랐고, 그 다음에는 내가 어쩌면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놀랐다. 그간 여성학 글들을 보며 내 과거를 반성했고, 또한 내가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루인의 글을 읽으니 정신이 번쩍 드는거다. 아, 어쩌면 나는 지금도 뭔가를 잘못하고 있을지 모르고, 잘못된 시선으로 보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또 시간이 흐르면 지금의 어떤 말이나 행동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하고.
1990년대 초부터 양성애 단체와 활동가, 개개인은 '바이/양'의 의미가 남성과 여성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설명했다. 크루즈가 지적했듯 "접두사 바이/양은 남자와 여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이섹슈얼리소스센터가 설명하듯 "'바이섹슈얼'에서 '바이/양'은 남자와 여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같은 젠더에 끌림과 우리 자신과 다른 젠더에 끌림을 지칭한다.(Bisexual Resource Center, "Way Beyond the Binary," www.biresource.net/waybeyondthebinary.shtml)" 《바이모임, 바이섹슈얼(양성애) 웹진》의 이브리는 바이섹슈얼을 여성과 남성으로만 제약하고 이 두 젠더와의 관계로 환원하는 태도가 오히려 바이섹슈얼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이브리, 「바이섹슈얼을 위한 나쁜 가짜 커밍아웃 가이드 2」,《바이모임, 바이섹슈얼(양성애) 웹진》1,2014,bimoim.tistory.com/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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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와 동성애는 한 사람이 일평생을 오직 한 종류의 젠더와만 낭만적,성적 관계를 맺을 것을 가정한다. 하지만 양성애는 이런 가정에 부합하지 않으며 낭만적, 성적 관계가 배타적으로 어느 한 젠더와만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 질서'가 아니라 사회적 금기이자 규범이란 점을 강하게 주장한다. 이 측면은 바이섹슈얼이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배제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혐오는 무엇을 하는가, 루인, p.200-201)
그러자 주춤, 멈칫하게 되더라.
과거의 어떤 것들이 끊임없이 떠올라 후회된다면, 지금도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 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내가 혹여라도 어떤 말을 함으로써, 혹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누군가에게 또 상처를 주거나 할퀴고 있진 않을까. 그걸 막기 위해서는 어떤 말도, 어떤 행동도 해서는 안되는 게 아닐까. 내가 차별 발언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내가 비하 발언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폭력적인 말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머릿속에 여러가지 생각들이 소용돌이쳤다.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후엔, 최종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다, 말해야 한다.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 행동해야만 잘못된 걸 바로잡을 수 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면, 잘못 말하여지는 것들이 있다면, 바깥으로 드러내야 고쳐질 수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차별하고 싶지 않고 폭력적이고 싶지 않지만, 나도 모르게 만약 어떤 것들을 저지르고 있다면, 그것은 바깥으로 드러나야 해결이 될 것이다.
이 책이 백프로 만족을 주는 좋은 책은 아니었다.
일단 정희진의 글은 잘 읽히는 데, 나머지 다섯 편에 대해서는 개념적이라고 해야하나? 그래서 술술 읽히지 않는 거다. 그러나 읽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된다. 최소한 내가 과거를 반성하는 것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지금은 어떤가?하는 생각도 동시에 하게 만들었으니까.
다 읽고나서 밑줄 그은 부분들을 다시 읽어보다가 유독 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최근에 무딘 칼을 휘두르고 있다는 표현을 들은 터라 확 눈에 들어온 것 같다.
성별,인종,계급, 지식 자원 등에서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이미 지배 담론과 매체에 포섭되어 있다. 당연히 설득력이 떨어지고, 오해받고, '말더듬이 바보'에, 흥분하거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약자였던 집단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이들에게 요구한다. 너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세련되고, 우아하게 말하라고. 동시에, 네 주장은 시기상조이며 말하는 너의 존재가 무섭다고, 우리는 펜을 쓰는데 너희는 칼을 쓴다고 비난한다. 여성이나 유색인종이 그들의 시각이 반영된 언어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불쾌해한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못 알아듣는다는 점이다.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 정희진, p.106-107)
나는 칼을 휘둘렀나? 나는 휘두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상대가 칼에 맞았다고 한다면 나는 칼을 휘두른 게 되는가? 그러므로 나는 칼을 쓴건가? 내가 진정, 칼을 휘두른건가? 내가 칼을 쥐고 있나? 혹여 칼을 쥐고 있다고 해도 나는 그 칼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내 눈에는 내가 손에 든 칼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빨갱이이고, 이상한 딸이고, 칼을 휘두르고 있나?
현재로서는 이 모두에 대한 답이 '그렇다' 여도, 내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혐오의 정치는 사회문제의 원인을 미움받는 특정 집단으로 돌리는 마녀사냥의 정치이기도 하다. 혐오의 시대에 성소수자들은 출산율 저하와 에이즈 확산부터 국가 안보 위기, 심지어 건강보험료 인상의 주범으로서 가정,사회,국가를 위협한다고 지목된다. 이주민 혐오나 여성 혐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이주민은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지역을 더럽히고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으로 매도당한다. 여성들은 특혜와 보호를 받으면서도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김치녀'로 비하된다. 경제위기와 불평등의 심화 속에서 지배자들은 복지를 축소하고 노동시장 구조를 개악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제물로 삼아 위기를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이런 현실이 양산하는 불평등과 불안은 혐오가 자라나는 토양이다. 극단적인 경쟁만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인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 민주주의와 인권 보장이 필요하다는 합의는 형식적인 수준일지라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p.235-236)
나는 정말이지, 여자들이 무슨 특혜를 그렇게나 받고 있다는 건지, 여자들 특혜 얘기 나올때마다 어리둥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