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당신과 함께했었소. 그랬다는 것을 아시오?"
"네, 그러셨다는 걸 알아요." 마르티네가 말했다.
"내게 남은 나날 역시 당신과 함께할 거요. 오늘 밤처럼, 매일 저녁 나는 당신과 저녁을 먹겠소. 육신으로가 아니라 영혼으로. 어차피 육신은 의미가 없으니. 오늘 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소, 소중한 자매여." (p.68)
로벤히엘름 장군은 청년시절, 목사의 딸인 마르티네에게 반해 연정을 품었지만,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렇게 시간은 흘러 그는 승진을 하고 결혼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31년후,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저녁식사에 가게 될 기회가 생긴다. 삼십일 년. 이제 그들은 더이상 젊지 않고 각자의 삶에 안착하고 있었던 그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그곳에서 그는 마르티네의 요리사인 바베트가 만든 환상적인 식사를 먹다가 '무언가 빈 것 같았던' 자신의 삶을 떠올린다. 그 식사의 감격 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며 그녀에게 말한다. 매일 당신과 저녁을 먹겠다고, 영혼으로.
얼마전에, 오래전에 읽었던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하느님의 보트>를 다시 구매했다. 읽었을 당시엔 뭐야, 이건 동화야? 라며 시큰둥했던 기억이 나는데, 요즘 자꾸 그 소설이 생각났다. 오래전에 읽어 정확히 기억할 순 없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소설의 줄거리가 맞다면, 나는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잊지 못하고 내내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소설. 그리고 여기는 엄청난 스포일러가 될텐데, 결국, 마치 소설처럼(!) 그가 문을 열고 그녀에게로 돌아오면서 끝을 맺는. 나는 이 내용을 다시 한 번, 지금 읽어보고 싶었던 거다.
그렇다고 내가 누군가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살고 있는건 아니다. 그러나 간혹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이건 누구나 그럴테지만, 아주 가끔은,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하는 가정을 해보곤 한다. 내게 연인이 있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에게 안녕을 고하고 그를 만날것인가, 지금 내 상황이 변했으니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것인가, 하고. 나는 여기에 대해서 정말이지 답을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가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똑같은 크기만큼, 차라리 나타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도 한다. 그가 거기 있기 때문에,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그리워할 수 있는거고 아름다운 거라고. 나타나는 순간 비극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바베트의 만찬을 읽으며, 그리워하는 방법에는 아주 여러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그와 식사를 하자. 나는 로벤히엘름 장군처럼 매일을 그와 식사하진 않을테다. 나는 간혹 다른 누군가와 식사를 할텐데, 그 때는 앞에 있는 상대에게 집중하고 싶고, 혼자 식사를 하는 중에는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그러나 그 중에 한 끼쯤은, 간혹 혼자 앉아 식사를 하며 천천히 씹을 어떤 때에는, 그를 생각하며 함께 식사하고 싶다.
커피를 마시는 어느 아침에는 혹은 오후에. 뜨거운 커피가 든 컵을 양 손으로 잡고 호호- 불면서 그를 떠올리며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 순간에는 그를 향한 나의 영혼이 아주 강해서, 그에게 가 닿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바로 그 때, 그도 커피를 마시며 잠깐 숨을 고르고 나를 떠올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자체로 완벽한 순간이 될텐데! 우리의 영혼은 함께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실텐데. 간혹 그 순간들에 쿠키를, 케익을 함께 내어놓기도 해야지.
나는 '이자크 디네센'의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데, 책을 펼쳐 책날개에 실린 작가 설명을 보니 이렇게 써있더라.
1885년 덴마크 코펜하겐 북부의 롱스테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카렌이며, 필명인 이자크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 이삭('웃음'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28세에 브로르 폰 블릭센 남작과 결혼하여 남작부인이 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에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커피 농장을 경영했고, 영국인 사냥꾼 데니스 핀치 해튼과 사랑에 빠졌으나, 운명의 장난으로 연인과 농장을 모두 잃은 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리프가 열연한 바로 그 주인공이다. (책날개 中)
악. 이 여자가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바로 그 주인공이라고? 나는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그러다 몇해전 한 알라디너가 내게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아직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단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락방님이 아직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니 반칙이에요' 라고. 그 댓글을 보자마자 반드시 이 영화를 보고야말리라, 고 결심했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흐르는동안 나는 대체 이 영화를 안 보고 뭘한걸까? 혹시나 책이 있진 않을까 검색해보니, 오, 역시 원작이 있었다!
으악, 책부터 읽어야겠다. 게다가 무려 30프로 할인된 가격에 이 책이 판매되고 있다. 맙소사!! 내가 산다!!
<바베트의 만찬> 속에서 바베트가 차려내는 음식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할수없이 영화를 봐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만찬에 참석한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는 장면을 보고싶다. 그 음식의 색깔과 빛깔을, 흔들리는 와인잔속의 와인이 로벤히엘름 장군의 입 속에 들어가는 장면을, 그가 그 와인을 마시면서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복잡한 생각들이 드러나는 장면들을 확인하고 싶다. 청년시절, 사랑고백조차 하지 못했던 로벤히엘름 장군과 삼십일 년이 흐른 지금의 로벤히엘름 장군을 보고싶고, 그런 그가 영혼으로 매일 저녁 당신과 식사하겠다고 말하는 그 눈빛을 보고 싶다.
그후에 일어난 일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손님들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수많은 작은 후광들이 하나로 합쳐져 거룩한 광채를 내기라도 한 듯 천상의 빛이 집 안을 가득 메웠다는 것 외에는. 말수가 적은 노인들은 말문이 틔었고, 수년간 거의 듣지 못했던 귀가 열렸다. 시간은 영원 속으로 녹아들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 창문이 황금처럼 빛났고 아름다운 노래가 바깥의 겨울 공기 속으로 흘러나갔다. (pp.66-67)
오늘은, 당신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