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는 어떤 관계에서도 친밀감을 원했다. 칼에게서는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청년은 정중하게 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해하는 듯했다. 칼은 리가 자신에게 성적 관심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조금 주저하다가 결국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칼이 리에게 말했다. "리를 안 만날 수는 없으니까, 내가 다른 것들에 대해서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군요." (p.28)
지독하게 재미없는 소설이지만 이 구절만큼은 자꾸 생각이 난다. 내가 친밀해지고 싶은 상대가 나에게 성적 관심을 갖고 있다면? 그렇다면 나도 그를 '안 만날 수는 없으니까' 다른것들에 대해 마음을 바꿀 수 밖에 없게될까? 그건 상대에 따라서 다르다는게 아마도 가장 정답일 것 같다. 내가 상대에게 혹은 상대가 나에게 일방적인 성적인 관심을 가진 상태라면 그 관계를 '친구'만으로 유지하기가 너무 힘이 드니까. 내 경우에도 그런 일이 있었을 때 관계를 끊는걸로 결정했었다. 나에게 성적인 관심을 저 혼자 가지고 있는 남자를 만나는 것도 나는 싫고, 내가 혼자 상대에게 성적인 관심을 가진채로 만나는 것도 힘들어서 못해먹겠으니까. 자고로 힘들게 하는 사람은 끊어버리는 게 상책이라는게 내 결론.
이 책 제목에서 말해주듯이 이 책은 '리'라는 퀴어에 관한 이야기이고, '칼'은 역시 같은 동성인 남성으로서, 내가 남자로부터 일방적으로 받는 성적인 관심에 대한 거부감이라거나 부담 보다 그 감정이 훨씬 컸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성애자인데 동성이 내게 성적인 관심을 내비친다면? 음..잘 모르겠다. 일단 거부, 는 아닐 것 같고 이것 역시 상대에 따라서 어쩌면 나는 내 마음을 바꾸게 되지 않을까.
시원해지려고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맥주를 마시니 땀이 난다. 휴..
지금은 내 근처에 없는 사람이, 아니, 한 번도 내 근처에 있어본 적 없었던 사람이 오래전에 추천해준 '박민규'의 『근처』를 읽었다. 그 친구가 왜 이 작품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이 작품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친구가 좋아할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인생의 쓴 맛에 대해 말하는 소설을 그 친구가 좋아했던가? 내가 잘 모르고 있었나보다.
이 작품보다는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이 좀 더 좋았는데 일단 이 작품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것처럼 입맛이 참 쓰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그건 주인공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처음으로 가족이란건 이런걸까, 하는 애틋함을 갖게 한 여자, 아파서 앓고 있는 내 이마위로 물수건을 올려다준 여자, 내 옆에서 잠들어주고 사랑인것 같은 감정을 준 여자, 그 여자가, '괜찮아 안에 해도 돼' 라고 말한 그 여자가,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나 돈 좀 빌려 줘. (p.47)
후아- 정말 미칠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무하고 허탈했다.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그리고 화가났다. 그래, 여자가 만약 남자에게 진실된 마음으로 대했다고 한들, 정말로 그에게 사랑을 느껴서 그를 정성스레 간호했다한들, '돈 좀 빌려줘' 앞에서는 모두 무색해지는 것이다. 만약 내가 이 남자였다면, '아, 결국은 돈을 빌리기 위해서 나랑 사귄거구나' 하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을 것 같고, 그건 나를 한없이 비참하게 만들었을 것 같다. 나는 결국 나라는 인간 보다는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지기만 하는걸까, 하고. 그래서 관심있는 그리고 애정어린-그게 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착각이었다해도- 사람의 무심코 던진 한마디 말은 나를 지옥으로 끝없이 떨어뜨리는거다.
아직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는데-뒤에 세 편을 남겨두었다- 내가 읽은 부분까지의 작품들이 거의 다 좋다. 매 작품들 모두 한마디씩 하고 싶은데, 김애란의 작품이 특히 좋았다. 장편인 『두근두근 내인생』보다 나는 이 책에 실린 단편쪽에 훨씬 더 점수를 주고 싶다.
그러니까 줄거리는 이렇다. 직장을 관두고 실업자로 있으면서 많이 살이쪄버린 여자가 친구의 부고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가야 하는 날, 대학때 흠모했던 선배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는다. 저녁에 장례식장에 가야한다고 하는 여자에게 오후에 잠깐 보면 된다고 한 것. 그녀는 장례식에 갈 의상을 차려입고 선배를 만나러 가는데 선배는 그녀에게 오랜만에 만나서는 일을 부탁한다. 방송국 AD 로 있는데, 그녀에게 단역을 맡아달라고 한 것이다. 그녀는 보수도 후하다는 말에 알겠다고 했는데, 그녀가 맡기로 한 단역에 의상이 있다. 그녀는 이때부터 자기가 왜 거절하지 못했는지 후회에 후회를 거듭하게 되는데, 그 의상이란 것이 레슬링 복이었고, 먹기대회 우승자인 날씬미녀 뒤에서 그녀와 함께 핫도그 먹기를 겨루는 단역들 중 한명으로 나오는거다. 그러니까 그 프로그램의 취지는 저렇게 잘 먹게 생긴 덩치있는 사람들보다도 이렇게 날씬하고 예쁜 미녀가 더 잘 먹는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아...정말 비참하다 비참해.
