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친구와 식사를 하다가 친구의 팔목에 걸려진 팔찌가 스르르 팔꿈치쪽으로 내려간 일이 있었다. 친구는 그래서 귀찮다고 했다. 다시 팔목으로 끌고 와야 하니까. 나는 그때 친구에게 그래서 팔찌가 좋다고 말했다. 그렇게 내려간 팔찌를 다른쪽 손으로 끌어 올리며, 아, 여기에 내 팔찌가 있어, 하고 새삼 느껴져서, 그래서 좋다고. 그런데 이 책,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에서 페터 한트케는 이런 문장을 내게 보여준다.
"일전에 손목시계를 잃어버린 적이 있어." 내가 말했다. "그다지 아끼는 물건도 아니었던데다, 그 전에는 그런 것이 내게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지. 그런데도 시계를 잃어버린 후로 손목의 빈자리가 느껴질 때면 한동안 깜짝깜짝 놀라곤 했어." (p.90)
이 책은 분량은 얇은데 쉽게 읽히질 않는다. 지루하고 재미도 없다. 그런데, 묘하게 마음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다. 음, 책 전반에 드러나는 강박증 같은것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점에 있다고 해야할까.
"가끔 난 아이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 클레어가 대답했다. "그럴때면 난 천하의 조심성 없는 엄마가 되지. 아이에 대해 도통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그럴 때면 아이는 내 주위를 무슨 애완동물처럼 돌아다니지.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내가 저 아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해. 사랑이 커질수록 죽음에 대한 불안도 그만큼 커져. 아이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자면 가끔 난 그 두가지를 더이상 구별할 수 없게 돼. 애정이 너무 깊은 탓에 그것이 외려 죽음에 대한 공포로 급변하는 거야. 그래서 아이가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뺏은 적이 있어. 아이가 갑자기 질식하는 모습이 눈앞에 보였거든." (pp.91-92)
나는 정확히 이런 걱정을 했던적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과 특히나 내 조카에 대해서. 그 아이들이 앞으로 받게 될 상처를 내가 견딜 수 없어지는거다. 아이가 자라서 어떤 위험에 닥치게 될지를 상상하니 도무지 그게 멈춰지지를 않는거다. 종국에는 내가 이 모든것들을 감당할 수가 없을것이라는 생각때문에, 오히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이 두려운 생각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결국 그 생각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때의 내가 얼마나 불안해했는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불과 몇개월전의 일이라서.
그래서 나는 별 재미도 없는 이 책을 읽기를 포기했다가 다시 집어들고 말았다.
- 어제는 정말 지독한 하루였다. 오전 내도록 해야 할 일을 전혀 하지 못한채로 보내고나니 오후에는 폭풍야근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고 해봤자 일곱시에 퇴근했지만. 오후 내내 정신없이 일하고 업무적인 건 업무적인 것 대로 또 개인적인건 그것대로 나는 슬픔과 짜증과 비참함과 우울함이 최고치에 달했다.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 원래는 금,토,일이 약속이 있는 관계로 목요일은 쉬어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아, 정말 그럴 수 없는 기분이었다.
순대국에 소주 한 잔 할래요?
나는 친구에게 물었고 친구는 그럴까요? 라고 말하고 회사 앞으로 와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순대국에 소주를 앞에 두고 마주앉았다. 우리는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소주 반 병을 비우도록 우리의 입밖으로 나온 소리는 아~, 음~, 하아~ 뜨겁다, 맛있다가 전부였다. 순대국에 푸짐히 들어간 고기들을 건져 먹고 또 깍두기를 먹고 가슴속에 소주가 들어가서 속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 마음이 사르르르 풀어지고 있었다. 아, 순대국은 영혼을 구원하는 음식인것 같아요, 라고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는 웃었다. 그리고 나는 진심을 담아 친구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지금 같이 순대국을 먹어줘서.
그 순간 순대국과 소주 그리고 마주 앉아 함께 신음 소리를 내뱉어주는 친구가 정말로, 정말로 고마웠다.
- 친구를 만나러 가기전에는 말했듯이 정말로 미친듯이 일에 시달리느라 스트레스 작렬하고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나올 무렵 여동생으로부터 문자메세지가 왔다. 열어보니 조카의 동영상이었다. 조카는 그네를 타고 있었고 까르르,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오, 맙소사. 나는 그 순간 무장해제 되어버렸다. 조건 없는 사랑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그 순간까지 나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을, 나는 조카의 웃음소리와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다 잊고 말았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 얼마전에 한 남자와 배론성지에 갔었다. 성지로 가는 길은 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았는데, 내 옆에 앉아 운전을 하던 남자는 앞에서 차가 올때마다 얌전히 한쪽에 차를 멈추고 상대의 차가 먼저 지나가도록 해줬다. 올라갈 때도 내려갈 때도 번번이 그랬다. 어제, 내가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배론성지에서의 그 일이 떠올랐다. 나는 그에게 그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그랬나?, 하고 기억하지 못했다. 언제고 한번쯤 말해주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어제였다. 그랬어요, 라고 말하며 나는 덧붙였다.
나 그때 당신이 너무 좋았어요. 반했었어.
그는 내게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대답했다.
- 어제 타부서의 y 씨가 아이폰4s 화이트를 받았다며 과장님, 기분이 너무 좋아요! 라고 했었다. 나는 그때 그 케이스만 보고 실물을 보지 못했던 상황이라 오늘 아침 출근하고 나서 타부서의 문을 노크했다. 나 아이폰 구경하러 왔어요, 라고. y 씨는 내게 아이폰을 내밀었고, 나는 그걸 구경했는데-뭐 크게 별다를 바 없더만. 근데 왜 사고싶지? ㅎㅎ-, 초기 화면에 어떤 동양 여자가 활짝 웃고 있었다. 이 여잔 누구에요? 그러자 그는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배우라며 그 영화를 봤냐고 물었다. 아뇨, 나 안봤어요. 라고 대답했는데 그 뒤로 그는 그 여자배우에 대해 극찬을 했다.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쁘다나 뭐라나. 나는 y 씨에게 아이폰을 되돌려주며 "내가 왜 아침부터 여자 칭찬이나 듣고 있는거죠?" 라고 말했다. y 씨도 L 과장도 함께 웃다가 나는 혹시 그 영화 파일 있냐고 물었다. 그는 없다고, 자신은 극장에서 보았다고 말했다. 알겠다고 말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왔는데, 좀전에 메신저로 파일 받았으니 이메일로 보내겠다고 y씨가 말한다.
나 줄라고 받은거에요?
네, 라고 대답하는 걸 들으니 오늘이 신나는 금요일이라는 실감을 하지 않을수가 없다. 음화화핫
- 나의 후버까페의 좋아하는 여성상에 나는 결코 부합되질 않는데, 이 점에 대해 후버까페에게 말하니 후버까페는 이렇게 말했다.
다락방님은 제가 가끔 언급하는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기준을 파괴시켜 버리는 수준에 계시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신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만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준파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금요일이다. 먼 데 사는 남자가 나 본다고 한시간 일찍 조퇴하고 올 예정이다. 후훗. (아마도)굿 다운로더 파괴, 여성에 대한 기준 파괴, 근무시간 파괴. 난 다 파괴 시키는구나.
You call me at night, and i pick up the phone.
앗. 이런건 알고 싶지 않은데, 검색하다보니 캐서린 맥피의 크리스마스 앨범이 나왔어. 아....어쩌지.
Christmas is time to say I lov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