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의 단편집, 『오래된 일기』를 읽고 있다. 아직 다 읽지는 못했고 총 아홉 편의 단편중 다섯번째 단편인 「실종 사례」를 읽고있는데, 하아, 나는 이승우의 장편인 『생의 이면』과 『한낮의 시선』을 읽고 그의 장편은 물론, 「칼」을 읽고 그의 단편도 좋아했던 바, 이 소설집 역시 현재까지의 다섯 편의 단편 모두 버릴것이 하나도 없다며 감탄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그의 단편집을 읽고 내내 놀라는건, 그의 소설이 끊임없이 나의 불편함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승우는 『생의 이면』에서 손톱깎이로 그 불편함에 대해 이미 말했던 적이 있다. 박부길이 건넨 손톱깎이, 그 손톱깎이로 자살한 박부길의 아버지. 대체 그때의 그 감정을 박부길은 어떻게 잊고 살것인가. 물론 자살하라고 건넨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 손톱깎이로 살인을 저지른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박부길에게는 '이걸 내가 건네지 않았다면..' 하는 마음이 평생을 자리잡지 않았을까.
이번 단편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래된 일기」에서 남자의 사촌형은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늘 소설을 쓴다. 그러나 남자는 소설가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사촌형은 소설가가 되지 못하고 남자는 소설가가 된다.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남자가, 되고 싶어했던 사람보다 더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한 집에 살면서 사촌형은 대학에 가지 못했고 남자는 갔다.
아주 오래전의 나는 페이퍼나 리뷰에서 이런식의 말을 했던적이 있다. 만약 내가 누군가를 열렬히 혼자 사랑하며 괴로워하고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그 상대에게는 내가 괴로워하고 있는 부분에 대하여 전혀 잘못이 없는가. 그는 단지 존재할 뿐, 그를 좋아한 내가 고통의 원인이며 과정일뿐인건가. 그런데 이승우가 이 단편에서 이런 문장을 써줬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떳떳한 일일까. (p.34)
나는 이 문장을 읽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요며칠 내가 느낀 감정을 이 문장이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더 낫다'는 확신을 가지고 아닌것을 아니라고 말하고 싫은것은 싫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상대는 상처를 받을수도 있다는 걸 모르는바가 아니지만, 내가 그것을 꾹 참고 번번이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느니, 분명하게 의사표현을 함으로써 같은일을 겪지 말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자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는 거절당하는 그 순간에는 상처를 받겠지만, 그러나 어떤걸 싫어하는 걸 알게되니 앞으로 일어날 불필요한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는 꽤 합당해보였고 이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가 상처받았다는 걸 내가 짐작은 하되 알지는 못했을때에만 이것이 당당했다. 상대가 상처받았음을 내가 알게되는 순간-내가 직접 듣거나 읽게 되는 순간-, 내가 무슨짓을 한건가 싶어지는거다. 내가 이러지 말았어야 했을까?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꾹 참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숨긴채로 내게는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계속 받아들여야 했을까? '결과적으로 더 낫다'는 것이 과연 최선인걸까? 나는 이 일로 속이 시끄러웠고 내내 마음이 쓰였는데 이승우의 저 문장을 맞닥뜨린것이다. 그래서 내내 고민했는데, 나는 그리 현명한 사람은 못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는것이 더 좋은지, 그러니까 더 좋은 다른 방법을 도무지 찾을수가 없었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중 「타인의 집」은 와- 엄청나게 무섭다. 일전의 '스티븐 킹'의 단편중 「옥수수밭 아이들」을 읽고 너무 무서워서 밤잠을 설친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옥수수밭의 살인이 곧 내게 닥쳐올거라는 걸 알고 있는데서 오는 두려움이 엄청나게 컸던 까닭이다. 무서움이란 것은 종류가 여러가지지만, 귀신이나 도깨비(응?)가 주는 두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그러니까 이 불행하고 끔찍한 일이 곧 내게 닥칠것이다, 하는 두려움이 스티븐 킹의 소설에 있었다면, 이승우의 이 단편에는 '내가 지금 누구와 함께 어떤 상태로 있는가' 혹은 '이 방문을 열면 거기엔 무엇이 있을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너무도 크게 박혀있어서, 최근에 읽은 소설중 가장 무서운 단편이 아니었나 싶다. 아직도 생각하면 가슴이 벌렁벌렁 거린다.
