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샵에 팔 책과 오늘 출근길에 읽을 책까지 총 네 권의 책을 아침에 들고 나왔다. 핸드백이 크니 그 안에 넣어 가져갈까 하다가 한 쪽 어깨가 너무 힘이 들것 같아, 크라제버거를 포장할 때 받아온 투명 비닐에 넣었다. 제법 단단한 소재여서 구멍나지도, 뜯어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투명 비닐이라 당연히, 비닐 안의 내용물이 다 보였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강변역에서 내려, 강변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탔다. 빈 자리는 없었다. 나는 위치를 잡고 서서 이제 책을 읽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내가 서있던 곳의 앞자리에 앉아있던 아주머니께서 말을 걸어오셨다.
무슨 책을 이렇게 많이 들고가?
하하. 나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아 그저 네, 하고 웃었다. 아주머니는 주섬주섬 자신의 짐을 챙기시더니 일어나시며 내게 여기 앉아, 라고 하신다. 나는 아니라고 됐다고 했다. 책 네 권 들고 지하철에서 서서 간게 어디 하루이틀인가. 이쯤은 충분히 갈 수 있다. 물론 앉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아주머니는 나는 다음다음역에서 내리는데 저 끝까지 걸어가서 내려야 해, 그러니까 앉아, 라고 하시는거다. 나는 네, 고맙습니다, 하고 자리에 앉았다. 꺄울. 책이..책이......나를 의자에 앉게했다! 책은 살아가면서 참 이러저러한 도움을 주는구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게다가 나는 아주머니의 반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어쩐지...나를 지금의 내 나이로 보는게 아니라 훨씬 더 젊은 여자로 보아주는 것같은 느낌?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동안도 아닌데, 어쩐지 어려보이는 이런 기분. 움화화화하하하하하하하하핫...음...웃는데 왜 공허하지?
오늘 아침 출근길에 바쁘게 꺼내 챙겨온 책은 신경숙의 『모르는 여인들』이었다.
첫번째 단편인 「세상 끝의 신발」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나는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어지면 그 사람 신발에 발을 몰래 넣어보고 싶다. 소녀 시절엔 내 또래 여자아이들의 운동화 속에, 처녀 시절엔 그 남자들의 구두 속에 내 발을 몰래 넣어보았을 것이다. 여자든 남자든 젊은이거나 나이든 이거나 가리지 않았다. 그동안 나와 친밀하게 지냈거나 지금 그렇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도 모르게 이미 내가 그들의 신발에 내 발을 가만 집어넣어봤다는 것을 알는지. (p.26)
이 구절을 보자 나는 자연스럽게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가 떠올랐다.
영화속의 여자는 아주 어릴때부터 부잣집의 식모로 일하고 있다. 어느날 주인집 소년의 친구가 이 집에 놀러오고, 소녀였던 여자는 그 남자에게 연정을 품는다. 그리고 어찌어찌하여 그 친구의 집의 식모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처녀가 된 그녀는 여전히 청년이 된 주인을 사모하고 있는 것. 영화는 시종일관 조용한 분위기에서 펼쳐지는데, 하루는 그가 안보는 틈을 타 그녀가 그의 신발을 신어보는 장면이 있다. 가만히, 그의 신발에 자신의 발을 밀어넣는 장면.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어, 라고 그녀가 말하고 다니지 않아도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그에 대한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랄까.
신경숙의 단편을 읽으며 혹시 신경숙은 그린 파파야 향기를 본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하다가 그런데 이렇듯 좋아하는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또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로 말하자면 싫거든. 누군가의 신발에 내 발을 밀어넣는 일은, 정말이지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양말을 신고 신는거라면 그럴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맨발이라면 난 결코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고 싶지 않다. 친구든 연인이든 여자든 남자든, 그가 누구든 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고 싶지는 않다. 방금 벗어놓은 신발이라면 그 사람의 발온기가 그대로 있을텐데 그걸 느끼는 것도 끔찍하고, 그 사람의 무좀이라도 옮으면 어떡해, 아, 그것도 싫어. 게다가 그 신발이 신은지 좀 되는 신발이라면 발냄새도 베어있을텐데. 워워워워~
물론, 내 신발을 누군가가 신어보는 것도 싫다. 발은 지독하게 내밀하고 지나치게 사적인 신체부위가 아닌가 싶다. 그 발을 내보이는 것도 내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은 아닌것 같다. 맨발로 샌들을 신고 거리를 다니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지언정, 실내로 들어가 맨발인 채로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건, 살짝 불편해지는 일인것이다. 그런 내밀하고 사적인 내 발이 신고 다니는 신발을 누군가가 신어본다는게 나는 좀 내키질 않는다.
내밀하고 사적인 발, 이라고 하니 '공리' 주연의 영화 『붉은 수수밭』도 생각난다.