일전에 이런 비슷한 내용의 외국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아주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라서 제목은 생각이 안나는데, 영화속에서 배경은 고등학교였다. 그 학급에서 가장 뚱뚱한 소녀가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같은 반 소년 하나만이 유일하게 말을 걸어주었는데, 어느날 학교의 잘나가는 소녀들이 자신들의 파티에 이 뚱뚱한 소녀를 초대한다. 소녀는 이 꿈만같은 초대를 받아들이고 그 파티에 참석하는데, 이 잘나가는 소녀들이 자신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의식을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건 바로 수영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그래서 그 뚱뚱한 소녀는 내키지 않지만 그들의 무리에 끼고 친구가 되고 싶다는 바람 때문에 그 수영복을 받아들고 입는다. 그리고 소녀들이 한 방의 문을 열며 이 방에 들어가있으면 우리가 너의 친구가 될거야, 라는 말에 따라 그 방에 들어간다. 방문은 밖에서 닫히고 그녀는 기대감에 들떠 그 방안을 둘러보다가, 그 방에서 유일하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었던 소년과 맞닥뜨리게 된다. 소녀들이 그를 그 방안에 두고 그녀를 들여보냈던 것.
뒤늦게 소녀들의 속셈을 알게 된 소녀는 마구 울고 소리지른다.
그 부끄러움을 그녀는 대체 어떻게 감당해야할까. 무엇보다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소녀들로부터 이용당했다는 걸 알게 된 그 심정은 대체 얼마만큼 무너졌을까. 아니, 예쁘게 보이고 싶었던 남자 앞에서 자신의 치욕스런 모습-수영복을 입은 모습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을 보인 소녀의 기분은 대체 어떤거였을까. 내가 그 영화를 끝까지 다 본건지 아니면 그 장면만 본건지는 생각이 안나는데 그 장면만이 기억에 남아있기는 하다.
김애란의 이 단편, 「너의 여름은 어떠니」에서 이 여자가 느꼈을 비참함은 대체 어디까지였을까. 얼마만큼 자신의 자존심을 바닥으로 떨어뜨렸을까. 무엇보다 대학시절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던 남자인데, 단조로운 자취방에서 깜빡이는 문자메세지에 정신을 놓게 했던 사람인데.
"이 사진 좋다."
선배가 '자동 넘김' 장치를 정지시키며 말했다.
"난 싫은데."
"왜?"
"이 가방 때문에요. 옷이랑 너무 안어울리잖아요. 다리도 굴게 나오고."
나는 황토색 인조가죽 가방을 가리키며 투덜댔다. 당시 내게 하나밖에 없던 가방이라, 아무 옷에나 줄기차게 들고 다닌 거였다.
"난 저 가방 때문에 이 사진이 좋은데."
선배가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했다.
"에? 왜요?"
선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여자의 '생활'이 보여서." (pp.190-191)
그런 말을 했던 남자가 살찐 여자를 불러서 레슬링 복을 입게 하고 먹기대회에 참석시킨게 나쁜걸까. 아니면 남자는 기억도 하지 못할일을 몇 년이 지난후에도 기억하면서 그 환상을 붙들고 있던 여자가 어리석은걸까. 내가 들고 다닌 가방을 가리키며 내 생활을 볼 수 있어 좋다고 말한 남자는 정말 아무 뜻도 없이 한말인데 나는 그 말에 그리도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건가. 아, 정말이지 좋아하는 사람의 한마디 말이란 얼마나 많은 또 큰 의미로 다가오는가. 가슴이 아프다. 결국 그 남자 앞에서 레슬링 복을 입고 비참한 마음을 누르며 핫도그를 먹었어야 하는 그 여자가 자꾸만 눈앞에 그려져서. 나는 마치 그여자가 된 듯 아주 많이 가슴이 아프다.
한적한 동네 까페에서 시원한 커피와 함께 이 책을 읽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그 찜통같은 더운 길에서 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이 책속의 여자였다면, 나는 그 남자를 얼마만큼 좋아했든, 얼마나 오래 좋아했든, 내가 거절해서 그의 입장이 얼마나 더 난처해지든 상관없이, "난 안해 이 머저리같은 자식아!" 하고 그 자리를 뛰쳐나왔을 거라고. 나는 정말 그럴거라고 새삼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
아, 결국은 보잘것 없었던 과거의 사랑이여, 안녕.
나까지 이런말을 하고 싶진 않은데, 아, 참 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