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화를 본 후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자리를 뜨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도 멍- 하게 계속 화면을 보게 만드는 영화. 움직일 수 없게 만드는 영화. 이런 영화는 극히 드문데, 어제 내가 본 영화가 그랬다. 나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면서도, 다 올라간 후에 영화의 제목이 마지막으로 쓰여진 걸 보면서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들렸던 총소리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그 총이 마치 내 심장을 겨눈것만 같았다. 가슴이 뻥- 뚫린것 같았다.
작은 마을에서 남자는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있었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그는, 학교가 없어진 후 유치원 교사를 하며 지내고 있다. 그는 섬세하며 다정한 사람이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어린 딸이 길을 걸을 때 선을 밟지 않으려 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고, 그런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기도 한다. 아이는 당연히 아빠의 친구인 그를 몹시 따랐고 매우 좋아했으나, 어느날 그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아이는 자신이 무슨말을 하는지도 모르는채로 그에 대한 거짓된 말을 원장선생님에게 한다. 그 후로 그는 아동 성추행범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고 하지만 이미 마을 사람들은 그를 성추행범이라 단정지었다. 유치원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그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말한다. 그의 집 소파를 묘사하고 그의 집 지하실을 묘사하며 그를 범죄자로 만들지만, 그의 집에는 지하실이 없다. 그는 재판을 받고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그가 풀려났다고 한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무혐의로 보지 않는다. 슈퍼마켓에서는 그에게 앞으로 다시는 장을 보러오지 말라고 말하고, 식사준비를 하는 그의 집 창문으로 누군가 큰 돌을 던지며, 그가 아끼는 개의 시체가 집 앞에 놓여진다. 그는 혼자가 됐다. 그에겐 아무도 다가오지 않고 그는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관객인 나는 그의 무죄를 안다. 그가 결백함을 안다. 그러나 내가 극중으로 들어가 마을사람1이 된다면, 아마 나 역시 그가 성추행범의 의심을 받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를 멀리했을 것이다. 게다가 나에게 자식이나 조카가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 아이들에게도 저 아저씨를 멀리하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길에서 마주친다면 아마 고개를 푹 숙이고 멀리 떨어져 걸으려 했겠지. 내가 어떻게 그 어린 아이들이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 어린 아이들이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걔들이 뭘 안다고? 그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한들, 아, 저 사람은 무혐의구나, 그렇다면 내 아이 곁에 다가와도 말리지 말아야겠어, 라고 순식간에 결정할 수 있게될까? 대부분의 범죄에 대해 한 번 혐의를 받았던 사람에 대해서 선입견을 부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성추행이었다면, 더하다. 그는 짐승이 되고 변태가 되고 그런채로 죽을때까지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영화속에서 남자에겐 막 사귀게 된 애인이 있었다. 그 애인은 그를 보고 묻는다. 너 정말 저 아이에게 손댔냐고. 그 여자가 잘못한걸까. 아니, 그 여자 입장에서는 그걸 반드시 묻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난 절대 그러지 않았어, 라는 말을 듣고 그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백한 남자에게 애인의 그 질문은 무얼 의미할까. 그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그 억울한 혐의를, 애인의 한 순간이나마의 불신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마을을 떠나는 것이 정답일까? 그 마을을 그런채로 떠난다면, 그건 그야말로 그가 그의 죄를 인정하는게 되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꿋꿋이 견디며 나는 떳떳하다고 증명해야하는데(제길, 증명이 대체 왜 필요하단 말이냐), 이미 사람들에게 '아이를 건드렸다'는 생각을 심어준 그가 어떻게 그들의 머릿속에서 그걸 씻어낸단 말인가.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영화를 다 보고나서도 나는 이 세상에 영화가 존재함이 감사했다. 얼마전에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을 읽고서야 비로소 나는, 하나의 범죄 뒤에 길고 긴 사연이 있을수 있음을 알게 되었듯이, 이 영화를 보고서야 진실이 무섭게 가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진실은 가려지고 진실이라 믿고 싶은것들만이 존재한다. 자신이 믿는것이 진실이란 확신앞에 진심은 무용하다. 쓸 데가 없다. 귀에 닿지도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지금보다 좀 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맞다고 믿는 쪽이 어쩌면 맞는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틀리다고 생각한 쪽이 진실일 수도 있다고,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영화의 힘이다. 책이 그리고 영화가 생각하게 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볼 수도 있게 하고 다양한 일들을 인정할 수 있게 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면 세상이 좋아지고 사람이 변할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백 명이 보면 백 명을 다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 중에 누군가는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이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지기전에 어서들 달려가서 보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일전에 본 영화 『세션: 이 남자가 사는 법』의 원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접힌 부분 펼치기 ▼
[알라딘 책소개]
평생 동안 9백 명이 넘는 파트너와 한 침대에 올랐던 여인이 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성매매 여성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본인은 그런 추측을 일축해 버린다. 그녀의 이름은 셰릴 코헨 그린, 직업은 의뢰인의 성적 고민을 대화와 실습을 통해 해결해 주는 '대리 파트너(surrogate partner)'이다.