지금 읽고 있는 단편인 「실종 사례」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남자는 친한 이웃에게 전세금을 빌려줬는데, 이웃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빚만 늘어난채로 자신을 원망하며 살고 있었던터에 지하철 사고소식을 뉴스에서 보게된다. 그리고 9년간 위치를 알수 없었던 이웃이 그 사고로 인해 실종됐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접하게된다. 그는 그 이웃을 찾아가 보기로 결심하면서, 이웃이 돈을 갚지 못했을 당시 건네주었던 땅을 생각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전체의 가격이 50만원도 채 되지 않는 땅이었는데 몇년 전, 그 땅에 주유소가 들어오면서 가격이 엄청나게 뛰어올라 1억5천만원의 돈이 수중에 들어온 것. 그래서 그는 빚도 갚고 집도 장만할 수 있었다. 이 돈에 대해서 이웃에게 밝혀야 할까? 그러나 그것은 그가 내게 갚지 못한 돈의 아주 적은 부분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고, 그것의 가격이 오른것은 예상하지 못햇던 바가 아닌가. 또한 그 돈이 이웃이 그에게 갚지 못하고 도망간 그 돈에 대해 '갚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지 않은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 당시의 가요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의 우편엽서로 순위를 집계했었는데, 같은반 친구였던 W 가 신해철을 응원한다며 본인의 이름으로도 엽서를 보내고, 내 이름으로도 엽서를 보냈더랬다. 나 역시 그 친구처럼 신해철을 좋아했었기 때문에, 친구는 내게 말하지 않고 엽서를 보냈고, 보낸후에도 따로 말하지 않았었는데, 내가 덜컥 그 엽서추첨에 당첨이 된 것이다. 그 후로 우리집 전화는 엄청나게 울려댔다. 방송되었던 엽서가 화면에 잡혔을 때 우리집 전화번호까지 보였기 때문에, 그 전화번호를 순간포착한 전국의 내 또래 남녀아이들이 장난전화를 걸어왔던 것. 낮에도 밤에도 심지어는 새벽에도 우리집 전화벨소리는 멈출줄을 몰랐다. 전화코드를 빼놓기도 수차례. 한동안 우리는 장난전화며 폰팅제안등등의 전화에 시달렸는데, 그래서 아빠는 엽서추첨으로 받게 된 시계는 당연히 우리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러나 내 친구는 생각이 달랐다. 자신이 보내지 않았으면 당첨될 일도 없었을테니 그 시계는 엽서를 보낸 자신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시계를 친구에게 줘 버리고 싶었다. 이런식으로 신경전을 벌이기도 싫었고, 어른인 아빠가 그 시계를 욕심내는 것도 싫었다. 엽서의 주소는 우리집으로 되어있어서 시계는 당연히 우리집으로 왔고, 아빠는 그걸 아빠의 손목에 채우셨다. 나는 친구에게 시계가 도착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도 더이상은 묻지 않았다. 이 일은 내내 찜찜하다.
그래서 이승우의 단편들을 읽는 내내 불편하다. 내가 불편해하는 걸 자꾸만 언급해서. 그가 언급하는 것들이 다 나의 일 같아서. 아버지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돌아가시게 되어버린 아이는 자신이 교통사고를 낸 당사자가 아니라해도 어떻게 그 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것인가. 이런것들이 이승우의 단편들속에 들어가있다.
우리는 차마 남에게 말하지 못할 창피하고 부끄러운 그리고 속 시끄럽고 불편한 일들을 저마다 감추고 있다. 너무 찌질하고 너무 치사해서, 그리고 일종의 사악한 기운까지 느껴져서, 그래서 그것들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순간 타인이 나에 대한 인식을 달리할까봐. 들키고 싶지 않고, 그렇지만 차라리 비난을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드는 일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비슷한 상황, 비슷한 감정에 놓인 인물들에 대해 동정보다는 경멸이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이승우의 소설이 불편하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나를 자꾸 몰아붙여도 그의 소설 읽기를 멈출수가 없다. 그런 상황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나는 이렇게 찌질한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싶은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계속 이승우를 읽을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 소설을 읽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