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좋았다. 칼퇴를 했으니까.  오늘 나는 밤 늦게까지 집에 혼자 있을 예정이었다. 퇴근길에 백화점에 들러 식품코너로 향했다. 백화점 식품코네어세만 쓸 수 있는 만 원짜리 상품권이 있었다. 나는 파프리카를 샀고 그동안 먹고 싶어했던 청경채도 샀다. 아, 팽이버섯! 팽이버섯도 눈에 띄어 샀다. 근사한 요리가 만들어질 것 같았다. 내 계획은 이랬다. 지난주말에 예식장에 들러서 가방에 몰래 넣어온 버터, 그 버터를 프라이팬에 두르고 파프리카와 청경채와 팽이버섯을 볶는거다. 볶다가 후추를 약간 뿌리고 접시에 담아내면, 아우, 칼로리도 낮고 근사한 와인 안주가 될 것이 아닌가. 가볍고 우아한 저녁 식사. 마음이 급했다. 어서 상을 차려내고 싶었다.

 

프라이팬을 달구고 버터를 꺼내 휘리리릭 녹여댔다. 근사한 향이 났다. 그리고 씻어둔 야채들을 넣었다. 설레었다. 아, 이건 얼마나 멋진 안주가 될까. 그런데 아뿔싸. 내가 잊은게 있었다. 바로 팽이버섯. 팽이버섯에서 물이 나온다는 사실. 나는 야채를 '볶고' 싶었는데, 숫제 '버터물에 삶은' 꼴이 되고야 만것이다. 요리가 망쳐지는 것 같아 초조했다. 그래서 나는 안되겠다, 일회용 버터를 하나 더 꺼내(예식장에서 세개를 숨겨왔다) 프라이팬에 던져 넣었다. 헐. 더 많은 버터물에 야채들이 삶아지고 있었다. 에라이, 그래도 괜찮겠지 싶어 마지막으로 후추를 뿌렸다. 그리고 접시에 담았다.

 

 

 

하아- 너무 맛이 없었다. 파프리카는 먹을만했지만 청경채와 팽이버섯은 진짜 못먹을 맛이었다. 이대로 버릴 순 없지, 소스. 소스를 찾아보자. 나는 냉장고를 뒤졌다. 샐러드 소스 따윈 없었다. 있는거라곤 케첩과 마요네즈가 전부. 마요네즈를 사용할까, 마요네즈와 케첩을 섞어볼까, 케첩을 사용할까, 하다가 케첩이 그중 가장 무난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케첩을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야채들을 찍어먹어 보았다. 케첩을 찍는다고 맛있어지지는 않았다. 정말이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맛이었다. 접시에 담은 야채볶음(?) 에서는 자꾸 물이 생겼다. 아놔...

 

 

미칠것 같았다. 아무리 와인을 마셔도 꾹 참고 먹어줄만한 안주가 아니었다. 저 청경채는 자그만치 3,200원 어치다. 유기농으로 샀단 말이다. 도무지 못먹겠는데 그렇다고 버리자니 너무 아까웠다. 그런데 이 야채들을 살릴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 저녁이 이렇게 망쳐지다니. 흑흑. 나는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말했다. 친구는 그 안주를 먹지말고, 대신, 된장찌개를 끓일 때 넣으라고 했다. 된장찌개? 오, 그럴듯한 아이디어였다. 그치만 야채를 버터에 볶았는데 괜찮아? 친구는 씻어서 헹구라고 했다. 어차피 찌개에 들어갈 것이니 씻어도 상관 없겠구나, 적셔도 되겠어, 란 생각이 들어 그래, 된장찌개에 도전해보자 싶었다. 물론 걱정이 됐다. 청경채와 버섯만 버리는 게 아니라, 이러다가 된장도 버리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 그래, 나는 된장찌개를 끓여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것이다.

