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수가 없잖아!
아.. 이 치명적인 오타라니!
(알라딘 리뷰대회 응모에 체크를 하긴 했는데, 이 책은 그 무슨 탑텐 도서가 아니므로 응모가 안되는건가? 되든 안되든 일단 나는 상금에 눈이 멀었으므로 체크를 해보기로 한다. 앞으로도 계속 해야지.)
저 위에 먼댓글 두 개를 따라가보면 정말이지 '치명적인' 오타에 대한 사례를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모두 '톰 롭 스미스'의 책에 대한 것인데, 하아- 오늘, 어찌하여 이러는가, 혹시 같은 출판사인가 싶어 확인해보니 두 권다 노블마인 이었다. 후-
톰 롭 스미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거 아닙니까, 여러분?
게다가 이 책, 《얼음 속의 소녀들》은 이것 말고도 오타가 툭툭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나는 까다로운 독자가 아니며 관대한 독자에 속하기에(응?), 뭐 오타쯤이야,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거다. 대개는 그렇다. 나는 까다로운 독자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지만, 톰 롭 스미스의 책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오타가 이렇게 자꾸만... ㅠㅠ 하아- 님들하, 신경좀 써주셈. 이 책을 얼마나 진지하게 읽어야 하는데, 진지하게 읽고 있었는데, 여자가 새로 이주한 마을에서 고립되어가고 혼자만이 그걸 눈치채가는 그 날카롭고 예민한 상황에서 자지....란 말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면, 책 속에 들어가서 그녀가 되어있던 나는 갑자기 책 바깥으로 퉁- 하고 튕겨져 나오는 겁니다. 에? 아시겠어요? 에?
그렇지만 뭐, 계속 읽도록 하겠습니다.
엄마는 가방의 앞주머니에서 검은색 가죽 장정을 한, 20년 전에 유행했던 종류의 수첩을 하나 꺼냈다. 그 안에 서류며 사진, 잘라낸 종잇조각 들이 들어 있었다.
원래는 내 생각을 적어놓으려고 샀던 것이 지금까지 산 물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돼버렸다. 이걸 넘겨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메모가 점점 더 많아진 걸 볼 수 있을 거야. 4월에 적은 페이지들을 확인해봐. 내가 농장에 처음 도착한 때 말이다. 그때는 가끔 끼적거린 정도지. 그것하고 석 달 뒤에 쓴 걸 비교해봐. 7월엔 줄마다 빽빽하게 적혀 있잖이. 이 수첩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밝히려고 애썼던 나만의 방식이다. 이게 내 동반자이자 수사 파트너가 됐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건, 여기에 사건들이 일어난 당시, 혹은 불과 몇 시간 후에 그 일들을 적어놨어. 수첩에 적힌 잉크의 시간 변화를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경찰의 과학 수사도 내 주장을 뒷받침해줄 거다. (p.44-45)
2015년도 다이어리를 작년 10월부터 사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더랬다. 해마다 스타벅스의 다이어리를 스티커 교환으로 받아 썼는데(아, 산 적도 있다), 질이 그다지 좋지 못해서 반년도 채우지 못하고 껍질과 내용물이 툭, 분리되어 버리더라. 그래서 이번해에는 그냥 다른 좋은 걸 사고 싶었다. 그러다 읽었던 책, 《둘런과 모리스의 컬렉션》에서 보고 무척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다이어리, <스미슨 오브 본드 스트리트>를 검색해봤다. 국내에서는 판매하지 않고 외국 사이트를 통해 구해야 했다. 한번 돈 들여서 사볼까? 했지만 40유로가 넘는 돈을 차마..결제할 수가 없더라. 게다가 배송료도 붙잖아. 하아- 그래서 문구점에 가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다이어리를 찾아보았다. 언제나 소지할 것이니 '작고 가벼울 것'을 충족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데일리나 위클리는 굳이 필요가 없었고, 먼쓸리만 있으면 되었다. 그렇게 찾아낸 9천원 짜리의 다이어리를 사서는 참지 못하고 11월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먼쓸리는 12월부터 있었는데, 걍 썼다. 이런 일에 인내심 같은걸 발휘하고 싶지 않았어...그리고 간혹 거기에 일기를 썼다. 그랬더니 제기랄, 아직 1월 초인데...다이어리가 1/3 밖에 남지 않은거다...하아- 어쩌지...다시 한 권 더 살까...그렇지만...그간 다이어리를 써왔던 걸 보면 사실, 초에 반짝 쓰고 좀 지나면 안쓰게 되던데...작년 다이어리도 아주 많이 훤- 한데. 흐음. 미리 샀다가 엿먹겠지? 그치만...앞으로 쓸 게 많아질 수도 있잖아? 흐음.....
