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생과 조카 얘기를 많이 한다. 아마도 같은 마음으로 조카를 바라보는 입장에 있어서 그런지, 조카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지겹다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제자식 자랑을 타인에게 하면 상대는 듣기 싫을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조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만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다.
최근에는 함께 뼈찜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면서, 우리가 나중에 조카가 큰 다음에 함께 술을 마실 수 있을까? 하는 얘기들을 했다. 그러고싶다, 고. 조카가 술 마실 나이가 되면 내 나이가 오십대 중반이겠지만 ㅠㅠ 남동생은 오십대 초반이겠지만, 그래도 함께 마시면 좋지 않을까. 물론 조카가 좋아하느냐는 ... 모르겠다만.
조카는 나이를 먹고 자라고 나는 지금 그대로 있다면 더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여러차례 하게된다. 내가 지금 이 감성으로 좀 더 자란 조카를 만날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러면 조카가 자라면서 겪는 일들, 고민들과 생각들을 함께 해주기에 더 수월하지 않을까. 진로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을 하게 될까, 나는 그런 조카에게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지금은 그저 '들어주기만' 하는 걸로도 족하겠지 싶지만, 어쩌면 조카에게 영향을 줄 좋은 조언을 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조카가 자라면서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내 방의 책장을 잊지 않고 찾아줬으면 좋겠다. 이모, 내가 어떤 책을 읽을까? 라고 물었을 때 내가 책장에서 몇 권 빼내어 주고 싶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조카가 내 방 책장 앞에 서서는, 제스스로 책을 골라 읽을 수 있게 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다 읽고나서는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
어제는 하릴없이, 조카가 꼭 읽었으면 하는 책들엔 어떤 게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이었다.
이 책은 조카가 이십대 중반이 지난 다음에 읽었으면 좋겠다. 그때쯤 조카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 지 모르겠지만, 나처럼 이 책을 처음 만나고서는 이게 뭐야, 하며 놀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조카가 혹독한 사랑을 앓고난 후거나 앓는 중이라면, 이 책만큼 마음을 반영해주는 책이 또 어디있을까. 사랑에 빠진 자신의 마음이 너무 지랄스럽게 느껴져서 어쩔 줄을 모를 때, 사랑에 빠졌다면 지랄스러운 게 제대로 된거야, 라면서 이 책을 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혹은, 이 책을 읽고나서 조카가 내게 말할 수도 있겠다. 이모, 내 지랄스러운 마음이,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해주네, 이 책이.
나는 사랑에 빠진 조카의 지랄스러운 마음에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안나 카레니나》는 언제쯤 읽으면 좋을까?
이 책을 나는, 멀리 사는 J 와 함께 읽었다. 우린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 책을 읽다가 밑줄을 공유하고 생각과 감상을 공유했다. 만약 조카가 이 책을 읽게된다면, 그때 나도 다시 읽고 싶다. 그래서 조카랑 이건 어때, 어느 부분이 좋았니, 하면서 대화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혹시 내 조카도 이 책을 읽고 '그냥 불륜소설' 이라고 말하게될까? 모든 걸 사랑에 다 걸었다가 처참하게 자기를 내던진 여자의 마음을, 조카도 들여다보게 될까? 조카가 내 책장에서 이 책을 꺼내어가면, 나는 서점으로 달려가 이 책을 또 사서 읽기 시작해야겠다. 아니 그때쯤이면 나는 '달려갈' 수는 없는, 그런 육체의 상태가 되어있으려나?
줌파 라히리의 책과 이디스 워튼의 책도 조카가 읽었으면 좋겠다. 작가로 권한다면 기꺼이 줌파 라히리와 이디스 워튼을 권하게 될것 같다. 조카야, 줌파 라히리랑 이디스 워튼을 읽어보렴.
《이선 프롬》에서의 사랑의 시작 그 떨림과 기울어가는 사랑의 그 쓸쓸함을 알게해주고 싶다. 사랑이 어느 순간, 이런식으로 변해버리기도 해. 줌파 라히리가 들려준 결혼하고자 한 이유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싶다. '모든 걸 바로잡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라니.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도 읽게 해주고 싶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완벽한 충족을 느끼기는 쉽지 않아. 우리는 다른 식의 포지션으로 다른 관계를 맺을 사람들이 필요해. 내 안의 충족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는 거야. 이 사람에겐 이런 부분을, 저 사람에겐 저런 부분을 말이야. 그렇지만 만약 네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면,
쉿,
그걸 네 안의 비밀로써 잘 지켜나가렴.
다른 사람들은 너의 그런 생각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그렇지만 분명, 너처럼 생각하고 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단다.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도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도, 조카가 추천을 바란다면 책장에서 빼내어 주고 싶다. 《레미제라블》과 《웃는 남자》도 물론. 존 쿳시는 조카가 좀 힘들어할까? 로맹 가리를 나처럼 좋아하게 될까? 단편을 잠깐 읽고 가고 싶다고 한다면 '이승우'의 <고산지대>를 펼쳐줘야지. 조카야, 소름돋지 않니? 하면서.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모르지만, 직업을 가진 조카에게는 버트란드 러셀을 읽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린 모두 네 시간씩만 일하면서 살아야 해, 그러면 모든 게 다 해결될것 같지 않니? 사랑이란 걸 부질없다 느껴 도망가려 한다면, 조용히《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를 내밀어야겠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언제쯤 읽으면 좋을까? 《차일드 44》도 읽으라고 건네야지. '앤 타일러'도 읽어보라고 해야겠다.
아아,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끝도 없이 책의 목록이 나올 것 같아.
조카야 무럭무럭 자라라. 이모가 술도 사주고 책도 같이 읽고 그럴게.
그렇지만 이 모든 게 조카가 원하지 않으면 다 부질없지.......조카는 어른이 되었을 때, 제 옆에 이모가 있다는 걸 늘 염두에 둘까? 아님 내가 지금 고모나 작은아버지를 대하듯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존재로 여기게 될까? 내가 이모를 생각하듯이, 어릴때 내게 잘해줬지, 하게 될까?
나는 너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있을까?
아, 오전이 다갔다. 곤드레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