셰릴 코헨 그린이 40년 동안 이 남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만난 의뢰인들의 사연과, 이 직업을 갖게 되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의 자신의 인생사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회고록이다. 이 회고록은 저자가 버클리 출신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마크 오브라이언의 치료를 돕는 내용에서 시작된다.
그는 6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그 이후로 철제 호흡 보조 장치를 달고 살아야 했다. 저자와 마크의 이 이야기는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으로 영화화되어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과 관객상, 산세바스티안영화제 관객상, 필라델피아영화제 관객상을 거머쥐고, 2013년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되는 등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큰 주목을 받고 있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9초 만에 매진되며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영화로 국내에서는 1월 17일 영화가 개봉되었다.
펼친 부분 접기 ▲
흐음..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커피소년의 에세이가 나왔다는 것도 알게됐다. 이런! 그러나, 나는 커피소년은 음악만 들어도 충분히 그 스토리를 짐작할 수 있다고 믿는 바, 그림이 잔뜩 실린 이 에세이집을 읽게 될 것 같진 않다. 감성적인 글에 잔뜩 들어간 그림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나는 커피소년보다 에피톤 프로젝트를 훨씬 훠어어어어어어얼씬 더 좋아하고, 내 여동생은 에피톤 보다 커피소년을 더 좋아한다. 오죽하면 30개월된 나의 예쁜 조카도 이게 사랑일까~ 하면서 커피 소년의 노래를 흥얼댄다. 최근엔 엔틱한게 좋아~ 도 따라하더라. 그런 내 여동생이 이 책을 읽으면 좋아하려나? 갸웃.
접힌 부분 펼치기 ▼
[알라딘 책소개]
커피소년의 감성 에세이집. 누구에게나 계절처럼 청춘이 찾아오고 지나간다.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 젊은 날의 한 자락 기억을 떠올리면 대개는 짝사랑과 마주한다. 만남의 기쁨, 보고픔, 간절함, 그리움, 이별의 아픔… 이런 단어들이 여드름처럼 마음 한구석에서 솟아나는 때이기도 하다.
커피소년 역시 어느 날 운명같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2년여 동안 가슴을 앓이를 하며 불과 열일곱의 낯선 만남을 하다 이별을 하게 된다. 사랑이 남긴 그리움은 그 소년을 잠 못 이루게 하고, 그 때마다 자기의 감정들을 커피를 로스팅하듯 수많은 곡으로 뽑아낸다. 앨범에 이어, 이제는 잊어야 할 기억의 끝에서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기록으로 남긴다.
펼친 부분 접기 ▲
어제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못했던 나를 돌아보다 하루키의 얘기가 생각나 옮겨본다. 하루키도 엔딩크레딧을 다 보고 일어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하하하하.