 

 

나는 냉장고를 뒤져 된장을 찾아냈다. 그리고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된장찌개 끓이는 법을 물어봤다. 멸치를 넣어 육수를 만들라길래 냉동실을 뒤적여 멸치를 찾아냈다. 혹시라도 망칠 경우 버리게 될텐데 많이 만들수는 없지, 가장 작은 냄비를 꺼냈다. 친구가 시키는대로 멸치와 다시다를 넣어 팔팔 끓이다가 멸치를 건져내고 된장을 풀었다. 그런데 된장찌개가 색이..좀..거시기하네? 친구는 간장을 넣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그나마 색을 좀 살려보고자 간장을 약간 넣었다. 색깔도 맛도 영 마음에 들질 않는다. 그러다 생각났다. 아, 마늘!! 그래 마늘을 넣자. 나는 갈아둔 마늘을 한 덩어리 푹- 넣고 청량고추도 하나 썰어 넣는다. 흐음. 그래도 별로네? 다시 된장을 조금 넣고 물에 씻어서 짜둔 청경채와 버섯을 넣었다. 양파도 썰어 넣었다. 뒤적뒤적 고춧가루를 찾아서 또 넣었다. 팔팔 끓였다.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 맛이 나질 않는다. 뭘 더 넣어야 할까..생각하다가 그만 두기로 한다. 괜히 더 넣었다가 여기에서 더 망치면 어떡해. 나는 불을 끄고 그릇에 담아내 다시 술상으로 가져왔다.

 

 


하아- 물에 씻었지만 된장찌에서는 버터 향이 났다. 버터 맛이 났다. 버터맛이 나는 된장찌, 그게 오늘 요리의 이름이었다. 그래도 청량고추와 고춧가루 덕인지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뜨겁고 매콤했다. 으음, 버터맛 된장찌. 좋아. 그래, 야채볶음 대신 된장찌를 안주로 하자.

 

했는데,

하아- 몇 번 퍼먹다 보니 밥..을 먹고 싶어지는거다. 하아- 오늘의 컨셉은 가벼운 야채와 와인, 가볍고 우아한 저녁식사였는데. 어쩌지. 결국 된장찌를 다시 한 그릇 퍼 밥을 말았다. 된장찌는 야채볶음과 달리 허겁지겁 먹게 되었다. 결국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된장찌에 말은 밥을 퍼먹고 있었고, 칼퇴를 했는데 내가 된장찌에 밥을 말아 먹은 시간은 밤 열 시................가 되어있었다. 나는 그저 밥을 먹었을 뿐인데...   뭐이래. ㅜㅜ

 

 

밤이 깊었다.




덧: 비밀댓글님의 조언에 따라 된장찌게 → 된장찌개 로 수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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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02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2 1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2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Forgettable. 2013-10-02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ㅋㅋㅋㅋㅋㅋ 어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리 얘기 보면서 이렇게 웃은 적 처음 ㅋㅋㅋㅋㅋㅋㅋㅋ 요리하는 남자랑 만나야겠다. 안되겠다. ㅋㅋㅋㅋ 아 참고로 허브 소금 청양고추 참기름이 제가 자주 쓰는 조미법이에여. 앞으로는 야채 볶을 때 버터 넣지 말고 그냥 올리브유 사용하세요 ㅠㅠ 훨 맛있음. 일단 버터에 야채볶음 해본 적이 없어서;

다락방 2013-10-02 17:32   좋아요 0 | URL
아 저 원래 포도씨유라든가 카놀라유라든가 하는걸로 볶는데 버터를 훔쳐와가지고(응?) 꼭 볶아보고 싶더라고요. 버터는 정말 완전 맛있으니까 뭘 볶아도 맛있겠지..하는 생각에. 소 있었으면 소에도 버터 쳐바르고 구울라 했거든요. 다음부턴 야채를 버터에 볶지 말아야겠어요. 흙흙

2013-10-02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10-02 17:32   좋아요 0 | URL
수정 완료! 찌게로 할까 찌개로 할까 2초간 고민하다 ㅋㅋㅋㅋㅋ