이런 고민을 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차에, 저 위에 인용문을 이 책에서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사지 말자. 사지 말고 나중에 다 쓰면, 다 썼는데 일기를 계속 쓰고 싶으면, 나도 빈 공간을 빽빽하게 작게 채워가면서 쓰자. 어차피 나만 볼 거고 나만 읽을 거니까. 아, 그런데 금방 다 쓸것 같다. 엊그제도 앉아서 딱 한 줄 쓰려다가 세 장을 써버렸어... ㅠㅠ
여튼, 저 책을 다 읽었는데, 하아- 이런 내용인 줄 몰랐어서...우울했다. 내가 톰 롭 스미스의 책을 또 읽은 것은, 전에 읽었던 그의 책 《차일드 44》가 무척 좋았기 때문이다. 주인공 레오가 자신의 틀 안에 자신의 정의대로 살고 있다가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걸 인지하며 변화하는 모습, 성장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고 결국 어떻게든 여전히 정의롭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어제 오전에 시청한 《서프라이즈》에서는, 미국에서 한 어린 아이가 아빠를 잃은 사연을 SNS 로 접한 사람들이, 그 아이의 바람대로 모두 현관에 불을 켜두는 사연이 소개됐는데, 그걸 보면서도 남동생에게 나는 말했었다. 사람들은, 참 의외의 곳에서 한없이 착해. 쓸데없고 사소하게 느껴지지만, 참 착해, 라고. 여튼 이 책, 《얼음 속의 소녀들》은 흥미롭게 읽었지만, 《차일드 44》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책 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다보니, 차일드 44의 시리즈가 두 권쯤 더 나올 예정이란다. 오호라. 이건 무척이나 기대되는 일이다.
이 책 속에서 아버지는 어머니가 미쳤다고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범죄자라고 하는데, 이 관계가 깨어지는 걸 본 아들과 어머니의 대화가 훅- 들어왔다.
"지금 우리 관계에 대해 물어보는 거니?"
"40년 동안 함께한 세월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무너질 순 없어요."
"그보다 더 짧은 시간에도 파탄날 수 있어. 넌 지금 안정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거야, 다니엘. 넌 항상 그랬지. 내가 말해주마.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굳은 우정도 하룻밤 사이에 쓸려가버릴 수 있고, 연인도 단 한 번의 잘못을 시인했다가 적으로 변한단다." (p.183)
나 역시 동의한다. 40년은 긴 세월이다. 40년간 둘 사이에 어떤 신뢰와 어떤 애정이 그 관계의 바탕이 됐다한들, 그것은 한 마디 말로 와르르 무너질 수 있다. 이게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물론 그 사이가 틀어진다한들 좋아했었던 시간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 때때로 좋은 기억들이 찾아와 부지불식간에 괴롭히겠지만, 그러나 그 기억들만으로 붙들지 못할, 파탄날 만한 일들이 둘 사이에 존재한다면, 그 관계는 어쩔 수가 없다. 40년이 아니라 전생부터 이어져온 400년 혹은 4,000년의 관계라해도,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다. 나는 상대가 누구든, 치명적이라 생각하는 한 가지를 맞닥뜨렸을 때 관계를 끊은 적이 있다. 한 번은 깊지 않은 관계라 그다지 고민이 없었고, 다른 하나는 무척 좋아했던 사람이라 마음이 아팠다. 굳은 우정도 하룻밤 사이에 쓸려가버릴 수 있고, 연인도 단 한 번의 잘못을 시인했다가 적으로 변한다, 는 틸데의 말은, 그러므로, 옳다. 관계의 유지는 그러므로, 신뢰와 애정 이외의 다른 것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건 노력일 것이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일 테다. 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계속, 오래, 무너뜨리지 않은 채 유지하고 싶다면, 애를 써야 하는 것일 테다. 어찌됐든 40년간의 관계가 무너지는 걸 보는 건, 슬픈 일이다. 그 당사자들은 아마 더 슬프겠지만. 그건 분명 지옥이겠지.
