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이브 아침이었나. 나는 신문에서 시 한 편을 읽었다. 그래서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는데 주문을 하진 않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 약속이 일찍 끝나서 나는 생각난 김에 잠실역에서 교보에 들렀다. 시집 코너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시집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직원에게 그 시집을 찾아달라 요청했다. 직원은 검색대의 키보드를 누르다가 시집 코너에서 서성이더니 다시 돌아와 없다고 했다. 재고에 있다고 나오는데 아마도 다른 손님이 들고 계신 모양이라고 했다. 그 날 내 가방은 무거웠고 컨디션도 안 좋았다. 찾지 못한 시집이 너무 아쉬웠다. 해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데이트중인 남동생에게 혹시 지금 네가 있는 근처에 서점이 있다면 이 시집을 한 권 사다 주지 않겠냐고 문자를 넣었다. 남동생은 코엑스이고 서점에 갔지만 재고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며 답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알겠다고 했고 그 시집을 크리스마스 이브 밤에 읽고자 했던 내 계획이 틀어져 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자정을 넘겨 크리스마스로 가던 그 순간, 나는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속에 있던것을 다 게워냈다. 약을 먹었는데도 얹힌 속이 개운하지 않았는데 다 게워내고 손을 따고 나니 그제서야 살 것 같았다.
그 때 내가 읽고자 했던 시집은 이 시집이었다.
그리고 내가 신문에서 보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듯한 느낌을 받았던 시의 전문은 이렇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학생이 아니다
졸업한 지 오래됐다
당신은 노동자다 주민이다
시민이다 국민이다 아버지다
가정에서 존경받는 남편이고
학부모며 집주인이다
환자가 아니고 죄인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당신은 이 모두다
아침이면 건강쎈터로 달려가 호흡을 측정하고
저녁이면 영어강습을 받으러 나간다
노동자가 아니기에 구조조정엔 찬성하지만
임금인상투쟁엔 머리띠 묶고 참석한다
집주인이기에 쓰레기매각장 건립에 반대하지만
국가 경제를 위한 원전가 운하 건설은 찬성이다
한 사람의 시민이기에 광우병 소는 안되지만
농수산물 시장개방과 한미 FTA 는 찬성이다 학부모로서
학교폭력은 안되지만, 한 남성으로서
원조교제는 싫지 않다 사람이기에
소말리아 아이들을 보면 눈물 나고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는 반대하지만
북한에 보내느 쌀은 상호주의에 어긋나고
미군은 절대 철수하면 안된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크리스마스 다음날, 교보문고에서 바로 드림으로 찾아 그날 밤 꼭 읽어야지 했다가, 잠실 교보에서는 일주일 후에 찾을 수 있다길래 다시 포기하고 결국은 장바구니에 있던 책으로 결제했다. 다른 책과 함께 오느라 토요일날 배송된다 했고, 나는 토요일에 이 시집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설레었다. 집으로 도착한 책 박스를 뜯어 책을 꺼내고 이 시집을 제일 먼저 꺼내들었다. 이 시는 맨 마지막에 실려 있어서 맨 마지막을 펼치고 이 시를 읽었다. 그리고 뒤에서부터 앞으로 거꾸로 시들을 읽기 시작했다.
수조 앞에서
아이 성화에 못 이겨
청계천 시장에서 데려온 스무 마리 열대어가
이틀 만에 열두 마리로 줄어 있다
저들끼리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먹힌 것이라 한다
관계라니,
살아남은 것들만 남은 수조 안이 평화롭다
난 이 투명한 세상을 견딜 수 없다
참, 좆같은 풍경
새벽 대포항
밤샘 물질 마친 저인망 어선들이
줄지어 포구로 들어선다
대여섯 명이 타고 오는 배에
선장은 하나같이 사십대고
사람들을 부리는 이는
삼십대 새파란 치들이다
그들 아래에서 바삐 닻줄을 내리고
고기상자를 나르는 이들은, 한결같이
머리가 석회처럼 센 노인네들뿐
그 짭짤한 풍경에 어디 사진기자들인지
부지런히 찰칵거리는 소리들
그런데 말이에요
이거 참, 좆같은 풍경 아닙니까
부자나 정치인이나 학자나 시인들은
나이 먹을수록 대접받는데
우리 노동자들은
왜 늙을수록 더 천대받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책을 읽었다.
