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외로움
신문에서 이 책의 소개를 봤을 때 그 내용도 궁금했지만, 그 후에 책 표지를 보고 더 궁금해졌었다. 책 띠지의 작가 얼굴이 엄청난 훈남이었으므로. 크- 부드럽고 젠틀하며 섬세할 듯한 저 얼굴이 확- 끌어당긴거다. 그래서 이 책을 샀는데, 책 표지를 펼치고 난 후에 나온 작가 사진은 띠지와 좀 ... 좀 많이 ..... 다르더라. 뭐 어쨌든.
책 속의 노인은 부유하다. 집안 살림을 도와주는 도우미가 있고, 그 도우미에게 넉넉한 월급을 줄 수 있을 정도의 형편이며, 집에 눈이 쌓이면 인부를 불러 눈을 치울 수 있는 사람이다. 집 안에 커다란 욕조도 있고 모조품이지만 훌륭한 명화도 몇 점 진열되어 있다. 일전에 회사를 운영했으며, 지금은 자식들에게 그 회사를 물려주었다. 그 자식들이 가끔 노인을 찾는 건, 아직 그가 가지고 있는 돈 때문이다.
부유해서인지 그는 고급진 음식을 잘 먹는다. 스테이크는 말할 것도 없고 오이스프 같은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스프를 직접 만들어 먹기도 한다. 메론을 가지고도 뭘 하던데, 그 요리들의 이름은 내가 기억을 못하겠고. 어쨌든 마을의 어떤 젊은 미혼모를 좋아하고 있는 그는, 그녀를 초대해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고 근사한 요리를 만든다. 그러나 약속시간에 그녀가 늦어 만들어둔 요리가 흐물흐물해졌다. 대신, 배고 고프다고 말하는 그녀를 위해, 노인은 간단히 명란젓 오차즈케를 만든다.
명란젓 오차즈케는 먹어본 적이 없고, 생각만 해도 사실 그다지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요리가 아닌데, 노인이 만드는 걸 읽고 상상하노라니, 이 세상 가장 따뜻한 음식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음식의 실제 온도와는 상관없이, 지금 배고픈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낸 요리이니까.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명란젓 오차즈케는, 입 안 가득 풍미를 줄 것이고, 식도를 데워줄 것이며 뱃속에 안착해 온 몸에 따뜻한 온기를 쭉쭉 전달하지 않을까.
명란젓 오차즈케를 인터넷 검색해서 찾아봤는데, 책에서 노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요리인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봤자 내가 하면 어마무시한 어떤 것이 되겠지만...그러다 일드 [심야식당]의 캡쳐 장면 속의 사진을 보게되었으므로, 출처가 표시되어 있는 그 사진을 가져와보도록 하겠다.
아, 언젠가 한 번 맛보고 싶어졌다. 누군가 내게 명란젓 오차즈케를 만들어준다면,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사실 명란젓..싫은데.... -0-
나는 내가 먹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에도 아주 관심이 많다. 다른 사람이 손수 차린 밥상을 들여다보는 일이 내게는 아주 큰 기쁨이다. 그들이 차려낸 상이 육덕진 고기로 가득한 게 아니라도, 나는 그 상 위에 놓여진 것이 그 무엇이라도 좋다. 쭉쭉 찢어 먹을 수 있는 포기김치여도 좋고 무말랭이 하나만 반찬으로 둔 채 밥 한 공기를 담아둔 상을 보는 것도 좋다. 족발과 보쌈이 놓여진 상도 물론 좋지만, 오이와 당근을 먹기 좋게 잘라 쌈장 옆에 둔 상을 보는 것도 행복하다. 수북하게 담은 물기 있는 상추를 보는 것도 흡족하며, 물 말은 밥에 오이지만 있는 상이어도 좋다. 그가 차린 밥상이 무엇이든, 누군가의 밥상을 들여다보는 일은 내게 기쁨이다. 아, 저 사람은 저렇게 잘 먹고 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나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몫을 충실히 살며, 자기를 자기가 챙길 수 있기를 원한다.
지난 주말 남동생은 [나는 자연인이다]를 보면서 맥주를 마시는 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녀석을 보는 게 매우 좋았다. 내가 언제 행복한지를 아는 것, 내가 언제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내가 언제 행복한지 내가 아는데, 거기에 간섭을 하는 것이 싫다. 내가 찾아낸 내 방법에 대해서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너를 생각해서', '너를 위해서' 라는 말로 내 행복을 그만 두라고 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먹는 일이 즐겁고, 누군가 잘 먹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즐겁다. 다른 사람의 밥상을 확인하는 일은, 그 사람의 생에 대한 의지를 보는 것 같아 즐겁기도 하다. 아, 이 사람은 이렇게 먹고 있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선택한 음식들로 또 한 끼를 지내는 일들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진다. 피자와 콜라를 본다고 해서 그게 나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고, 유기농 야채가 가득하다고 해서 그게 더 건강하게 느껴진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이 먹을 혹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는 밥상을 차린 그 자체로 행복해지는 거다.