이 인용문에 대해 오늘 아침 정식이와 대화를 나누는데, 정식이는 내게 친구와의 오랜 인연을 자기는 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말하길 자기 친구들은 모두 침착하고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하는거다. 이 말을 들음과 동시에 나는 어? 나는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데, 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식이는 내게 말했다. 유일한 예외가 다락방이라고 ㅋㅋㅋㅋㅋㅋ나는 초흥분녀 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진심으로 화났을 때 말고는 진짜 사소한 일에도 흥분하는 스타일이라 ㅋㅋㅋㅋㅋㅋㅋ 차분해져야지, 나도.
또 틸데는 옆집 사는 하칸의 부부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엘리세는 하칸의 여자였어. 하지만 하칸은 엘리세의 남자가 아니었던 거지. (p.245)
이건 진짜 너무 아픈 문장이라서, 슬픔이 폭풍치듯 밀려와서, 완전 슬픔이 쓰나미로 닥쳐와서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기로 하겠다. 조낸 싸대기를 후려 갈기는 문장이다. 뭔지 너무 알겠다. 하아-
며칠전에 B 는 내게 2015년에는 책장에 사두고 안읽은 책을 다 읽는 걸 목표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했는데, 나는 그걸 지킬 수 없다고 했다. 대신 나는 내 돈을 주고 책을 사지 않는 걸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마일리지나 적립금, 광고료로 책을 주문하고 또한 중고샵에 책을 팔아서 들어오는 예치금으로 책을 주문하는 거다. 그 외에 내 통장에서 돈을 써가며 책을 주문 하지는 않는 걸로. 이렇게 하면 책을 사는 게 확 줄어들고, 더불어 사둔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한 것. 그래서 좋다, 하고 쇼부를 쳤는데, 아 글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너무 읽고 싶은거다!!! 그 한 권만 주문을 하고 싶은데 마일리지와 적립금을 합쳐도 턱없이 모자라고, 일단 알라딘에서 주문하려면 오만원 이상은 해야 머그컵이라도 받던가 하니까, 또한,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당장' 받아 읽을 수가 없으니까 어쩔까, 하다가, 그래, 내가 내 통장에서 돈 빼서 책을 사는 건, 암묵적으로 알라딘 주문을 말한 거니까, 오프라인에서 한 권만 사자!!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면 '당장' 읽을 수 있고, '한 권만' 사는 게 가능하고, 뭐, 내 돈주고 '주문'한 건 아니잖아? 내 보기에 이건 '똑똑한' 결론이다. 조낸 스마트하다. 뭐랄까, 나는 정말이지 문제 해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것 같다. 해결하고자 생각하면 반드시 해결을 하고 마는 능력녀인 것이다. 조낸 멋져. 머리 열나 좋아. 이것이 문제다, 를 인식하는 순간 재빨리 해결 방법을 찾아낸다, 나는!!!!! 굳!!!!!
여튼 토요일에는 외출해서 영화 《마미》를 보고, 사당역의 반디앤루니스로 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을 샀다.
