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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평점 :
책의 두께가 얇다고해서 그 안의 내용까지 얄팍한것은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이 책은 그 사실을 가장 잘 증명해준다. 이 얇은 책 한 권이, 마음만 먹으면 앉은 자리에서 금세 읽어낼 수 있는 이 가벼운 책 한 권이, 마음을 아주 묵직하게 만들어줬다.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 이어 이 책, 『한 여자』에서도 몇 번이고 나를 울컥하게 했다. 어머니에게는 아버지보다 더 특별한 무엇이 있다. 가장 나를 속속들이 잘 아는 것도 내 어머니이고 내 짜증을 가장 빈번하게 받아낸 것도 내 어머니이다.
아니 에르노는 이미 죽은 어머니를, 죽기 전에 2년 간 알츠하이머를 앓던 어머니를, 그리고 그 훨씬 전, 자신의 유년기의 어머니를 회상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두렵고 슬펐다. 나의 어머니도 언젠가는 죽을테니까. 나 역시도 언젠가는 늙고 초라해지고 힘이 없어질테니까. 문장 곳곳에서 아니 에르노는 내게 두려움과 슬픔을 가득 안겨준다.
어떤 여자가 소리를 질러 대기 시작했는데, 몇 달 전부터 늘 그래오던 여자였다. 나는 그 여자는 아직 살아 있는데 내 어머니는 죽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p.8)
나는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친 방식이 부끄러웠는데, 내가 얼마나 그녀와 닮았는지 느끼고 있는 만큼 더더욱 생생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른 세계로 옮겨 가고 있는 나는 내가 더 이상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여전히 내 모습인 것에 대해서 어머니를 원망했다. 그리고 교양을 갖추려는 욕망과 실제로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 사이에 깊은 구렁텅이가 존재함을 깨달았다. (p.63)
4월의 어느 저녁, 아직 6시 반밖에 안 되었는데 그녀는 벌써 슬립 바람으로 시트 위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잠이 든 통에 성기가 내보임. 방 안이 무척 더웠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내 유년기의 그 여자와 같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가슴팍이 파란 실핏줄들로 덮여 있었다. (pp.98-99)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이 아닌 삶을 꾸며 냈다. 파리에 가기도 했고, 금붕어 한 마리를 사기도 했고, 누군가 자신을 남편의 무덤으로 데려가 주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씩 인식했다. 「내 상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될까봐 두렵구나.」 혹은 기억했다. 「나는 내 딸이 행복해지라고 뭐든지 했어.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걔가 더 행복한 건 아니었지.」(p.102)
나는 그녀의 방에서는 그녀와 마주 보고 앉았다. 종종, 그녀는 내 치맛자락을 쥐고 고급 천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는 듯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턱에 힘을 주고 과자 포장지를 힘차게 찢어발겼다. 돈과 고객 이야기를 했고, 머리를 뒤로 젖히면서 웃어 댔다. 그것은 그녀가 항상 보여줬던 몸짓들이었고, 그녀의 인생 전체로부터 흘러나오는 말들이었다. 나는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먹이고, 만지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p.105)
간혹 뚝뚝 끊어지는 문장들이 낯설지만, 그 문장들이야말로 이 책이 담고 있는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이 책은 이만큼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