그런 나는 인간 자체에 대해 관심이 많은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런 것일게다. 일전에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친구가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너는 엄마를 딸로써 보는 게 아니라 인간대 인간으로 보고 있다'고. 어제 미숙이랑 대화중에 미숙이는 후배를 생각하는 '언니 마음'에 대해 얘기했는데, 나는 '언니 마음'이 되어 후배에게 '그런 남자 만나지말라'고 조언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에게는 언니 마음, 누나 마음 같은게 절대적으로 부족하구나. 아니, 아예 그런 게 없는 것 같다. 나는 그저 그 사람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고 그 사람이 겪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구나. 나쁜 남자를 만나서 상처를 받는 게 나쁜걸까, 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오는거다. 받아라, 뭐 어때. 순진하다, 상처받기 쉽다, 고 해서 나쁜(남자인 듯한)남자를 피하는 것이 살아가는 지혜이고 안전일까, 를 생각해보니 나로서는 '아니'라는 답이 나오는거다. 언제까지 순진한 채로 살 수도 없고, 언제까지 상처를 에둘러 갈 수도 없으니까. 자기 사랑, 자기 상처는 모두 자기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원래 이런 성향의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늙어가면서 바뀐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딸의 마음' 이나 '언니 마음' 같은 건 없는 것 같다. 이것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인거다. 언니 마음이 되어 누군가에게 조언할 수도 없는 사람이며, 언니 마음으로 누가 나에게 조언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인 듯하다. 내가 인간대 인간으로 대하듯 인간대 인간으로 나를 대하는 것을 나는 환영하는 것 같다.
음..그래서 내가 언니들하고 별로 안친한가? 언니란 호칭은 내 여동생이 나를 부를 때 말고는 다 별로인 듯.
다시 음식 얘기로 돌아가자면, 그러므로 나도 누군가를 위해 명란젓 오차즈케를 만들어주고 싶다. 아마 나는 내가 요리를 진짜 못하기 때문에, 요리 병신 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요리에 정신을 잃고 매혹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이 음식으로 온 몸 전체가 따뜻해지기를, 맛있어서 기뻐하기를, 꾹꾹 눌러 담긴 나의 애정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요리를 하고 싶다. 그 요리는 무엇이면 좋을까. 꼭 명란젓 오차즈케 일 필요는 없으니 무언가 다른 요리를 생각해봐야 겠다. 다락방 표 특제 김치찌개 라든가, 음...... 버터된장찌개...???
제기랄. 버거킹의 갈릭스테이크 버거가 먹고 싶다..아침부터..
이제 이 책을 읽어야겠다 싶어 책을 펼쳤다가, 나는 이런 긴 헌사를 만나게 된다.
내가 난생 처음 연애편지를 보낸 사람은 당신이었지요. 이 책 역시 당신에게 보내요. 당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서죠. 앤소니, 당신은 내가 아무 거리낌 없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나의 가장 충실한 청취자, 그리고 나의 영원한 사랑이에요.
신형철의 신간 소식에 흥분했다가, 그의 헌사에 대한 소식을 듣고 신형철이 시시해졌었다. 친구의 말을 빌자면 '만원짜리 청첩장'을 내가 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를 내 마음대로 생각했구나, 라고 내 눈에 덮인 콩꺼풀이 떨어진 느낌이었다고 하면 될까. 그래놓고 왜 벨 훅스의 이 서문을 가만히 한참을 들여다보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노골적인 애정의 표현을.
'내가 난생 처음 연애편지를 보낸 사람은 당신이었지요' 라는 문장이 자꾸 밟혔다. 나는 누구에게 보냈지? 라고 생각하다가 이내 약간 아쉬워졌다. 그때는 보낼만했으니 보낸 것이고, 나는 그때의 감정에 충실한 거였지만, 지금 와서 저 헌사를 들여다보노라니 '아, 나의 첫 연애편지가 그에게 향한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첫 연애편지를 그에게 보낼 순 없었으니, 이런 식의 찐한 헌사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보지만, 역시 이렇듯 노골적이고 아름다운 애정을 과시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난, 그저 수줍은 여자...( ")
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정말이지 갈릭스테이크버거가 너무 먹고 싶은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버거킹은 사무실에서 먼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그냥 막 뛰쳐나가서 우적우적 먹고 들어올까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내가 그래도 될까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조낸 먹고싶다 진짜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눈앞에 갈릭스테이크버거가 막 둥둥 떠다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오늘 나의 배경음악은 '심규선'의 <신이 그를 사랑해>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