웽스북스 2013-10-02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야채볶음은 올리브유 ㅋㅋㅋ 버터된장이라니 뭔가 아방가르드해요. ㅋㅋㅋ

다락방 2013-10-02 17:32   좋아요 0 | URL
먹어는 봤습니까, 버터된장? ㅋㅋㅋㅋㅋ 요리 하나에도 참신함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야책방 2013-10-02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그의 '난역시요리로는안되는가봐요'에 빵 터지고 갑니다. 저도 요리로는 안 돼요. ㅠㅠ

다락방 2013-10-02 17:33   좋아요 0 | URL
전 그저 누가 만들어주는 걸 먹는것만 잘하는 사람인가봅니다. 어휴..

Mephistopheles 2013-10-02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혼자 버터를 볶고. 나 혼자 요릴 망치고. 나 혼자 재도전하고. 이렇게 나 먹고 먹고 후회해도 소용없어 오늘도 나혼자. 우우우우우우우우우. 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13-10-02 17:33   좋아요 0 | URL
결혼해야겠어요, 메피스토님. 이래가지고 독립하면 혼자 살겠습니까, 어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맨날 괴물같은 음식만 만들거 아녜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요리 잘하는 남자랑 결혼해야겠어요. 흙흙

* 2013-10-02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상당수의 채소가 버터로 볶으면 맛이 없죠, 시금치 같은 것 빼면. 게다가 선택하신 재료들은 기본적으로 조합도 영 아니고요. 먹는 것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은 말로만 못한다고 하지 대개는 상당 수준 이상으로 요리를 하던데, 극소수에 속하는 예외이신 것 같군요.

다락방 2013-10-02 17:34   좋아요 0 | URL
전 버터를 빵에 발라도 맛있으니 채소를 볶아도 그 맛이 끝내줄 것이다..라고 제멋대로 생각했지 뭡니까. 그러나 상당수의 야채가...맛이 없군요. 제가 할줄아는 요리라고는 라면과 계란프라이가 전부입니다. 후-

치니 2013-10-02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나도 왠지 다락방 님은 안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요리를 잘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ㅋㅋㅋㅋㅋ 아닌가 봐용.

다락방 2013-10-02 17:34   좋아요 0 | URL
저는 못해서 안하는 겁니다 치니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레와 2013-10-0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부터 내가 요리를 한다 홍~홍~홍~ (정형돈 버전으로 읽어주삼ㅋ)



다락방 2013-10-02 17:36   좋아요 0 | URL
오늘은 친구가 선물해준(응?) 삼겹살을 구워 먹을 예정이에요. 이번엔 양파겉절이를 만들어볼까해....개떡같이 될지 모르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개 2013-10-02 17:40   좋아요 0 | URL
그러게 다락님은 고!기!를 구워 드셔야 합니다.
버터에 야채라니요. 그무슨!!!!!!!!

네꼬 2013-10-02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하하 다락님. 와, 버터맛 나는 된장찌개라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퓨전이군요! 요리 못하는 다락님이 좋아요. 남한테 해달라고 해서 먹는 다락님이어서 근사해요. ㅋㅋㅋㅋ 근데 ㅋㅋㅋㅋ 아 너무 웃겨.

다락방 2013-10-07 17:56   좋아요 0 | URL
사람마다 못하는 게 한가지씩 있겠지만, 제 경우엔 못 하는 게 수두룩하네요. 도대체 먹는거 말고 잘하는 게 뭔지 원 ㅋㅋㅋㅋㅋ

moonnight 2013-10-02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맛있을 것 같은데 맛이 없던가요? +_+; 다락방님이 해주시는 거라면 채소버터볶음도 버터맛 나는 된장찌개도 맛있게 먹을 수 있어요. 저는!!!! ^^

다락방 2013-10-07 17:57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그게 그게 아니에요. 버터된장찌개도 거시기하지만 채소버터볶음은 정말, 정말, 정말 먹지 못할 맛입니다. 이거 누구한테 해주면 맞기 쉬워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