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군가를 만나서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것, 어딘가를 함께 걸어가는 것, 그 사람을 또 만나기로 결정하는 것등은 모두 내 선택의 문제이다. 내 삶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내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섹스 역시 마찬가지. 내가 누군가와 함께 옷을 벗고 침대에 누울것인가 하는 것도 내 선택에 달려있다. 그리고 섹스는 특히 더 내 선택으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누군가의 앞에서 옷을 벗고 내 몸을 보여주고 상대의 몸을 만지는 거야말로 선택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영화속의 남자에겐 섹스가 선택일 수 없었다. 물론 다른 많은 것들도 그랬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은 여섯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온 몸을 움직일 수 없다. 호흡기 없이 호흡하는 건 고작 두세시간만 가능하다. 지능은 보통사람과 같아서 그는 대학교육을 마쳤으나, 그의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어딘가로 외출하기 위해서는 도우미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우미가 씻길 때 그는 수치심을 느끼고, 가끔 발기하고 굴욕감을 느낀다. 서른여덟의 그는 섹스를 해보고 싶다. 



장애인의 성문제를 도와준다는 섹스상담치료사가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는데, 이 영화속의 남자가 바로 그 치료사를 만난다. 총 여섯단계로 이루어진 과정에서 그는 여자를 만지고 또 여자가 만지는 것이 어떤건지 느끼게 된다. 놀라웠던 건 이 과정에서 삽입도 이루어진다는 거다. 그는 생에 처음으로 오르가즘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치료사도 같이 그것을 느끼기를 원한다. 이 과정에서 그에게는 치료사에 대한 감정이 생기게 된다. 육체적으로 관계를 갖는 것이 먼저였고, 그것이 사랑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해도, 관계후에 상대에 대한 애착이 생기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그는 시를 지어 그녀의 집에 보내고 시가 적힌 엽서는 그녀의 남편이 뜯어보게 된다.



나는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직업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 놀랐다. 나였다면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물론, 그 일은 중요한 일이다. 또 필요한 직업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내 주변인의 '현실'이 된다면, 내 생각과 내 감정 사이에 대립이 생기지 않을까? 나는 그녀 남편처럼 '당신은 천사야' 라고 정말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녀 남편에 대해 묻는 그에게 여자는 철학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강의를 나가냐고 물으니 그녀는 혼자서 책읽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대답만으로는 남편에게 어떤 뚜렷한 직업이 없는듯 느껴졌다. 나는 내 생각의 틀에 갇힌걸까. 그가 돈을 잘 버는 남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의 직업을 받아들인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거다. 남편은 그녀의 치료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녀 앞으로 날아온 시가 적힌 엽서에 대해서는 분노했다. 그래,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것은 그와 그녀가 잤는가, 가 아니라 감정이 이끌리는가, 일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일'을 인정했지만, 거기에 따라오게 된 '감정'에 대해서는 두려웠을 것이다. 아마 나라도 그랬겠지. 여자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남편이 버린 엽서를 쓰레기통을 뒤져 찾아내 밤에 혼자 앉아 내내 생각한다. 그녀는 그에게 네번째 단계에서 이제 치료를 마쳐도 되니 마치자고 말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린다. 감정이 생겨버리게 된 상대와 헤어지는 일은 누구에게도, 언제나 버겁다.






어제는 다섯시반에 이대역에서 약속이 있었다. 광화문에서 영화를 보고 이대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충정로에서 내려 갈아타야 하는데 나는 븅신같이 또 공덕..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이런 삽질을 해놓고 갔는데도 이대역에 도착한 시간은 다섯시였다. 나는 도착했다고 상대에게 말하는 대신 표를 대고 나와 역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와서 상대를 기다리는 건 좋지만 너무 일찍 와서 기다리는 건 상대도 불편할 터. 나는 이대로 책을 읽다가 이십오분에 문자를 보내 도착했다고 알려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는데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앉아있는 내 어깨를 살며시 건드렸다. 나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는데, 거기엔 내 약속상대가 와있었다. 어? 일찍왔네? 라고 말했고 상대는 역에서 내려 표를 대고 나왔는데 익숙한 등이 보여서 놀랐다고 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놔 ㅋㅋㅋㅋㅋㅋㅋ뒷모습 보이는거 짱싫은데...이럴줄 알았으면 등을 곧게 펴고 앉을걸. 한껏 구부려서는 뒤에서 보면 곰..같았을 텐데. 욕나오네. ㅎㅎ 나는 당연히 상대가 왔으니 일어서려 했는데 상대가 오히려 내 앞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는 맛있다는 소문이 있다며 한시간반을 줄서서 기다려가지고 튀김소보루빵을 사왔다고 내게 먹으라며 건넸다. 내 손에 건네진 빵이 무척 따뜻했지만, 손에 기름이 묻을것 같아서 또 걸으면서 먹기가 좀 거시기해서...(상대가 여자였다면 아마도 걸으면서 먹었을지도..) 먹지 않고 들고 다녔다. 다섯시 십오분이었다. 나는 문득, 산드라 브라운의 책이, 정확히 이 책 속의 어떤 구절이 생각났다.


















