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평] 고통
그녀 역시 포도를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토의 포도송이는 즙도 많고 알이 매우 빽빽하게 붙어 있어서 도대체 어떻게 떼어 먹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테레즈는 그 포도송이를 보며 강건한 가을 신의 털 무성한 성기를 떠올렸다. 포도송이는 하루 종일 파리 떼가 달려들고 햇빛에 수분이 말라서 쪼글쪼글해졌다. 두 사람은 강력한 매력을 뿜어내는 그 포도송이에 자칫 빠져들어서는 안 되며, 맛을 볼 경우 이성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p.89)
기대하면서 읽으면 실망으로 이어지곤 하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어느 순간 색연필을 들고 밑줄을 긋고 있었다. 이 책에는 아주아주 아름다운 장면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아들과 함께 홀로 사는 여자가 매일밤 욕망에 시달리다가 숨막힐듯한 긴장감을 주는 독일군 포로를 마을에서 만나게 된다. 그녀는 그와 앞으로 사랑을 하게 될 것이란걸 본능적으로 짐작했는데, 그 첫만남 다음날, 여자의 집 정원 탁자에 포도송이가 놓여있다. 독일군 포로는 포도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지붕이 홉 덩굴로 뒤덮인 토넬 아래에는 자그마한 철제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누군가 밤사이 그 탁자 위에 커다란 포도송이 세 개를 가져다놓았다. 테레즈 들롱브르는 과연 누가 자신에게 이런 선물을 했을까 생각했다. 흑다이아몬드처럼 푸른 빛다발을 사정없이 내뿜는 그 포도송이가 그녀를 매혹했다. 포도송이는 마치 소냐 양의 젖퉁이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두툼하고 향기 나는 세모꼴을 보자 사랑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입술과 손에 쾌감이 느껴졌다. (p.88)
눈 앞에 포도가 그려졌다. 아주 탱탱한 포도가. 그리고 그 포도는 관능의 절정을 가져왔다. 포도가 이토록 관능적인 과일이었다니. 포도 한송이로 관능을 이렇게 표현해내다니. 테이블 위에 놓여진 포도를 보고, 그것을 차마 맛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이 장면들에서 나는 마치 포도 송이가 테레즈와 테레즈의 아들을 그리고 나를 숨막히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아마 앞으로 나는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한 알 떼어내 입으로 가져갈때마다 이 책의 이 장면들을 눈으로 떠올리며 극심한 쾌감에 눈을 감지 않을까. 왜 지금 우리집 냉장고에는 포도가 없을까. 왜 수박만 있는걸까.
이토록 아름답고 생생한 묘사가 이 포도 장면에서만 그치는게 아니다. 사실 그런 장면은 그녀와 그, 테레즈와 독일군 포로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려졌다.
곧이어 들판에서는 소리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 젖은 나뭇잎 하나하나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연못 밑바닥의 개구리들은 더 큰 소리로 울고, 달은 박쥐들을 앞세우며 뤼브롱 산꼭대기에 나타났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그림자가 담벽에 비쳤다. 붉게 타는 담배 끄트머리가 청록빛에 파묻혀 희미해졌다. 마법이 풀렸다. 남자들은 테레즈의 흰옷 여기저기에 자그마한 검은색 꽃들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p.83)
늘 외롭고 욕망에 시달리던 밤을 보내던 그녀의 사랑은 그녀의 아들에게만 향해있었는데, 어느날 밤 자신의 집 앞에서 독일군 포로들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설레이고 기대한다. 이 책속에서는 그녀의 그 순간의 긴장과 그 순간의 벅차는 감정이 고스란히 다 드러난다. 그녀는 그들중 한 명을 사랑하게 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서로의 모습을 분간조차 할 수 없던 그 밤, 마법이 풀려 그들은 자신들이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볼 수 있게 된다. 밤. 여자가 남자를 만나는 밤,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밤. 그리고 앞으로 여자가 남자를 안게 될 밤.
자고로 여자와 남자는 밤에 만나야 한다. 그들이 여자, 와 남자, 라면.
다음 날, 그녀는 하루 종일 오토 생각에 빠져 지냈다. 즐거웠다. 아직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를 열렬히 사랑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랑이든 자기 마음을 인정하느라 보내는 최초의 시간은 축복받은 시간이다. 특히 자신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그다지 익숙하지 못한 존재들에게는. (p.84)
그래, 사랑은 밤에 하는 것. 사랑은 밤에 하고, 밤이 오기 전까지는 하루 종일 그 사랑을 생각하며 지내자. 즐겁게, 축복받은 시간을 즐기면서.
이 얇은 책은 아름답고 찬란하고 열정적이며 고통스럽다. 그 고통은 마치 사랑이 처음 찾아올 때 그렇듯 숨막힐 지경이다. 나는 아주아주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만났다. 책장을 넘기며 긴장을 하고 눈부시다고 느끼면서, 그 고통들의 끝을 궁금해하면서도, 나는 이런 책을 만난것이 무척 즐거웠다.
좋은 책은 좋은 책이고, 아, 그런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요일은 가고 있다. 또 하나의 이 여름밤이 지나고 나면 월요일이 올테지. 덥다. 더운 밤이다. 그런데 이 더운 밤이 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