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의 반전이 내게는 놀랍지도 않았고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좀 황당했다는 게 맞는 표현일거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또 읽고 싶다거나 생각했던 건 아니었는데, 어느 금요일 서점에 갔다가 시집을 사면서 충동적으로 이 책도 함께 골랐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혼자 우동 가게에 들러 우동을 먹으면서 시집을 펼쳐봤고, 집에 가서는 이 책을 읽었다.


몇년전에 나는 한 남자에게 연정을 품었던 적이 있다. 쉽게 말하면 짝사랑이다. 그때 나는 이 짝사랑이 엄청나게 크게 느껴졌었다. 우리는 매일매일 연락을 했고 아주 친했다. 그는 내게 웬만한 동성친구보다는 내가 훨씬 더 편하고 좋다고 했다. 내가 사소한거라도 고민할라치면 그는 언제고 내 안부를 물었고, 내 남동생과도 또 내 회사 동료들과도 함께 만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에게 고백할까 하고 여러날 고민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러다가 우리의 좋은관계가 깨질까봐 묵묵히 삼켰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가 여느날과 다름없이 내게 밤에 전화를 해왔고 나는 침대에 불을 끄고 앉아 그와 전화기를 통해 대화를 했다. 그러다가 그가 내게 말했다.


"나 공무원시험을 준비할거야."


뭐라고? 지금 오빠 나이가 몇인데? 나는 너무 놀라서 그에게 재차 확인했고, 그는 정말로 그럴거라고 했다. 지금 회사는 정리할거라고 했다. 맙소사. 나는 그가 회사를 정리하고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는 말에, 스르르, 내 안에서 사랑이라 생각했던 감정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정말로 그게 사라지고 있었다. 공부를 하겠다는 그의 말에. 아, 내가 한건 뭐였지?


그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겠다고 말하기까지 그는 직원을 여럿 거느린 벤처기업의 사장이었다. 그의 회사는 잘 되는 듯 보였고 나는 간혹 그 회사의 홈페이지에 들러보기도 했던터였다. 내 친구중에는 그를 소개시켜달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실감했다. 아, 나는, 사랑을, 머리로 했어, 가슴이 아니라. 내가 그를 사랑한 건 그가 가진 조건이었나봐, 맙소사. 나는 그에게 말했다. 공부하는데 시간 오래 걸릴텐데, 애인이 그 시간들을 견뎌줄 수 있을 것 같으냐고. 그러자 그는 말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믿고 기다려주고 격려해주지 않겠느냐고.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건 환상이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런 여자가 될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내 사랑은 그 순간에 끝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이 아니라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공부를 끝낸 남자가 좋다. 공부를 하는 남자가 아니라.


이 책은 그때의 나를 들여다보게 해준다. 이 책에 실린 단편중 「벚꽃 지다」가 그렇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공부하면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거라는 남자의 희망과 설득, 그 희망에 함께 기대고 있는 그의 엄마. 그러나 자꾸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게 되는 또다른 오늘. 희망은 대체 언제까지 희망이고 어디서부터 그것이 절망으로 바뀌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공무원을 준비했던 지인이 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시험 볼 한계 나이를 지나버렸다. 이제 더이상 시험을 볼 수 없고, 그는 아무것도 해놓은게 없는 삼십대 중반이 되고 말았다. 그의 엄마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아들에게 어떤 길을 열어줘야 할지 고심중이다. 삼십대 중반에 계획해야 하는 삶이라니, 이제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인생의 설계라니. 씁쓸하다. 그동안 그는 모아놓은 돈도 없고, 사귀었던 여자는 오래전에 그의 곁을 떠났다.  


그에게 중간에 그만두라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는 포기했을까? 만약 포기했다면 그는 지금쯤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았을까? 지금 그는 후회하고 있을까?


때때로 갈팡질팡 하는 커다란 고민앞에 놓여있을 때, 누군가가 명확한 길을 제시해줬으면 좋겠다. 바로 여기라고, 이 길이라고, 일단 이 길로만 가면 너가 실패할 일은 없을거라고, 그러니 이 길로 가라고. 그 길을 가든 가지 않든 그것은 개개인의 자유이겠지만, 때때로 나는 누군가 제시하는 길로 가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선택은 오로지 나의 몫이지만 그 선택을 차라리 누가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주 간절히 든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원망할 수 있도록, 내 자신의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있도록.


그의 시험들은 번번이 실패했지만, 그러나 그의 인생 자체가 실패한건 아니다. 그가 앞으로 하게 될 일, 하고자 하는 일들이 그에게 날개를 달아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들조차 뜻대로 되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건 아직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아직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까. 그가 내 인생의 이 결정은 훌륭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여야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제 그의 새로운 계획을 들었고, 나는 그것이 좀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삶에 끼어들 만한 관계도 아닐뿐더러, 내 앞가림조차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저 맥주를 홀짝이며 그동안 그에게 없었던 것들, 이를테면 돈이라든가 함께 갈 사람이라든가 하는 그런것들이, 그가 원하는 만큼 원하는 정도로 생기기를 잠시동안 바랐을 뿐이다. 






