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부터 8월 28일까지 나는 이런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이런 책들을 읽다가 중단했다.
위의 모든 책들은 각자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떤 독자들에게는 제대로 먹혀들어갔을 것이고.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이 모든 책들이 저마다의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거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내게 의미를 주지는 못했다. 이 책들은 내게 조금 혹은 많이 부족함을 안겨줬다. 『건투를 빈다』와 마찬가지 이유로『삶은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를 몇 장 읽고 더이상 읽어낼 수가 없었는데, 나는 책 속에서 '내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을 보고 배우기를 원하지 누군가 내게 '이렇게 하는것이 좋은것이다' 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삶은 나를 배반하지 않는다』의 경우 저자는 자신의 말에 자신이 색깔을 입혀놨더라. 자기가 한 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주장하는 바를 자신이 강조한 것이다. 색깔 입혀진 글씨를 보는 순간 책장을 덮어버렸다. 그래도 산 지 얼마 안되는 새 책인데, 꾹 참고 읽을까 하다가 아니야 그 시간에 다른 책을 읽자 싶어서 고개를 젓고는 두 권 다 중고샵에 팔아버렸다.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의 경우 열 장쯤 읽었는데 책장이 안넘어간다.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을 두 권 읽었는데 무척 재미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책도 재미있을거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잘 안넘어간다. 그래서 이것도 같이 중고샵에 팔아버릴까 하고 고민하다가 아니야, 빌 브라이슨이잖아, 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거야,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다시 읽어보자, 하고 여전히 책장에 꽂아두었다. 그리고 친구가 호주에 머무르고 있는데, 앞으로 친구가 얼마간 살게 될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얘는 보류다.
책들을 이렇게 여러권 읽었지만 나는 몹시 갈증이났다. 채워지지 않는 듯한 기분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까. 욕구 불만에 쌓이는 것 같았다. 다들 왜이래, 싶은 심정이랄까. 이건 쉽게 단정짓자면 '취향의 문제' 이기는 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책이 될 수도 있는 책들이 내게는 갈증만 주는 책이 되기도 하는 이런건. 신경질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뭔가 제대로 된, 꼭꼭 씹어먹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나는 『에피 브리스트』를 꺼내 읽었다. 그리고 그건, 제대로된 선택이었다.
이 책의 절반쯤을 읽었을 때, 아, 책 선택 정말 적절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갈증이 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그래, 나는 이런 책을 원했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바로 이런게 내가 원하던 거야, 하고. 방 안 구석에 콕 처박혀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채로 이 책을 읽고 싶었다. 마구 훌륭하다고 감탄하는 지경까지 간 건 아니지만, 정말이지 이 정도로 나는 충분했던거다.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어 참지 못하고 리뷰를 썼는데, 리뷰를 다 쓰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다른 책 읽기를 포기하고 자꾸만 이 책에 대해 생각했다. 에피 브리스트가 한 잘못이 사회적으로 매장당할만한 짓이었나? 19세기에는 정말 그랬던가? 나였다면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을까? 나는 자신이 없는데, 만약 내가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가족으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외국으로 도망가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아니, 19세기에는 혼자 외국으로 도망간다는 건 굉장히 벅찬 일일까? 하긴.. 경제적 능력이 전무하니 도망갈 돈도 없었겠지. 에피 브리스트의 부모가 에피를 받아주지 않은게..부모의 잘못일까? 부모도 부모의 삶을 살아야하잖아? 언제까지고 자식 뒷바라지를 해줄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까 왜 열일곱 살에 결혼을 시키냐고. 명예와 안락함을 선택하고 또 그 남자를 신랑으로 받아들인건 에피 본인이잖아? 그러니 책임도 에피의 것 아니야?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모든걸 다 받아들인다는 것도 너무 가혹하지 않나? 만약 에피가 결혼한 여자가 아니었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됐다면? 꿋꿋이 싱글이었다면? 그러면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한들 그게 죽을죄였을까?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진 않았겠지? 역시 결혼이란게 문제인건가?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좋은 책이란 이런게 아닐까, 하는. 그러니까 자꾸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것, 자꾸자꾸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게 하는 것. 말을 하고 하고 또 해도 또 할 말이 쏟아질 것 같은 그런 책. 그런게 바로 좋은 책이 아닐까. 책장을 덮고 나면 다 읽었다, 하고 끝나버리는 게 아니라, 책장을 덮고서도 한참을 미간을 찌푸린채로 생각하게 하는 책, 누군가와 자꾸 얘기하고 싶어지는 책. 바로 이런게 좋은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누군가에게 좋은 책은 재미를 주는 책일 수 있다. 물론 나도 재미를 주는 책을 아주 많이 좋아한다. 누군가에게 좋은 책은 교훈을 주고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책일 수 있다. 또 어떤이들에게 좋은 책은 정보를 주는 책일 수 있고, 지식을 주는 책일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좋은 책은 이런책이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그 책이 확 끊어지지 않는 책. 책장을 덮었다고 해서 그게 끝이 아닌 책. 내게는 그런 책이 좋은 책이다. 나라면, 하고 끊임없이 돌아보게 만드는 책, 내게는 그런 책이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