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은 환한 대낮에 벌어졌다. 대지뢰장갑차를 타고서 흑인 거주 지역을 순찰하던 군인들과 경찰이 마구잡이로 총을 쏘았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경찰과 군인들이 아무 집이나 움직이는 물체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 어떻게 우리 아이가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총알이 날아와 우리집 창문 하나가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직장에 가 있는 동안 외손자를 돌보던 엄마는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엄마는 아이를 안고 옆집으로 달려갔다. 옆집에 들어섰을 때에야 비로소 엄마는 가슴속 아이를 감싼 담요가 축축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자신도 모르게 피로 얼룩진 손을 내려다보던 엄마는 자신의 품에서 움직이지 않는 꾸러미에 시선이 갔다. 그 순간 외손자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을 탓하기 시작했다 ‥‥‥. ('은자불로 은데벨레', 「아들의 죽음」中 p.287)
'나딘 고디머'는 자신이 존경하는 작가들에게 편지를 써보낸다. 가수들이 모여 자선공연을 하듯, 우리도 작품으로 자선 활동을 하자고. 그 편지들에 작가들이 모두 응답해주었고, 그렇게 작가들이 자신의 대표작들을 모아 이 책,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라는 책을 만들어냈다. 이 책의 수익금은,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전액 다 에이즈예방협회에 기부된다고 책 날개에 밝혀져 있다.
이 단편들중, 위에 인용한 작품의 작가 '은자불로 은데벨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작가이다. 그가 보낸 작품 「아들의 죽음」은, 인용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갑작스레, 어처구니없이 아들의 죽음을 맞은 부부의 이야기이다. 군인과 경찰은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르는채로, 심지어 자신 앞에 죽음이 와 있는지도 모르는채로 죽음을 맞는다. 이런 일이 대체 왜 일어나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일이 여기, 이곳에서도 일어난다는 건 알고있다.
진우는 스무살 평범한 대학생이다. 그는 친구들과 책을 서로 빌려 읽어가며 '좋은책 읽기' 라는 독서모임을 하고 있고, 밤에는 야학에서 여공들에게 공부를 가르친다. 그런 그와 친구들에게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쳐와 가족들에겐 말 한마디도 없이 그들을 끌고간다. 그들은 각종 고문을 당한다. 고문을 당하면서, 결국은 그 괴로움에 못이겨,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자술서에 기록하며 지장을 찍는다. 그들의 몸엔 멍투성이고, 그들의 머리와 마음도 마찬가지 멍투성이라, 그들은 겁에 질려 경찰이 하라는대로 하고야만다.
한편 아들이 어디로 간건지, 갑자기 왜 사라져버린건지 알지 못하는 부모들은 속을 끓이며 찾아다닌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까지도 찾아다녀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빨갱이가 아님을 알지만, 나라는 그들을 빨갱이라 부른다. 가족들은 자식의 몸에 들어있는 멍을 보며 대체 그들이 왜 맞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왜 그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를. 아무런 이유도 알 수 없는채로 만신창이가 되는 자식을 보는 부모들의 마음이 어떠할까.
은자불로 은데벨레의 소설 「아들의 죽음」에서 부모는 심지어 나라에 돈을 내고 아들의 시신을 찾아와야 한다. 게다가 자신들이 한 짓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함구하기를 명령한다.
얼마 후, 계속해서 총을 쏘아 대던 경찰은 우리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집 안으로 밀고 들어온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목격했다. 처음에는 엄마를 데리고 나가 이 일을 함구한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끌고 가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다 다시 돌아오더니 아이의 시신을 빼앗아 갔다. 이렇게 하면 자신들의 학살 행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다니 이처럼 괴상한 논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은자불로 은데벨레', 「아들의 죽음」中 p.287)
영화 <변호인> 에서 증인석에 오른 경찰은 고문한 사실이 있는냐는 검사의 물음에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위증'을 했으되, 그 '위증'은 '증거'가 된다. 죄 없는 학생들을 데려다가 때리고 물먹이고 잠을 안재우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았던 그는, '아니' 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에 쐐기를 박는다. 그 일들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앞에 피멍이 들고 망가진 대학생들 여러명이 앉아 있는데, 그런데, '아니'라고 말한다. 피멍이 들고 만신창이가 된 대학생들을 보면서 판사는 '아니'라는 위증을 증거로 채택한다.