- 남동생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텔레비젼을 보았는데, 돌리는 채널 중 어딘가에서 신세경이 나오고 있었다. 『지붕 뚫고 하이킥』(맞나?)의 한 장면이었다. 나는 새우깡을 안주 삼아 집어먹으며 말했다.


"난 이상하게 신세경 보면 꼭 나같어."


남동생은 맥주를 뿜으며 말했다.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들은 말 중에서 가장 웃긴말이다."


남동생은 대체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냐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지만, 아 난 자꾸만 이상하게 신세경 보면 나 같단 말이다...왜그런지는...나로 모르겠지만....이상하게 나같어..




(조카 사진 내림. 그냥 순간의 변덕임. 나중에 다시..)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와 2012-02-20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미 사진보니깐, 환장하겠어요!!!

다락방 2012-02-20 16:31   좋아요 0 | URL
전 늘 녹아버려요. ㅎㅎㅎㅎㅎ

moonnight 2012-02-20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타미 너무 귀여워요. >.< 다락방님이 스르륵 녹아버리는 모습이 떠올라요. ㅋㅋ

그.. 분께 진작 고백하지 않길 잘 하셨네요. 이미 고백은 했는데 마음이 식었음을 느끼면 수습난감.(_ _);

근데, 사랑한다면 믿고 기다려주지 않겠느냐. 는 말 들으니깐 뒷바라지 몇년 해줬더니 시험 합격하고 나니깐 헤어지자고 했다는 많은 이야기들이 떠오르네요. -_-;;;;

다락방 2012-02-20 16:5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고백했는데 시험공부 할거야, 라는 말을 듣고 그때서야 이거 아닌것 같았어 라고 말하면 전 속물인증 제대로죠. 뭐, 그런게 아니어도 속물인건 만천하에 드러난 여자이긴 하지만. -_-

그당시에 그를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여자는 그의 뒷바라지를 해주겠다고 했고, 그는 그녀와 결혼을 했고 공부를 포기했어요. 지금은 회사에 들어가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늙어가고 있습니다. 하핫. 사람 사는건 다 거기서 거기 같아요.

타미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전.

꽃핑키 2012-02-2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학!! 정말 ㅋㅋ 녹아버리겠네요 +_+ㅋ 1번사진 완전 귀여워요 ㅠㅠㅠㅠ
저도 벚꽃지는 계절에를 그냥그냥 읽었어요 ㅋㅋ (잠깐 와! 하긴했지만;;)
오호 위에덧글로 쓰신 그 남자의 뒷이야기도 재밌네요 ㅋㅋㅋ
정말 다락방님 말씀처럼 사람사는건 다 거기서 거기인듯 싶어요 :)

다락방 2012-02-20 17:11   좋아요 0 | URL
우앗, 저 방금 핑키님 서재랑 네이버 블로그 갔다왔는데 완전 찌찌뽕 ㅋㅋ(오늘 일 안하고 저 왜이러나 몰라요;;)
근데 조카 사진 내리기 전에 보셨군요! 저 그냥 순간의 변덕으로 내려버렸는데 ㅎㅎㅎㅎㅎ 저는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일고 좀 벙찌다고 해야하나, 지금 나 가지고 장난하나 싶더라구요. 뭔가 대단한 반전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게 아니라 말이죠.

네, 사람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죠. 그래서 좋은건지 싫은건지..그건 잘 모르겠어요. 잘 살고 싶다는 생각 만으로 잘 살아지는건 아닌것 같아요. 후아-

책읽는나무 2012-02-20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과 타미의 관계가 뭘까?
한참 고민을 했는데...아~ 타미가 조카였군요.ㅎㅎㅎ
전 타미라는 사진 작가가 또 따로 있는 줄 알았다는~~

에혀~ 제 친구중에도 공부하던 남자가 하나 있었습니다.좀 안타깝더라구요.
4,5년에 한 번씩 딱 두 번을 동창회를 가서 그친구를 만났는데 20대 중반에도 공부를 한다고 그랬고(그땐 그게 좀 납득이 갔었어요.)..30대 중반에 만났을때도 아직 공부한다고 하던데..그땐 왜 그리 측은하게 보이던지..ㅠ
무슨 공부를 하는 것인지 가르쳐 주지도 않음서 좀 답답해보이더라구요.
서른 넘어 공부하는 남자들은 왜 그리 불안하고 무서워보일까요?ㅎㅎ
근데 이상하게 사십이나 오십을 훌떡 넘어 공부하는 남자들은 또 왜 멋있어보일까요?
세상만사에 찌든 속물인 저도 이 오묘한 감정들을 어찌하지 못하겠네요.ㅋㅋ