이십대 중반에 읽었던 이 소설에서 내가 기억하는 건 꽤 한정적이었다. 지극히 일부였다. '공개적으로 변한 사랑은 무게를 더한다'는 말과, '당신의 힘을 왜 내게 사용하지 않죠?' 하고 묻던 것. 이 두 가지 모두 '사비나'의 말로 기억하고 있는데, 그 기억이 정확한지는 더 읽어봐야 알겠다. 또한, 고등학생때 보았던 영화 《불멸의 연인》을 떠올렸던 것도 기억한다. 영화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이 진정 사랑한 여자를 찾아내는 내용이었는데, 나중에 그가 사랑한 여인이 동생의 아내인 걸로 밝혀지면서, 베토벤이 죽어가는 순간 그녀에게 필담으로 묻는다. '그래야만 했나?' 라고. 그러자 여자는 '그래야만 했어요' 라고 역시 필담으로 답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래야만 했나'는 문장이 나왔고, 그때 그 영화를 떠올렸던 기억이 나는 거다. 며칠전에 이 책에 대해 우연히 B 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가 이 책의 서로 다른 부분들을 각자 인상깊게 읽었다는 걸 알게 됐다. 뭐, 당연하겠지만. 그러자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내가 가진 책은 오래전에 팔아서 다시 사야 했던 거다. 그래서 다시 읽는데, 오, 완전 재밌다!!!!!!!!!!!!!!!!!!!!!!!!!!!
나는 쿤데라의 소설을 몇 권 읽었고, 아직까지 베스트는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쩌면 이 책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읽으면서 했다. 아직 몇 장 못 읽었는데 와, 진짜 초재미있음. 게다가 테레자 에게 감정 이입 조낸 되는거다. 토마시는 여러 여자들과 연애를 하고 그걸 즐기고 싶기 때문에 그들과 텀을 유지한다. 또한 여자의 집에 가서 섹스를 하고 오는 걸 더 편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침대에서 여자를 '재우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든 여자들에게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자신의 집에서 자지 못하게 하는데, 여기에 예외가 테레자였다. 테레자는 마침 그를 찾아온 날 아팠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의 침대에서 '재우게'된 것. 혹여라도 테레자가 이걸 계기로 자신의 집에 얹혀 살게 될까봐 그는 테레자에게 집을 구해준다. 그러나 그 둘은 사랑하게 되고, 테레자는 토마시가 여러 여자를 만난다는 걸 알게 된다. 뭐, 이건 모를 수가 없겠지. 그리고 이게 테레자는 몹시 괴롭다. 그가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섹스한다는 사실이. 테레자는 토마시에게 '그러지마' 라고 말하는 대신, 매일 슬픈 꿈을 꾼다. 꿈에서 테레자는 많은 여자들 때문에 늘 괴롭다. 아..불쌍해.. ㅠㅠ 씨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늘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계속 읽었다. 테레자가 토마시를 맞닥 뜨렸을 때 배가 아팠던 장면이 나왔다.
그녀가 처음 토마시의 아파트 문턱을 넘었을 때 그녀의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났다. 기차를 타기 전 늦은 아침에 플랫폼에서 먹은 샌드위치를 제외하곤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았기에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토록 자기 육체를 등한시하다간 쉽게 육체의 희생자가 되는 법이다. 토마시와 마주 선 그 순간 자기 배가 발언권을 행사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황담함이란! 그녀는 거의 울음보가 터지려 했다. (p.69)
아, 너무나 끔찍하다. 세상은 이토록 잔인해. 아니, 내 육체가 이토록 나한테 잔인하다니. 그러나 쿤데라가 말하지 않는가. 자기 육체를 등한시하다간 쉽게 육체의 희생자가 되는 법이라고. 그러니 끼니를 잊지 말고 챙겨먹자!!
인간은 신체의 모든 부분에 이름을 붙이고 난 후부터 육체에 덜 불안해했다. 또한 이제는 영혼이란 뇌의 피질부 활동에 불과하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영혼과 육체의 이원성은 과학 전문용어에 가렸고 오늘날에는 그저 싱거운 웃음을 자아내는, 시대에 뒤떨어진 편견에 불과하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친 듯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창자가 내는 꾸르륵 소리를 한번 듣기만 한다면, 영혼과 육체의 단일성, 과학 시대의 서정적 환상은 단번에 깨지고 말 것이다. (p.72)
아! 이 부분을 읽는데 나는 coldplay 의 노래, <scientist>가 생각났다. 그래서 유튭에서 찾아 들었다.