도대체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이러한 견식 차린 '엔딩 자막 관람법'이 세상을 석권하게 되었는지- 혹은 일반화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냉전의 종결과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강습회적인 분위기는 도무지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물론 이 세상이 내 마음에 들 목적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p.249)
내가 영화의 엔딩 자막을 끝까지 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버린다는 글을 썼더니, 그에 대한 여러 가지 항의 편지가 쇄도했다. 그런 식으로 영화를 보는 것은 이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엔딩 자막 따위는 일일이 보지 맙시다." 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것은 보지 않는다."고 말한 것뿐이니, 제발 그렇게 화내지 말아주세요.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좀 감정적으로 되는 사람이 세상에는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영화가 끝났는데도 '상투적으로' 모두 자리에 앉아서 엔딩 자막을 보고 있는 것은 역시 좀 이상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이 정말로 훌륭한 영화라면, 감동의 여운을 즐기는 차원에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나도 그럴 때에는 좀 천천히 일어선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별 대단한 작품이 아닌데도 꼿꼿하게 앉아 끝없이 이어지는 엔딩 자막을 보고 있는 것은 역시 시간 낭비란 기분이 든다. (p.348..였나? 이런. 쪽수를 메모를 안해왔네 -_-)
아닐거야, 아니겠지, 하면서 은근히 기대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금요일 아침이 내게는 그런 아침이었다. 어쩌면 혹시? 라는. 그리고 월요일 아침, 아, 역시 아니었구나, 그럼 그렇지, 하며 무너지는 기대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기대했던 내 자신이 찌질했다.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것이고 기대는 무너지라고 있는것일까? 아니, 어떤 약속들은 깨어지기도 하고 어떤 기대는 무너지기도 하지만,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고 기대는 충족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계속 그렇게 믿으련다.
어제 간 극장은 메가박스 아트나인 이었는데, 내가 메가박스의 2012년 vip 라 1+1 쿠폰이 있어서 그걸 사용하려고 굳이 그 극장엘 간 거였다. 그런데 아트나인은 메가박스의 쿠폰을 사용할 수 없다는거다. 헐. 그래서 부랴부랴 친구와 나는 스마트폰으로 알라딘 쿠폰을 써서 예매하려는데, 상영시간이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기에 예매가 안되는거다. 또다시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허겁지겁 메가박스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둘 다 충분한 포인트가 있었고, 우리는 포인트로 각자의 영화를 예매할 수 있었다. 아, 제기랄. 그 쿠폰 사용이 1월31일 까지인데 나는 이제 그 전까지 영화를 볼 시간이 없다. 하아- 게다가 평일 무료 관람권 1매도 아직 사용하지 못했어. 아니, 그동안 그렇게 영화를 봤는데 이 쿠폰 안쓰고 뭐한거야? ㅠㅠ 상반기 쿠폰도 날려버렸기에 하반기 쿠폰은 꼭 사용해야지 했는데, 아, 쉬바,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어제 처음 가 본 아트나인은 좋더라. 씨네큐브는 조용하고 사람이 없어 좋긴 하지만 기다리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장소다. 소파가 몇 개 없어서. 그런데 아트나인은 그렇지 않았다.
의자와 테이블이 충분히 많고 식사도 주문해서 먹을 수 있었다. 나와 친구는 파스타를 주문해 먹었다. 앉아서 책을 읽으며 기다리기에도 좋을 것 같다. 생긴지 얼마 안되서인지 저 분홍색 리본은 옥의 티구나. 여튼, 주변에 괜찮은 술집이 있는지 차차 확인해보고(응?) 애용해야겠다. 므흣.
그리고 오늘 아침 출근길의 강남역 1번 출구 앞에서는 이런걸 나눠주었다.
므흐흐흐흐흐흐흣. 나는 동료에게 주기 위해 이걸 받아들고 멈춰 서서는, 하나 더 주세요, 했다. 나눠주시는 분은 웃으며 하나 더 주셨다. 프랑크 소세지랑 초콜렛. 한돈 캠페인이란다. 우리나라 돼지 먹으라고. 움화화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