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요즘.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루에 열두번도 넘게 하며 바로 실행에 옮길것처럼 안달하다가 꾹 참아가며 퇴근시간을 맞이하고는 한다. 퇴사후의 일들을 생각해보는 게 하루 일과중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게 그렇게 나쁠것 같지 않아 이제 직장생활을 접자, 싶어지는거다. 일단 중간정산을 두 번이나 했으니 최종적으로 받게될 퇴직금이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퇴직금을 받으면 3-4개월 정도는 퇴직금으로 생활이 가능할테니, 그 시간동안은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쉬는건 어떨까. 그간 나는 너무 열심히 일하지 않았나, 하는거다.
그러나 그 '쉬는' 3-4개월동안, 나는 백프로 안정을 찾고 편안할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쉴 수 있을까? 다시 취업해야 한다는 압박감, 아무곳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을거라는 초조함 때문에 오히려 더 발을 동동 구르며 지내게 되는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내 친구의 조언처럼 다시 나를 받아줄 회사를 알아본 뒤 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걸까? 아니, 그렇다면 이 회사를 그만둘 필요가 무어람, 나는 직장생활 자체를 이제 끝장내고 싶은건데. 어차피 직장생활을 할거라면, 게다가 스펙 이란것도 내게 없다면, 그렇다면 그냥 다니던 직장 계속 다니는 게 재태크 아닌가 말이다. 이러면 또다시 결론은 다음날 아침 변함없이 출근이다.
내가 직장생활을 그만둔다면 뭘 하며 살수있을까. 뭘해야 먹고 살 수 있을까. 지금처럼 삼겹살을 먹고 술을 마시고 가끔 싸구려 와인을 사고, 책을 사서 쌓아두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직장이 아니라면 대체 무얼 해야할까. 자영업을 하는건 어떨까, 싶다가 자영업이라고 나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어지는거다. 어디 가만히 앉아서 책 읽고 가끔 이렇게 페이퍼 쓰면서 먹고 사는 걱정은 안해도 되는, 그런 일 없을까. 그런 방법은 내 친구의 말마따나 '부자 남자랑 결혼하기' 밖에 없는건가. 역시 도피성 결혼이 답인건가. 그러나 내가 도피성 결혼을 선택한다한들, 결혼이란건 그래 그러자, 라고 맞장구쳐줄 상대가 필요한 게 아닌가. 게다가 '너 먹여 살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라고 할 만큼의 능력이 되는 상대가. 역시 답은 그냥 직장에 다니는건가...
더 나은일, 무언가 먹고살만한 다른일을 찾아야 했다면, 그건 좀 더 젊을 때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래서 지금 내나이쯤 되면 정착하고 안정적이어야 하는게 아닐까. 이 나이에 이렇게 먹고 사는걸로 고민하는 건 너무 속상한 일 아닌가, 싶다가, 이 책,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를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보았다.
마흔이 되기 전, 지독한 맘의 몸살을 앓다 결국 하던 방송 작가 일을 그만두며 결심한 유학길이었다.초등학교 6학년, 이제 막 중학교에 접어든 두 딸을 데리고 남편도 없이 시작했던, 밑도 끝도 없이 무모했던 영국에서의 생활. 3년이면 충분하리라고 계산했던 시간이 6년으로 늘어나는 사이 내 맘은 돌림노래의 되돌이표처럼 '돌아가야 한다' 라는 생각이 점점 분명해졌다. 멀리 떠나왔던 건 결국 다시 돌아가기 위한 길이었다. 떠나 오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후회도 있었다. 하지만 떠나오지 않았다면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영원히 몰랐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도 해본다. 이 낯선 영국에서 맞았던 마흔, 그리고 다시 돌아가게 될 내 40대의 제 2부. 무모하게 떠나왔지만 무모하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남겨진 나의 시간을 난 또 어떻게 맞아야 할까. (p.33-34)
이 책의 저자도 마흔이 되기전에 삶에 대한 고민을 하다 서른 아홉에 자녀 둘을 데리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에 있는 집을 팔아 유학자금을 마련했다고 했는데, 마흔이 된 아내의 유학을 지지해준 남편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런' 아내이기 때문에 '이런' 남편을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 나이에,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결정한 그녀 자신이 나로서는 더 대견하다. 유학을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것도 그렇지만, 무언가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공부가 있었다는 게 더 대단하게 보여진달까. 나는 누가 유학을 보내준다고 해도 '아니'라고 답할텐데. 뭐, 딱히 외국가서 하고 싶은 공부가 있는 게 아니니까. 내게 필요한 건 그보다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이니까. 내게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허락한다면, 그저 먹고 마시며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글을 쓰며 살고 싶은데. 내가 하고싶어하는 그 일들은 모두 돈을 '벌어들이는' 일이 아니라 '써버리는' 일이니, 이것들을 위해 내 시간과 노동력을 일에 투자할 밖에. 가슴 쓰라리다.
그리고 저자의 저 말을 보며, 이 나이에 이토록 삶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니라는 것에 약간의 위로를 얻는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구나, 다른 사람들도 앞으로 맞이하게 될 미래를 두려워하고, 자신이 했던 과거의 선택에 대해 끊임없이 후회하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는구나, 하는 생각. 무엇보다 '떠나오지 않았다면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영원히 몰랐을 거라고' 위로하는 저자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어졌다. 그 생각은, 자신에게 하는 그 위로는, 아주 제대로 됐다는 생각이 드니까.