http://youtu.be/EdBym7kv2IM
와- 너무 행복했다. 지하철 안은 조용했다. 아무도 크게 음악을 틀지 않았고 아무도 통화하지 않았다. 나는 앉아 있었고,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책을 읽다가 기억을 떠올리고 음악을 떠올리고, 이어폰을 꽂아 그 음악을 찾아 듣고. 이 모든 순간순간이 정말 좋았다. 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보면 나는 항상 출근길을 좋아했다. 나만의 세계라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다. 책을 읽고 느끼고 생각하고 연결되는 것들을 떠올리는 이 순간이, 내가 이룬 내 세상, 나만의 세계였다. 이걸 좀 더 지속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종점이 어디든 거기에 다다를때까지 이 순간을 연장할 수 있다면! 그러나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고, 이 행복한 시간은 금세 끝났다. 바로 양재역이어서 내려야 했던 것. 아, 아쉬워라. 출근하기 위해 일어나야 하는 시간,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잠드는 시간들은 결코 좋지 않지만, 지하철 안에서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내는 시간들은 무척 좋다. 아무도 없는 동굴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도 든다.
내 친구 J 는, 항상 내게 더 구체적으로 자세히 말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앞뒤 다 잘라먹고 툭, 내 마음만 말해도 그저 거기에 맞는 답을 해준다. 토요일 늦은밤, 상심한 마음을 나는 J 에게 건넸다. 힘들다는 내 말에 J 는 이렇게 답을 보내왔다.
<전 사람은 자신의 깊이만큼 괴로워한다고 생각해요.>
앞뒤 다 잘라먹은 내 말에 저렇게 적절한 대응을 해주는 사람이 내 친구다. 이렇게 대응해줄 수 있는 친구는 J 밖에는 없다. 나는 그걸 알기 때문에 그 순간 J 를 떠올리고 말을 건넬수 있었던 것이다. J 의 저 말에, 나는 내 깊이를 보았다. 내가 너무 깊어서 그렇구나, 내가 너무 깊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 힘들었고 힘들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였다. 내가 너무 깊은 걸.
지난주에는 한 알라디너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자가 아닌 전화가. 어? 하며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그 분은 내게 아픈건 괜찮으냐 물으셨다. 페이퍼 읽다가 아프다는 말에 끝까지 읽지도 않고 안부를 묻는다고. 이 뜻밖의 안부전화는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라, 나는 전화 걸어주셔서 감사하다고 진심으로 인사했다(평소의 나는 전화통화를 싫어한다). 그리고 나 다 나았다고도 했다. 그러자 그 분은 전화를 끊기 전에 갖고 싶은 책 있으면 말하라고 하셨다.
언니가 책 사줄게요.
라고 하시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완전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괜찮다고, 말씀만으로도 고맙다고 했다.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갖고 싶은 책은 내가 사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내게 있다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뭐 이렇게 복을 받았냐, 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뭐 갖고 싶으니 사달라고 말하는 스타일은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 같지만, 저렇게 말해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좋았다. 나는 복받은 사람 ♡
며칠전에는 오래전에 받은 이별선물을(ㅠㅠ) 오랜만에 꺼내보았다. 나는 그것이 책장 맨 아래에 있는 서랍에 들어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꺼내본 선물은 예뻤다.
너무 예뻐서 책장에 꺼내어두고 있을까, 저렇게 펼쳐둘까, 하다가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조카...가 오면 분명히 예뻐서 가져간다고 할텐데, 그럴때 내가 안된다고 박박 우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그렇지만 이걸 조카에게 주고 싶진 않아......그래서 다시 고이 접어 있던 곳에 두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다가 '우연에 의한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졌는데, 페이퍼가 너무 길어지니 이건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다. 제목은 아마도 '몇 번의 우연으로 우리는 여기에 이르렀을까' 쯤이 될 것 같다. 암튼 완전 재밌다, 이 책.
아침에, 연애가 끝난 친구와 잠깐 대화를 나눴다. 우린 결론을 내렸다. 연애는 해도 힘들고 끝내도 힘들다고. 그리고 또, 빌어먹을..이라고 했다. 조만간 치맥이나 하자, 친구야. 나도 빌어먹을 너도 빌어먹을, 우리 모두 젠장맞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