"이게 데이트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그는 현관 바닥에 우산을 던졌다. 우산은 빙그르 돌다가 멈추었다.

"맞아요."

"맞소. 이게 데이트가 아니라고 했지만 ‥‥‥"

"그런데요?"

"강요하는 건 아니오. 내가 강요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

그는 한 걸음 다가왔다. 또 한 걸음.

"데이트였다고 말해주겠소?"

"네?"

"제발‥‥‥" (p.131)



나는 일요일에 나가는 것도 싫고 일요일에는 술도 마시고 싶지 않다. 게다가 상대에게도 말했지만, 신촌 이대 홍대 쪽에 가는 것도 싫다. 집에서 멀기도 멀지만 그 동네의 낯설음이 도무지 극복되지 않는다. 나는 그곳에 가면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된 기분이다. 그런 내가 일요일에, 그것도 같은 회사 사람을, 그것도 무려 이대에서!! 만나고자 했던것은, 내가 언젠가부터 먹고 싶다고 외쳤던 롤카베츠를 파는 식당이 거기에 있다고 먹으러 가자고 상대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롤카베츠로 나를 낚았........난 롤카베츠로 낚이는 여자 ㅠㅠ 여튼, 그런데, 그 식당에 도착하니 그 날 하루는 영업을 안한다고................................................orz 내가 무려 일요일에 이대까지 왔구먼!!!!! orz


여튼 그래서 고기를 구워 먹고 술을 마셨다. 고깃집도 또 2차도 다 상대가 이끄는대로 따라갔는데, 오, 2차로 간 바(bar)가 완전 마음에 드는거다. 칵테일도 팔고 와인도 팔아. 안주는 5천원짜리 채소모듬. 대박. 파프리카 집어 먹으면서 마가리타 잔에 묻은 소금을 핥았고 와인을 주문하면서는 많이 달라고 말했다. 근데 진짜 많이 줘가지고 무려 와인잔의 7부나 따라주는 게 아닌가! 심지어는 신청곡도 몇 개 요청했는데 틀어줬어. 나는 마가리타와 와인이 있는 이곳에 내가 좋아하는 harlem blues 가 나오는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 되어가지고 아 어떡해 너무 좋아, 하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나를 보고 상대는 "울어도 돼요" 라고 말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문제는 이 다음부터다. 눈을 떠보니 새벽 세시를 넘겼고 내 방 안이었다. 응? 난 누구, 여긴 어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내가 대체 여기에 어떻게 누워있게 된 건지 기억나질 않는거다. 씨양-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나는 얼른 핸드폰을 살폈다. 그래도 명색이 내가 직장 상사인데 2차까지 그에게 내게한 진상짓을 벌인건 아닌가 싶어서 일단 2차를 결제했다는 문자 메세지가 있는지 보았다. 있었다. 어휴, 다행이다. 그런데 15,000원의 문자메세지..는 뭐지? 2차 계산한 다음에 온 거네? 나..택시 타고 온건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기억이 절대 안나. 그리고 방 안을 둘러보니 완전 난장판이었다. 입고 나갔던 코트와 원피스와 스타킹이 제각가 뱀이 허물벗듯 벗겨진 상태 그대로 방 여기저기에 놓여있었다. 헉. 나 기절해있었네. 세수는 하고 잤나 싶어서 거울을 들여다보니 하고 잤나보다. 섀도우가 지워져있다. 그리고 샤워는 하고 잔건가 궁금했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 정신에 속옷을 빨아 널고 잤네? -_- 이건 뭐, 멘탈의 승리다. 필름이 끊긴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상대에게 실수는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서 묻고 싶지만, 차마 쪽팔려서 물을수가 없다. ㅠㅠ



여동생과 남동생과 함께하는 그룹채팅창에 확인하지 않은 메세지가 있었다.


