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레가토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거나 혹은 헤어지기 위해서는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 것 같다. 나의 경우로 보자면, 어떤 한 사람을 잊기 위해서는 약간의 죄책감이 필요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을 잊기 위해서는 눈물과 비참함과 내팽개쳐진 자존심과 슬픔과 절망과 오랜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 사람을 잊기 위해서 이만큼은 꼭 필요했던 사항, 이라는 생각이 이제야 들면서 그 모든 과정들을 거쳐내야만 이 사람과 제대로 헤어질 수 있는거구나, 했던거다. 만나거나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 어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단지 여분의 시간중 얼마를 내어주면 충분했지만, 어떤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초조함과 설레임과 오랜 기다림과 교통비와 속옷을 사는 비용등이 필요하기도 했다. 



누군가가 나의 '운명의 상대' 라는 것에는 글쎄, 확신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사람에겐 각자 저마다의 '운명의 흐름'같은것은 있지 않나 싶다. 너는 나의 운명이야, 라는것 보다는 내 운명의 선이 쭈욱 길게 뻗어 있다고 봤을 때, 이 시점에서 이 사람을 만나고 또 이 시점에서 이 사람과 헤어지는 것들이 그 선 상에 놓여져 있지 않는가 하는거다. 내가 스물다섯 살에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진 일이, 서른한 살에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진 일이, 다 그 흐름안에 있던게 아닐까. 내게 그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그러니까 내가 반드시 겪어내야만 할 일이 아닌가.

















이 책속의 인하와 정연과 하연을 보면서 운명의 흐름을 생각했다. 하연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폭력과 강간이, 그리고 내내 정연을 가슴속에 품을 수 밖에 없었던 인하의 죄책감과 비열함이, 학업을 포기하고 권력과 폭력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어야 했던 정연의 젊은 날들이, 그들을 서로 연결하기 위한 운명의 선에 놓인게 아니었을까. 정연의 운명의 흐름, 그 스무살에 인하가 있고 스물한 살에 하연이 있고, 하연의 서른 살에 인하가 있고, 인하의 이십대에 정연이 있고 오십대에 하연이 있고, 그 사이의 공백들에 다른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과 감정들이 있고. 겪지 않았어야 할 일들을 겪어야 비로소 그들의 운명의 흐름이 어느 시점에서 하나로 모여 만나게 되고. 



권여선의 책을 처음 읽는것도 아닌데, 권여선의 글이 원래 이렇게 맛깔스러웠던가 싶었다. 술에 취한 새벽에 일어나보니 하늘같은 선배 인하가 체해서 끙끙 앓고 있다. 정연은 급한 마음에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나도 잘 체하는디 혼자도 잘 따요. 한나도 안 아파요. 체해서 아픈 데 비할까이. 급체를 냅두면 나중엔 숨도 못 쉬고 똑 죽는 수가 있답뎌. 아무튼 나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만 알아두시요. 어젯밤엔 나가 쪼까 취해서 선배들한테 한바탕 패악을 떤 거 같은디. 살다보면 내남적없이 한분씩은 실수도 함서 한분씩은 도와도 감서 살게 마련인께 너무 탄허진 마시요. 나가요, 지금 본께 어저께 뭣이 그리 무서버서 그 고약을 떨었는가 모르겄소. 짭새가 나 잡겠다고 달겨든 것도 아니고 우쩌다 눈만 한분 딱 마주친 거뿐인디 워째 그리 등짝이 써늘하고 사지으 심이 실실 풀려부렸으까요 잉? 고건 고렇고, 우리 사람 몸땡이는 우선적으로다가 피가 사방으로 잘 통허게끔 혀줘야 무탈헌 거인디, 고것을 밤새도록 콱 막아놨은께 오죽 답답코 아펐을 것이요잉 ‥‥‥" (p.71)



체하고 아프고 무서웠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숨이 막힐듯 답답하고 아픈 와중에 저런 사투리로 내 손을 잡고 바늘을 찔러주는 그 상황에서, 그라고 애틋한 마음이 왜 생기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그의 자존심과 젊은 혈기는 그 밤을 평생 치욕스러운 밤으로 만들고 만걸까.