중학교때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졸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선명히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여자(공리)는 어느 집으로 시집을 가게됐는데, 거기까지 가마를 타고 가야했다. 먼 길을 가다가 가마꾼들이 쉬기 위해 잠시 가마를 내려놓았는데, 가마꾼 중 한명이 그 가마 앞으로 가서, 가마 앞천막 밖으로 살짝 빠져나온 여자의 발을 자신의 손으로 덥썩 잡았다. 여자는 흠칫 놀라 발을 안으로 쏙 들여오는데, 와, 그 장면을 중학교 1학년때 보면서 어우..씨...저건 뭐지, 했던. 그 뒤로 생각나는 장면은 결국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수수밭으로 들어갔고, 남자는 여자와 그 수수밭에 눕기 위해서 길다란 수수들을 발로 밟아 평평하게 만들었던....................................................
강하게 느껴지는 남자가 갑자기 힘줄이 드러나는 자신의 큰 손으로 내 맨발을 덥썩 잡는 장면을 상상해보니........이 아침이 뜨겁다.
소설이 마음에 드느냐 혹은 들지 않느냐와는 별개로, 한국 소설을 읽을 때 굉장히 내게 잘 맞는 언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니, 내게 잘 맞는게 아니라,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이 단어, 혹은 이 문장이 아름답게 다가온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공지영과 츠지 히토나리가 쓴 책에서는 공지영이 '연둣빛' 트레이닝복을 얘기할 때 그 장면이 선명하게 다가와서 츠지 히토나리의 책보다 좋다고 느껴졌는데(그것보다 좋다는 거지 그 책이 좋다는 거는 아님), 그다지 좋지는 않은 신경숙의 이 단편에서도, 나는 이 문장이 무척 좋았다.
처녀는 출입구에 선 채로 이따금 사람들이 벗어놓은 신발을 나갈 때 신기 좋게 나란나란 돌려놓고 있었다. 손님이 오면 나중에 신기 좋게 신발을 돌려놓아주는 것은 이 고장 사람들의 손님에 대한 대접이었다. (p.34)
벗어놓은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처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나란나란' 이란 단어가 유독 따뜻하게 느껴지는거다. 나란나란 이라니, 이건 이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말이 아닐까. 한국 소설에서만 만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은거다. 게다가 한국 사람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단어가 아닌가. 어린이든 어른이든. 결코 어려운 단어가 아니면서 이렇게 적절하게 쓰이고, 그럼으로써 따뜻한 느낌을 주다니. 아, 정말 좋다. 어쩌면 이건 어려운 단어들이 나열되며 문장을 베베 꼬아놓고 길게 늘이고 미화하는 식의 글을 싫어하는 내 취향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글은 쉽게 읽히는 글이다. 쉽게 읽힘으로써 그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는 글.
나는 먼훗날 언젠가의 크리스마스에 친근한 벗 몇을 불러들여 파티를 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혹여라도 그런 날이 오면, 그래서 나의 친근한 벗들이 나의 집으로 찾아오면, 나는 그들이 벗어놓은 신발을 나란나란 신기 좋게 돌려놓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그들을 맞고 싶다.
사진은 올해 처음 먹은 팥빙수. 어제 카레를 안주 삼아 와인을 한 병 마시고 친구와 나는 커피를 마시러 갔는데, 친구는 팥빙수를 먹고 싶다고 했다. 뒤에 있는 스마트폰은 옵티머스뷰 인데 팥빙수가 얼마나 큰 지를 비교하기 위해 친구더러 들고 있으라고 했다. 나는 팥빙수를 안좋아해서 잘 안 사먹는다. 어쩌다 동행이 원하면 그때 몇 숟가락 떠먹는게 고작인데, 어제 이 심플한 팥빙수는 일단 얼음이 굉장히 부드러워서 숟가락을 푹- 꽂는 순간 기분이 말랑말랑해졌다. 데코레이션이 뭐가 이렇게 단촐한가 싶었는데 인절미가 진짜다! 우와- 나는 인절미에 감동해서 친구에게도 인절미 먹어봤냐고, 이건 리얼이라고, 짝퉁이 아니라 정말 떡집에서 사가지고 온 그런 인절미, 리얼 인절미라고 말했다. 친구도 정말 그렇다면서 좋아했다. 팥빙수를 떠먹다가 아메리카노를 마시니 오, 세 배쯤 더 맛있었다.
알라딘의 기프티북은 정말이지 엄청엄청 좋은데(사!랑!해!요!기!프!티!북!), 나는 6월달에만 벌써 네 번째의 기프티북을 받았다. 꺄울. 완전 신나고 깜짝 놀라게 만드는게 기프티북인데, 어제 받은 네 번째의 기프티북 역시 예상외의 사람으로부터 왔다. 우리는 서로 닉네임을 부르는 사이인데, 어쩐일인지 기프티북의 메세지에서는 내 이름을 불렀다. 게다가 씨, 라는 호칭을 붙여서. ** 씨, 라는데 간질간질해져서 풋, 웃어버렸다. 이름이 불리는 건 꽤 특별한 일인것 같다. 근데 왜 나한테 기프티북을 준거지?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를 좋아하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좋은 친구로 남고 싶은데?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 아직 쓰고 싶은 말이 많은데 너무 길어져서 이제 그만 줄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