다락방 2012-02-20 17:38   좋아요 0 | URL
아 책읽는 나무님, 제가 조카의 사진을 올렸다가 내렸어요. 위의 댓글들은 그 사이에 그 사진을 보셨던 분들의 댓글. ㅎㅎ 예쁘다고 제 조카 사진 자랑한다고 올렸는데 갑자기 책하고 상관도 없고 책 제목도 짜증나서 조카 사진이랑 함께 두기 싫더라구요. 그래서 서둘러 내렸어요. 조카 사진은 조만간 다시 올릴거에요. 왜냐하면 자랑하고 싶을만큼 예쁘니까요. ( '')

네, 그게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하는거면 나이에 상관없이 멋지고 대단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직업을 갖기 위한 공부이고 그것이 긴 세월 계속된다면 그건 단지 멋있는것 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불러오더라구요. 물론 잘 되면 좋겠지만 잘 되는 사람은 극소수고.. 그게 시험을 보기 위한 공부라는게 그렇더라구요. 다음엔, 다음번엔, 여태 해온게 아까워서...그래서 자꾸만 길어지고 반복되어지고 그러는 것 같아요. 제가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한다고 했어도 저 역시 아마 긴 세월 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불안하고 무서워 보이죠. 그런데 섣불리 어떤 말을 옆에서 거들수도 없는것 같아요.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고 그 사람의 미래니까요. 씁쓸해요.

이진 2012-02-20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몇분만 일찍 왔었어도!!

저는 얼마전에 그 책을 다 읽었어요.
다른 작품은 엄청 재미있게 읽었는데
벚꽃지는 계절에는 짜증이 나던거 있죠 ㅋㅋㅋ

다락방 2012-02-21 08:50   좋아요 0 | URL
조카 사진은 다시 올렸어요. ㅎㅎ 이 책하고 조카사진을 함께 두고 싶지 않은 이모의 마음이었답니다. ㅎㅎ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는 전 별로였어요. 그런데 제 남동생은 최고의 반전으로 꼽더라구요. 이 책, [해피엔드에 안녕을]을 읽고 싶다고 소이진님이 페이퍼 썼던 것, 기억해요. 훗

비로그인 2012-02-20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참 솔직하시네요. 글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글 쓰는 동안만큼은 굉장히 솔직해질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글을 쓰는 걸까요? 저도 솔직하게 쓰기 위해 노력할 거에요!

다락방 2012-02-21 08:51   좋아요 0 | URL
일전에 사귀던 남자친구는 제게 그런말을 한적이 있어요. "솔직한게 언제나 좋은건 아니야." 라고. 그때 그 말이 아직도 잊혀지질 않아요. 그래서 솔직하지 않으려고 가끔은 생각한답니다. 솔직한게 기억하기 쉽잖아요, 수다쟁이님.

2012-02-20 1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2-02-21 08:5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____________^

기억의집 2012-02-20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일찍 알라딘에 들어와서 조카사진 좀 볼걸요.
오늘 아침에 잠깐 들어오고 계속 나가 있다 지금 알라딘 들어와서 못 봤어요~
얼마나 이쁠까나~

전 이 책 그저그랬던 것 같아요. 그 때 읽으면서 뭔가 심사가 뒤틀렸는데,,,그게 뭐였는지 까 먹었어요. 그 때 읽고 리뷰을 썻어야하는데,,, ^^ 전 다락방님이 졸리 닭았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 졸리~

다락방 2012-02-21 08:53   좋아요 0 | URL
정말 이뻐요, 기억의집님. 조카가 태어나기 전에는 제가 이렇게 조카를 예뻐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막상 이 작고 어린 존재를 눈앞에서 보노라니 도무지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더라구요. 정말 예뻐요. 히히. 막 보고 싶고 그래요. 여동생에게 전화를 해서는 말도 하지못하는 조카를 바꿔달라고 말해요. 조카는 뭔가를 막 웅얼거려요. 전 그걸 듣고도 좋아하지요.

기억의집님, [해피엔드에 안녕을] 읽으면서 첫번째 단편에 분노하셨었어요. 식구들을 다 죽인 소녀가 나오는데 죄책감이나 이런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요. ㅎㅎ
전 졸리를 닮고 싶지만 졸리랑은 아주 거리가 멀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dreamout 2012-02-20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읽은 글 중에서 가장 재밌는 글이예요. ㅎㅎㅎ

다락방 2012-02-21 08:53   좋아요 0 | URL
아, 드림아웃님. 다행입니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