양고기를 건져먹은 재현의 이마에 땀이 뱄다. 진태가 혀를 찼다.

"너 매운 거 잘 못 먹냐? 그럴 줄 알았다. 욕망이 죽어버리면 그런 거야. 매운 것도 못 처먹어." (p.186)



내가 어릴적에 우리 아빠는 아주 자주 고추장에 밥을 비벼 드셨다. 나물이나 다른 넣을것이 없어도 그냥 고추장 하나만 넣어 비벼드시곤 했다. 그때마다 나도 따라서 비벼 먹었는데, 우리 식구들 중에서는 아빠와 나만 매운것을 잘 먹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빠가 언제부터인가, 고추장에 밥 비벼 드시는 일이 드물어지더니 언젠가는 신라면이 너무 맵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젠 매운 음식 먹기를 꺼려하신다. 나 역시도 예전처럼 매운걸 잘 먹지 못하는 것 같아서 내심 '나이 들면 매운걸 잘 못먹게 되는걸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욕망이 죽어버리면 매운 것도 못 먹는다니, 아, 정말 그런건가 싶었다. 욕망이 죽어버린다는 건, 내가 늙어버린다는 걸까. 예전처럼은 아니어도 나는 곧잘 매운걸 먹고 싶어져서 친구와 며칠전에도 매운갈비찜을 먹으러 갔다. 물론 먹다가 감자전을 찢어 먹고 계란찜을 숟가락으로 퍼먹어야 했지만. 욕망이 죽어버리면 매운 것도 못 처먹는다는게, 삶의 진리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 그런것 같다. 욕망과 매운것은 맞닿아 있는것 같다. 나는 여전히 생마늘을 먹는다. 그 알싸한 매운맛의 매력을 도무지 포기할 수가 없다. 가끔 너무 매운게 걸려서 고통스러워도 다음에 어김없이 또 먹곤 한다. 내 욕망은 조금 사그라들었을지언정, 죽지를 않는가보다.




나가 와 이런댜. 뭣 땀시 이런댜. 기왕지사 엎지르진 물에 깨박난 물동인디 나가 이럭해서 뭔 영화를 보겄다고 이런당가. 나부텀도 시집가기 전에 아부텀 배놓고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제. 처니가 아를 밴 그 심정을 나가 어찌 못 세아리고 이러는가 말이시. 유보살은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가슴을 쓸고 염불을 외우고 딸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에 눈물로 뺨을 흥건히 적시곤 했지만 아침녘에 곁채에서, 때로는 보고파지겠지 둥근 달을 쳐다보면은, 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걸 듣거나, 누렇게 뜨고 부석하게 부은 딸의 얼굴과 봉긋한 배를 힐긋 보는 것만으로도 십년 수도가 그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시상에 저런 고집퉁머리 신 년이 다 있어야? 그 잘난 공부는 해서 남 줬는가? 남 부끄런 건 하낙도 모르고 항차 그 꼴을 하고 왔으면 에미한테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이약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베, 이약이? 그 비루먹을 냉정한 사램이 당최 워떤 놈이냔 말여?" (pp.244-245)



지하철안에서 이 부분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공부하겠다고 한 딸, 서울로 보내놨더니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애를 배가지고 돌아왔다. 게다가 아비 없는 아이를. 그런 딸을 보며 사정을 차마 묻지도 못하고 야속해하는 엄마의 마음이 너무나 절절하게 느껴져서..휴..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읽었을 때, '앤드루 윌슨'의 『거짓말하는 혀』를 읽었을 때, 뒤에 몇 장 남지 않은 책장을 보고 초조해했었다. 아, 대체 어떻게 끝나려고 이렇게 조금 밖에 안남은거야. 고작 몇 장 되지도 않는 이 안에 어떻게 이야기를 정리하려는거야, 하고. 결말이 어떻게 나려고 고작 이만큼만 남은거야. 그 초조함을 어제 늦은 밤, 권여선의 『레가토』를 읽으면서 오랜만에 느꼈다. 새벽 세시가 그랬고 거짓말하는 혀가 그랬듯이, 그 결말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다소 영화같은 결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러나 분명히 만족했다. 때로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같고 소설보다 더 소설같기도 하니까. 식상한 표현이지만, 행복해지기를 바랄게. 흑흑.