며칠전에는 엄마랑 둘이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보는데, 마침 티비에서는 오스트리아 여행프로그램을 보여주고 있었다. 테마산책인가 테마기획인가 하는것이었는데, 한 팝페라 가수가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며 노래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암벽 등반을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던거다. 그러자 내가 올 가을, 오스트리아 여행을 계획했다가 취소한 일이 떠올라 가슴이 쓰렸다. 저사람은 저렇게 여행하며 사는데, 나는 저렇게 살지 못하고 어쩌다 한 번 가려고해도 뜻대로 되질 않는구나, 싶어져서. 물론 그 가수는 프로그램과 뭔가 합의하에 계획된 여행이었겠지만, 못내 서운했던거다. 나는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 하는. 물론 내가 여행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설사 내가 여행을 한다고 해도, 그 프로그램에서 그 가수가 찾아갔던 여행지를 선택할 일은 없을거다. 다만,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하는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단거다. 만약 내가 여행이 몹시 가고싶어졌다면, 그리고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허락된다면, 그래서 여행을 결심했는데, 그때 내 나이가 일흔이 넘었다면, 나는 배낭을 매고 열 몇시간을 비행기에 시달리며 저 낯선 곳으로 가 이곳 저곳을 걸어다닐 수 있을까? 어떤 것들은 내가 젊을 때, 건강할 때 할 수 있는게 아닌가 싶어지는거다. 이대로 계속 일만 하다 늙어간다면, 오스트리아도, 덴마크도, 포르투갈도, 그저 '가보고 싶었던 나라' 라고만 기억해야 하는게 아닌가. 태어나 삶을 살면서 이 세상의 다른 곳을,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을 못해보는 건 좀 속상하지 않은가. 언젠가는 몇 개의 계절쯤을 미국에서 보내고 싶다는 생각도, 처참히 무너져내리는 게 아닐까 싶었던 거다. 이런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종국에는 죽음에 이르렀다. 만약 내가 불시의 사고를 당해 내일 죽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직장에 다니며 스트레스만 받다 죽게되는 거 아닌가 싶은거다. 그런 일이 닥치기 전에, 그런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기전에, 나는 이 일상을 집어던져야 하는게 아닐까, 하게 됐던거다.
이런 생각을 하면 역시 답은 회사를 때려치는거다. 그러나, 그러다가, 내가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여든이 되는 순간에,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면, 그러면 나는 혼자서 거주지를 정하고 먹고 살아야 하고 즐겨야 하는데, 그렇다면 돈을 벌어야 되는게 아닌가 싶어지는거다. 그래서 다시 지금 여기, 제자리로 돌아온다. 후...
그러다 또다시 고민한다. 관둘까, 관두고 일단 쉴까.
다행스럽게도 폭풍 스트레스를 받은 어제, 여동생에게 나 관둘까, 관두면 너네 집에 잠깐 가있어도 될까? 했는데, 여동생은 '지금 당장 나와서 여기로 와' 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웃음기 어린 눈물이 고였다. 마침 이 책엔 저자의 둘째딸이 하는 이런 말이 실려있다.
"엄마, 그 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언니보다 더 친한 친구를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아." (p.137)
저녁엔 친구와 통화하며 8월달쯤 회사를 관두고 싶고, 그러면 어딘가에서 2개월쯤 혼자 조용히 묵고 싶은데, 그럴때 호텔을 잡으면 돈이 미친듯이 나오겠지? 라고 묻자 친구는 자기네 집 뒷편에 안쓰는 방이 있다며 거기에 머물라고 했다. 부엌도 있고 화장실도 있으니 니가 온다고 하면 도배를 새로 해놓겠다고. 니가 정말 회사를 그만두고 갈 데가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다. 정말로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 동생의 집으로 혹은 친구네 집으로 가게 될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마음은 든든해졌다. 나 관둬도 머물 곳이 있다, 라는. 물론 그게 장기간이 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계속 고민하고 또 고민해봐야겠다. 이렇게 계속 고민만 하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것, 그게 삶인걸까. 아니, 지금 이자리에서 고민만 반복한다는 건, 그것 자체로 나는 그 순간순간을 결정한 게 아닐까.
책은 지루하고 재미 없었는데 사진을 보는 것은 참 좋았다. 내가 살고 싶은 곳은 '도시'이지만, 고층빌딩들 사이 이지만, 이렇듯 너른 평야와 순수한 자연을 만난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다.
글 말고 이런 사진만 가득가득 보고싶은데, 이 저자의 《영국 정원 산책》은 그런 책일까? 정원 사진이 한가득 실려있을까?
다음 책은 쭉쭉 빨려들어가는 소설책으로 골라야겠다. 정신을 쏙- 빼놓는 책으로다가.
"난 네가 그렇게 미술을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엄마가 나랑 대화를 잘 안하니까 모르는 거지." "엄마가 너랑 대화를 잘 안한다고? 엄마처럼 딸들한테 말 많이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니까. 엄마는 엄마 말만 하지, 나랑 대화를 하는 건 아니잖아." 뭐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간 내가 아이들에게 수도 없이 떠들었던 말들은 대화가 아니었나? 일하는 엄마로 살아왔던 나는 양육에 늘 전전긍긍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내 휴대폰의 알람은 10년 넘게 오후 3시에 울려댔다. 방과 후 엄마도 없이 집에서 지내야 하는 아이들의 걱정은 그 알람으로 시작됐다. 일을 하면서도 신경의 안테나가 삐죽 솟아나 아이들이 있는 집을 향해 쏘아댔고, 화장실에서 몰래 거는 전화는 그날의 해야 할 일, 조심할 일, 지켜야 할 일들을 쭈욱 늘어놓고 끊기 급급했다. 생각해보면 작은아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분명 대화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대화는 어떤 건데?" "엄마가 친구 만나면 하는 거. 엄마는 우리한테 하는 모든 얘기에 교훈을 담으려고 하잖아. 대화는 그냥 얘길 하는 거야." (p.10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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