여동생: 락방 집에옴?

남동생: 자고있엉.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귀여운 것들.



그나저나 롤카베츠를 못먹었으니, 그걸 먹기 위해 다시 한 번 사적인..만남을 가져야 하는걸까. 킁. 여전히 머리가 핑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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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3-01-21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 망설이는 거에요?!! 당장 약속을 잡아욧!!!!

다락방 2013-01-21 16:45   좋아요 0 | URL
일요일 외출은 너무 힘들어요 레와님. 또다시 일요일에 만나야 한다면 안만나겠어요. ㅎㅎㅎㅎㅎ

2013-01-21 1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21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3-01-21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섹스상담치료사라는 직업이 현실에도 있는건가요? 정말 진짜루??

뿌하하하하 태그를 지금 읽었어요. 사랑그너머에뭐가있냐잠자리가있냐 크흐흐흐흐

뜨끈한 라면으로 해장하시길^^ 그리고 담번엔 꼭 그분과 롤카베츠를 맛나게 드시길!


다락방 2013-01-21 16:48   좋아요 0 | URL
국내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꼭 필요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닌것 같아요. 철저한 프로의식이 있어야겠고, 그 외에도 여러가지 마음가짐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점심에는 밥과 함께 사발면에 물을 부어 먹었습니다. 피곤해요, 마중물님. 흑흑

Mephistopheles 2013-01-21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에 글고 뒤에 글을 연결해서 읽으면서 곰같은 뒷모슬을 들썩거리면 혼자서 킥킥거리며 웃는 중..

(해장은 뭘로????)

다락방 2013-01-21 16:49   좋아요 0 | URL
저는 진짜 제 뒷모습에 엄청 자신이 없어가지고 누가 뒤에서 오는거 싫어요. 흑흑. 뒷모습이 곰같아서 흑흑 ㅠㅠ


해장은 라면으로! 저는 라면을 먹어야만 해장이 되더라구요. 저렴한 취향 ㅋㅋㅋㅋㅋ

꿈꾸는섬 2013-01-21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과음, 저도 얼마전에 했는데 ㅋㅋ 오랜만에 기억이 끊겨죠. 다행히 애들은 친정에 맡겨둬서 다행이긴했는데, 다음날 정말 괴롭더라구요.ㅜㅜ
롤카베츠 먹으러 다시한번 만나요.^^

다락방 2013-01-21 16:49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 아침에 술을 끊겠다고 다짐 또 다짐을 ㅠㅠ
나이 들어서 그런지 술 먹고 다음날이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흑흑.

롤카베츠는, 글쎄요. ㅎㅎ

moonnight 2013-01-21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내 친구가 그 일을 하고 있다면 넌 정말 천사야. 하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내 연인이 혹은 배우자의 경우라면 진심으로 격려해줄 수 있을지 저도 자신이 없네요. 위선자. ㅠ_ㅠ;;;
영화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아마도 못 볼 듯. vod나오면 봐야겠어요. ;

오늘은 그 식당 열겠죠. 얼른 롤카베츠 약속 잡으세욧. ㅋㅋ (말로만 듣던 사내연애라니. 두근두근. 혼자 막 김칫국물 마시고 있음;)

다락방 2013-01-21 16:5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제 친구가 하고 있다면 존경심마저 들것 같은데, 그걸 제 연인이 한다면 감당하기 힘들어질 것 같아요. 아무리 내 자신에게 '그건 그의 일이다' 라고 되새긴다해도 글쎄요, 제 감정이 그걸 감당을 못할듯해요.

사내연애는 무슨. ㅎㅎ 그런건 아니에요. 낭만적인 감정은 없었고 뭐랄까 예의가 있었죠. 제가 상사니까? ㅋㅋㅋㅋㅋ 여튼 간만에 즐거웠어요. 젊은 총각과 함께하는 시간은(쿨럭;;) 대체적으로 즐거워요. 하하하하하.

카스피 2013-01-22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젊은 총각과 함꼐 한 시간이 재미있으셨나봐요^^
그나저나 롤카베츠란 무언가요? 야심한 밤 먹는 이야기를 들으니 넘 배가고파지네용ㅡ.ㅡ

다락방 2013-01-24 18:40   좋아요 0 | URL
롤카베츠는 일본 음식인것 같은데 저도 자세한건 잘 모르구요, 고기를 양배추로 싸서 데우는 음식 같아요. 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