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 하지만, 예정대로 살아지지 않는 것이 삶이라고 하지만, 아, 정말 그럴 줄이야. 그러니까 이야기는 이렇다. 나는 점심 약속이 되어있는 친구와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술 약속이 되어있는 친구를 기다리기 위해 광화문 교보에 갔다. 거기서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를 들고는 아무데나 펼쳐 두 장을 읽었다. 오, 재미있었다. 다음번 주문시에 이 책을 사리라고 결심했다. 그리고는 『비밀과 거짓말』을 읽고서는 정을 떼버린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을 들고서는 첫장부터 차례대로 읽었다. 오, 재미있었다. 친구가 도착하고나서 내가 책장을 덮을때 어디까지 읽었나, 하고 확인한 페이지는 24쪽이었다. 그래, 이 책도 다음 주문에 포함하자, 라고 생각하고 친구와 서점을 나와 술을 마시러 갔다.
술을 마시고 커피를 마시고 친구와 나는 종로3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랬는데 자꾸만 은희경의 책이 생각나는거다. 나는 술에 취하면 어차피 책을 읽지 못할테니 가볍게 나가자, 싶어서 책을 들고 오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술을 적게 먹어 취하지도 않은거다. 그래,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을 사자, 사서 읽자, 읽고 싶다, 고 생각하고 친구에게 가는길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르자고 했다. 친구는 좋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 책은 완전 신간인데 있겠느냐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쩌면 누군가는 잽싸게 보고 슈퍼바이백으로 중고샵에 내놓았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중고샵에 갔다. 그러나 검색해봐도 그 책은 나오질 않았고 고객들이 방금 팔고 간 코너에도 없었으며 6개월 신간 코너에도 없었다. 아, 역시 없구나, 하고 돌아서려는데, 아, 나는 '카타리나 마세티'의 『옆 무덤의 남자』를 발견한다. 오, 이거 예전부터 사려고 생각한건데, 싶어서 꺼내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찾아보자 하고 방금 팔고 간 코너를 둘러보다가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를 발견한다. 오, 이것도 읽고 싶었던 건데. 그 책 역시 골라 들었다. 정작 내가 사려고 한 은희경의 책은 사지 못한 채, 있으면 사야지 라고 생각했던 김두식의 책도 사지 못한 채, 그러나 예정에 없던 책 두 권을 봉투에 넣고서 나는 알라딘 중고서점을 나섰던 것이다. 아..오늘 아침 도착한 알라딘 택배박스는 뜯지도 못한채로 나왔는데...
오늘 본 영화는 '오드리 토투' 주연의 『시작은 키스』였다. 목요일날 영화를 예매하기에 앞서 같이 보기로 한 친구에게 이 영화를 보는게 어떻겠냐고 물어보니 좋다고 말하면서 '원제는 섬세함이네요' 라고 했다. 오, 그렇구나. 원제까지 신경쓰진 않았는데. 그렇구나.
제목이 유치해서일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오, 재미있었다. 나는 많이 웃었는데 옆에 앉아있던 친구는 나보다 더 많이 웃었다.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는 로맨틱코미디여서 무척 기분이 좋았다.
남녀간의 사랑은 그 둘 사이의 많은 은밀함들로 채워진다. 그것에 대해서는 타인들이 결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채로 우리는 얼마나 말하기를 좋아하던가. 영화속의 여자는 모두에게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여자이고, 여자가 근무하는 회사의 사장조차도 그녀에게 구애한다. 그러나 남자는 볼품없는 외모를 가지고 있고 직장에서도 그녀보다 직급이 낮다. 사람들은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의 가장 친한친구조차도 바로 눈 앞에서 그에게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걸. 그러나 그는 섬세하고 유머감각이 있는 남자다. 게다가 그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할 줄 안다. 대체 이 남자에게 어떤 매력이 있어서 그녀는 이 남자를 선택한걸까, 하는 의문에 그와 함께 술을 마신 회사 사장은 '유머감각이 있고 성격도 좋은데 시까지 쓴다'며 속상해한다. 결국은 '예의바르기까지!'하고 탄식하고.
겉모습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정확하지 못하다.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무의식중에 우리는 겉모습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려고 한다. 연인들을 마주칠때도 어느 한쪽의 외모가 떨어진다고 생각되면, 아 저 사람은 왜 저런 사람을 만나지? 돈이 많은가? 하며 비약하기 일쑤인데, 내가 사랑과 연애를 해본 경험에 의하면, 그들에겐 그럴만한 이유와 감정이 존재했다. 다른 사람들이 겉모습만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은 보고 발견하고 느끼는 것이다.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면, 그녀에겐 그를 사랑에 빠지게 할 만한 무언가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원작이 있다. 제목 때문에 읽을까 말까를 고민했던 책이었는데 영화를 보자 읽고싶어졌다. 책에서는 그의 유머감각과 그녀에 대한 존중이 더 잘 표현되어 있을 것 같아서. 그녀의 그에 대한 고민을 알고 싶어서.
이건 좀 다른 얘긴데,
그동안에는 영화를 보다가 와인을 마시고 싶어지기도 했고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건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오, 맙소사, 가방을 사고 싶어졌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영화속의 오드리 토투는 옷도 예쁘게 입고 다니고 신발도 예쁜걸 신고 다니는데 가방도 너무 예쁜거다. 아, 어찌나 그 가방을 갖고 싶은지, 영화를 보다말고 친구에게 '나 저 가방 갖고 싶어요' 라고 말했는데 친구는 '나도 그래요!'라고 했다. 아....어쩐지 조만간 백화점 가서 저런 가방 찾아볼 것 같아. 그런데... 감당할 수 없는 가격이면 어떡하지? 아....내가 가방을 갖고 싶어하다니........
잘 안보이는데 가방 나온 스틸컷이 이것밖에 없다. 아...나를 어쩌면 좋아.....
일전에 남동생은 술에 취해서 나에게 '누난 정체가 뭐야?' 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빵터졌던 기억이 있는데, 조금전에 술에 취해서 들어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누난 외계인이야?' 라고. 아...얜.....왜이럴까. 그러더니 사과즙을 컵에 따라가지고 와서는 마시라고 준다. 나는 원래 술과 커피와 물 말고는 다른 음료를 잘 마시지 않는터라 안마시겠다고 했는데 내가 마시는걸 볼 때까지 움직이지 않겠다며 어깨 안마를 해주는거다. 건강에 좋다나 뭐라나..그래서 웃으면서 사과즙을 꿀꺽꿀꺽 마셨는데, 다 마신 컵을 가지고 가면서는 '나는 누나한테 나같은 동생이 있다는게 너무 부러워. 조낸 부러워.' 라고 했다. 아...술....정말 많이 취했구나.......
옆 무덤의 남자를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