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살면서 커다란 것을 바란적은 없다. 일적으로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이 일에서 더 큰 성취감을 얻고 싶은 생각도 없다. 별다른 야망도 없다. 재벌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미스코리아 뺨치게 예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내 방을 비싼 명품백으로 채우고 싶지도 않고 신발장에 구두를 백 켤레쯤 넣어두고 싶지도 않다. 나를 덥썩 안고 웅덩이를 건널만한 스물 여섯살의 건강한 남자를 만나고 싶은 조금 허황된 꿈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응?), 그 외에 내가 바라는 것은 소박하기 짝이없다.
나는 그저 출퇴근시간에 지금처럼 책을 읽으면서 지내고 싶고 먹고 싶을때마다 고기를 먹고 싶고 자주 술을 마시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수다도 떨고 싶다. 재미있는 책을 읽거나 아주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누군가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다. 그리고 가끔은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오기를 바라고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이 나오기를 바란다. 내가 바라는 건 정말이지 고작 그정도라니깐. 그런데!
에피톤 프로젝트의 새 앨범이 내일부터 출고된단다.
하루하루 손꼽아 이 날을 기다렸고 흑흑 내 덕분에 이들의 음악을 좋아하게 된 여동생과 남동생에게 좀 있으면 에피톤의 새 앨범이 나올거라고 며칠전부터 반복해 얘기했다. 그리고 오늘! 흑흑. youtube 에서 그들의 새로운 노래 한 곡을 듣게 됐다. 아!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이 아름다운 세상!! 눈물 난다. ㅠㅠ
나는 정말이지 에피톤의 새로운 노래를 기다렸지만, 정말 간절히 기다렸지만, 이들의 새 앨범이 나온다는 소식에, 그리고 이제 youtube 에 올라온 그들의 새 노래에 가슴이 다 떨린다. 대박 ㅠㅠ 나도 내가 이정도로 에피톤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오늘 퇴근길에 이 영상을 스맛폰에 틀어두고서 이어폰으로 이 노래를 듣는데, 아, 지금 누군가 내게 말걸면 그 사람을 미워할거야, 란 생각이 들었다. 에피톤의 노래를 들을 때 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아! 말 걸지마, 건드리지 마!!
차세정 씨. 음악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내가 바라는 건 당신이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주는 거였어요. 그걸 내가 들을 수 있게 해주어 고마워요. 당신은 내가 바라는 걸 해줬어요. 감동 ㅠㅠ
이 음악을 듣다가 나는 며칠전 읽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이 구절이 생각났다.
용무 차 남성의류 매장과 주방과 커튼 코너에 들렀다가 맥줏집으로 갔다. 십 분 일찍 도착했지만 당연히 베로니카가 먼저 와 있었고,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가 그녀를 알아볼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가방들을 내려놓자 그녀는 고개를 들고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p.199)
이 부분은 내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어찌나 마음이 따뜻해지던지. 일전의 내 모습이 여기에 겹쳐졌다. 나는 그 날 누군가와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나는, '도착해서 까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니 니가 도착하면 내게 알려달라'는 메세지를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창밖으로 그가 오는가를 살피는 대신 고개를 약간 숙이고 책을 읽었다. 만약 도착하면 그가 내게 메세지를 보내겠지만, 나는 내가 이렇게 그를 살피지 않고 책을 읽고 있어도 그가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올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래주기를 바랐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창밖으로 인기척을 느꼈고 고개를 들었을 때 거기엔 나를 보고 있는 그가 있었다. 거봐, 나를 찾을줄 알았다니깐.
책 속에서 만나는 어떤 문장들이 그렇듯이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도 이걸 한다. 추억을 꺼내어 돌이켜 보는 일. 자꾸만 자꾸만 나를 과거로 돌려놓는 일. 그날의 기분과 그때의 감정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일. 그들의 새노래 『새벽녘』의 가사처럼 수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그 속으로 푹 젖게한다. 역시나 이 노래의 가사처럼, 내가 먼 훗날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잘 지냈느냐고 묻고 싶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나는 가끔, 그 기억속에서 살기도 한다고.
나는 그날 까페에서 그를 기다리며 내가 읽었던 책이 무엇인지도, 그날 그가 입었던 옷차림도 가방도, 그가 나를 만나기전에는 무얼하고 왔는지도 낱낱이 기억한다. 와인을 한 잔 따라 마시고 싶지만, 이 노래를 들으며 와인을 마셨다가는 큰일날것 같아서, 해서는 안 될 실수를 할 것 같아서 마시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