어제는 비도 오고 날도 좀 쌀쌀해서(여름아, 어디갔었니?) 퇴근후에 동료와 함께 순대국에 소주를 마시기 위해 순대국집엘 갔다. 그런데 비가 오면 다들 순대국에 소주가 생각나는걸까. 사람이 바글바글한거다. 우리까지 앉고 나니 빈 테이블이 없는거다. 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튼 순대국에 소주는 정말 맛있었다. 




아, 권여선의 『레가토』는 소주와 맥주와 치킨과 순대국과 막걸리와 무척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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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2-09-01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맵고 개운한 거 먹고 싶어요.

다락방 2012-09-03 12:31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 엄청 매운걸 먹고 싶어요, 드림아웃님. 점심 메뉴는 낙지덮밥으로 할겁니다. 흣.

람혼 2012-09-01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 그 자체는 여전히 잘 모르겠지만, 기이하게도, 정말 운명의 '흐름' 같은 건 있는 것 같아요. 오랜만에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다락방 2012-09-03 12:33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요, 람혼님. 왜이렇게 오랜만에 오신거에요! 3~4주 전이었나, 경향신문에서 람혼님이 등장한 한 페이지를 보고 여동생에게 들이밀며, 나랑 아는 사이야, 하고 한껏 으쓱거린 기억이 새록새록하네요. ㅎㅎ

네, 운명의 흐름 같은게 정말 있는 것 같아요, 람혼님. 람혼님이 9월 1일에 여기 오셔서 댓글을 달아주시고, 또 제가 반가워하는 그 모든것들이 그 흐름선상에 놓여 있는 거겠죠.
:)

단발머리 2012-09-02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소주와 맥주와 치킨과 순대국과 막걸리와 무척 잘 어울리는 소설 이야기 잘 듣고 갑니다. 전 너무 구수한 사투리가 나오는 소설은 이해가 잘 안 되서, 아예 소리내서 읽거든요. <레가토>도 웬지 그렇게 읽어야할 것 같아요.ㅋㅎㅎ

다락방 2012-09-03 12:33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저도 사투리는 소리내어 읽기도 해요. 이 소설 속에서의 사투리는 계속 나오는게 아니라 어쩌다가 툭툭 튀어나와서, 사투리 안에 가장 진실한 감정이 내포되어 있는것 같아요. 그래서 사투리 부분마다 웃게됐다가 눈물이 찔끔났다가 했던 것 같아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단발머리님!!

moonnight 2012-09-04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요? 저도 꼭 읽어볼래요. 다락방님의 권유대로 소주맥주순대국막걸리 펼쳐놓고서요. ^^

다락방 2012-09-07 11:09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은 손수건 들고 눈물을 닦게 될지도 몰라요. 흑흑.

얼음장수 2012-09-1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첫사랑과 헤어진 후,
매운 음식을 못 먹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심리적인 거라 생각했는데, 몸에서 통 받아주질 못하네요.
사랑을 잃은 것보다 매운 맛의 쾌감을 잃은 게, 더 슬프요. 지금은.

ㅎㅎ <레가토>, 역시 좋은가 보네요.

다락방 2012-09-14 11:02   좋아요 0 | URL
하아- 얼음장수님, 이 댓글 너무 슬퍼요.
첫사랑과 헤어진 후 매운 음식을 못 먹게 되었다는 것도, 이제는 매운 맛의 쾌감을 잃은 게 더 슬프다는 것도,
너무 슬프네요.....뭔가 매운 걸 사드리고 싶은 욕망이....( ")


레가토는 좋습니다, 얼음장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