수상작도 내 생각보다 별로고 수상후보작들도 딱히 좋진 않다. 올해 여름에 읽었던 『2009 황순원문학상 작품집』과 작년에 읽었던 『2010 황순원문학상 작품집』은 좋았는데, 그래서 현대문학상 소설집도 기대했는데, 좋질 않네. 여하튼 실린 작품들중 '조해진' 의 「홍의 부고」에 이런 문장이 있다.
근데요,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어디가 좀 불편하세요? 아니,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요. 뭔가에 쫓기는 사람 같다고나 할까. 혹시 이 약요, 한 알 드셔보시지 않을래요? 저도 가끔 먹는 항불안젠데,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을 때 확실히 도움이 되거든요. 약사는 이런 게 좋은 것 같아요. 처방전이 필요한 약도 그냥 먹을 수 있다는 거. 물론 들키지 않게 조심조심 빼돌려야 하는 어려움은 있지만요. 정말, 필요 없으세요? 이거 구하기 힘든 약인데 ‥‥‥ 약을 잘 모르시는구나. 어떤 약은요, 사람 같아요. 아주 정교하고 섬세하고 게다가 말도 없는 사람, 그래서 위로를 주면서도 생색내는 법이 없죠. (p.192)
물론 나는 이런 약을 내가 사 먹을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약의 효과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는 약이란 거 자체를 먹는걸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내 힘으로 이겨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 문장을 읽는데 저 약에 대해 한순간 유혹이 느껴지는거다. 나도 불안할 때가 있으니까, 가끔은 너무너무 불안하고 두려우니까. 그럴때 정교하고 섬세하고 말도 없이 위로를 주는 그런 약이라면, 한 알쯤 먹고 싶어질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 약을 먹고서는 더 두려워할 거란 사실을. 이 약이 대체 뭐길래 내 마음과 정신에 영향을 미치지? 하고. 그러니 어쩌면 나는 그 약을 사두고 보관한채로 그저 '언제든 먹을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삼을 그런 사람일것이다.
음악이 그렇고 그림이 그렇고 영화가 그렇듯이 책도 개인적 체험으로 읽을 수 밖에 없다. 어떤 일 때문에, 나에게 일어난 아주 작고 사소한 일 때문에 어떤 책이 좋아질수도 또 싫어질 수도 있다. 나는 이 수상집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김연수'의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것」의 이 문장을 읽고 잠시간 멍해졌었고, 정신을 차린 후에는 책 모서리를 접어두었다.
"사진을 찍어준 사람은 그 치과에서 일하던 간호사였습니다. 24번 어금니를 뽑은 뒤, 그 여자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지요. 사진에 찍힌 내 눈망울을 크게 확대하면 그 간호사의 모습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 여자의 흔적은 거기에만 남아 있으니까요." (p.80)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특별하게 읽지히 않을 이 문장이, 그러나 내게는 달랐다. 나는 어느 해의 11월을 떠올렸다. 나는 사진을 보고 있었다. 사진속 남자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계속 계속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그 눈동자속에 그 자신의 모습이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게 좋아서 웃었었다. 나는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동시에 그의 모습도 보았다. 아마 이 사진을 이렇게 오래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그 모습을 찾기도 한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존재하지 않을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뿌듯했다. 여기까지 써놓고 피식 웃었다. 그 사진은 나 때문에 찍은거였다는 사실이 기억나서.
결코 잡히지 않는게 있다. 사실은 죽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가진채로 잡는 모기가 그렇고, 또………관두자.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휴무였던 남동생은 31일은 내일도 휴무란다. 진짜 헐, 소리가 절로 나와. 그런 남동생이 지금은 동네 선배와 순대국을 먹으러 나갔다. 소주 마시냐고 묻는 나의 문자에 맥주를 마신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 졸 부럽다. 속을 게워냈던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 남동생은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남들이 하나씩 먹을 땐 누나도 하나씩 먹어. 혼자 두개씩 집어먹지 말고.
앞으론 그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