그런데 대지뢰장갑차가 또 나타났다. 시신을 돌려받기 며칠 전 트럭이 굉음을 내며 나타났을 때 나는 엄마와 함께 집에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 소리와 고함으로 거리가 매우 소란스러웠다. 취재할 때 항상 보았던 대지뢰장갑차였다. 그 차들은 다섯 번이나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가 사는 거리를 달려가면서 닥치는 대로 최루탄을 쏘았다. 네 번째로 지나갈 때 우리 집에 명중했다. 산탄통이 창문을 박살 냈고 그동안 익숙해진 그 끔찍하게 자극적인 냄새가 집 안에 가득 차 질식할 것만 같았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려고 우리는 헐떡거리며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우리 아들도 이런 식으로 죽었단 말인가? 저들이 우리 아들을 죽게 만든 바로 그 군인들인가? 이제는 아주 냉담하게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는가? 아니면 저들은 확실한 임무 수행을 위해 새로 뽑힌 군인들인가? 저들은 큰 소리로 웃어 가며 장갑차를 몰고 갔는가? 가족들이 지나가도록 길을 터놓는 것인가? 어떤 길을?
이 집이 우리의 보금자리였던가? 그럴 리 없다. 이곳은 단지 약탈을 일삼는 커다란 새를 기다리는 작은 새의 보금자리에 불과했다. ('은자불로 은데벨레', 「아들의 죽음」中 p.292)
<변호인>에서의 경찰은, 아들을 죽인 첫번째 대지뢰장갑차이고, 판사는 다시 또 나타나 집을 파괴한 대지뢰장갑차이다. 경찰과 군인의 원리 원칙은 국가를 구한다는 명분 아래 국민을 파괴한다. 그런데 여전히, 지금도, 그들은, '원리원칙대로' 하겠다고 한다. 역시나, 그들만의 원리 원칙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호사는 불법시위란 죄목으로 판사 앞에 서게 된다. 검사는 그에게 죄가 있다 말하고, 피고인이 된 변호사의 변호인들은, 자신들의 수가 많으니 전원 참석을 했는지 이름을 불러달라고 판사에게 요구한다. 판사는 그렇게, 99명의 변호인의 이름을 차례대로 부른다. 99명의 변호인은 모두, 재판을 받기 위해 판사 앞에 서 있는 변호사를 변호하기 위해 참석했다. 그들은, 변호사의 편이 되어준다. 변호사의 편이 되는 것이 옳은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옳은 길을 가기 위해 행동으로 옮긴것이다. 나는 그 시간들을, 그 사건들을, 그래서 그 변호사를 잘 몰랐다. 잘 몰랐기 때문에 편을 들어준 적도 없다. 편을 들어준 적이 없는데, 이제는 편을 들어주고 싶어도 편을 들어줄 수가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점이 너무 속상해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앓고싶다, 고, 아프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이 미안함이 조금 덜어질 것만 같아서. 흠씬 앓고 싶어졌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 나는 '한창훈'의 소설 『꽃의 나라』를 떠올렸다. 그 소설의,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마지막 문장을.
오래지 않아, 사령관은 대통령이 되었다. (한창훈, 『꽃의 나라』p.272)
나는 저 문장을 떠올리며, 꼭 이런 문장을 상상한거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변호사는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걸로 끝난 게 아니었기에, 차마 저 문장을 마지막으로 쓸 수가 없다. 그 후의 비극이 그에게 찾아들기에. 저 문장이 마지막 문장이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