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구 계단이 필요한 이유

11월의 어느 쌀쌀한 아침, 나는 지하철 2호선안에서 82퍼센트 남자아이와 엇갈린다.
솔직히 말해 그다지 잘생긴 남자아이는 아니다.
눈에 띄는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멋진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다. 머리카락은 제법 길어 뒤로 묶었고 모자사이로 묶은 머리를 빠져나오게 했다. 나이도 적지 않다. 벌써 서른 살에 가까울 테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남자아이라고 할 수도 없으리라. 물론 남자아이가 아닌 쪽이 더 낫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1미터 떨어진 그의 옆에 서서 그의 모습을 관찰한다. 그는 나에게 있어 82퍼센트의 남자아이이기 때문이다.
그의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부터 내 가슴은 땅울림처럼 떨리고 입안은 사막처럼 바싹 말라버린다. 아침에 양치를 하지 않고 나왔다는 사실도 아프게 떠올린다. 

어쩌면 당신에게도 좋아하는 남자아이 타입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팔에 타조알같은 알통이 불룩 튀어나와 있다든지, 역시 가슴에 털이 났다든지, 뒤통수가 절대적으로 동그랗다든지. 잘은 모르겠지만 육회를 먹는 남자에게 끌린다든지와 같은식의. 

나에게도 물론 그런 기호가 있다. 까페에서 차를 마시다가 만화책을 보며 킬킬거리는 옆테이블에 앉은 남자아이의 두꺼운 입술에 반해 코피를 흘리기도 한다. 

그러나 82퍼센트의 남자아이를 유영화하는일은 아무도 할 수가 없다. 그의 입이 어떻게 생겼었나 하는 따위는 전혀 기억할 수가 없다. 아니, 입이 있었는지 어땠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다.
내가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다지 미남이 아니었다는 사실뿐이다. 웬지 조금 괴상하기도 하다.  

"어제 82퍼센트의 남자아이와 지하철을 같이 탔어."
하고 나는 누군가에게 말한다.
"흠. 잘생겼어?"
라고 그녀가 묻는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럼 좋아하는 타입이었어?"
"글쎄. 생각나지 않아. 기억할 수 있는건, 그는 모자를 썼고, 머리를 묶고 있었고, 큰 손으로 스마트폰을 쥐고 오바마의 연설장면을 뚫어지게 봤었다는 것 뿐이야."
"그래서, 무슨짓을 했나? 가령 전화번호를 땄다든가, 여기서 내려요 했다든가."
"하긴 뭘해. 단지 지하철을 함께 탔을 뿐이야." 

그는 나와 같은 강남역에서 내렸다. 그러나 나와 다른 출구로 나갔다.
제법 쌀쌀한 11월의 아침이다. 나는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무작정 따라가서 그와 30분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의 신상 이야기를 듣고도 싶고, 나의 신상 이야기를 털어 놓고도 싶다. 아까 보던 그 오바마의 연설은 어떤 내용이었는지도 묻고 싶다. 오바마를 좋아하느냐고 묻고 싶다. 오바마 말고는 또 다른 누구를 좋아하느냐고도 묻고 싶다. 나는 재이슨 스태덤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고, 존 쿳시의 모든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고 얘기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011년 11월 어느 쌀쌀한 아침에, 우리가 지하철 2호선을 함께 타기에 이른 운명의 경위 같은 것을 밝혀 보고 싶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씹는 순간 입안에 흘러 넘치는 육즙처럼, 따스하고 안락한 비밀이 가득할 것이다. 

 

- 11월 17일의 목요일 아침, 지하철2호선에서 내 옆에 서있던 젊은 청년을 생각하며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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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1-11-18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런, 질문...무척 한심한 줄은 알지만...음, (못 참고) 왜 근데 82%에요? 18%의 모자람은 왜???^-^;;;

무스탕 2011-11-18 11:25   좋아요 0 | URL
앗-! 치니님 글을 보고 갑자기 생각났어요. 혹시 키가 182cm정도 되는 남자아이일까요? ㅎㅎㅎ

다락방 2011-11-18 11:5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치니님, 그 남자아이는 100프로가 될 남자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뭔가 분위기가 예술적 기운이 넘치는데, 저는 예술적인 남자를 백프로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여자사람인지라...게다가 다시 볼 것도 아니고 우연히 지하철을 함께 탔을 뿐인데 100프로 주면 좀...많이 아깝잖아요. ㅋㅋㅋㅋㅋ 사실 딱히 이유같은 건 없어요.

무스탕님, 아마도, 178정도였던걸로......기억은 됩니다만 잘은 모르겠네요. 잘생겼던데 ㅎㅎㅎㅎㅎ

비로그인 2011-11-1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글보고 품은 낭만이 댓글 보고 현실로 되돌아왔어요.
잘 생겼냐는 질문에 '아니, 그렇지 않아'라고 한 대답, 순 엉터리 -3-...

그런데 상상이 잘 안 가요. 82%의 소년... 모자를 쓰고 묶은 머리를 뒤로 뺀... 음...

다락방 2011-11-18 13:1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ㅋㅋㅋ 글은 글이고 현실은 현실이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글을 조금 잘생겼던데로 고칠까 어쩔까 ㅎㅎㅎㅎㅎ
소년은 아니고 성숙한 남성이었어요. 전 머리 긴 남자를 늘 싫다고 생각해왔는데, 그 남자는 정말 괜찮더라구요. 어쩌면 오바마의 연설장면을 보고 있는 분위기에 취한걸지도 모르겠어요. 아니면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큰 손이라든가. 뽀얀 피부였을지도 모르고. 뭐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그 순간에는 반했었어요.

아, 그런데 저 지금 수다쟁이님 서재 가서 츠바이크 글 보고 왔는데. 그 책 저도 읽어볼래요. 불끈!!

poptrash 2011-11-18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82%라고 하니 어쩐지 이름으로 보는 궁합이 생각나잖아요. 다 한 락 수 방 철, 이렇게 써놓고 획 더해서 궁합 퍼센티지를 뽑아내는 신기의 과학...

다락방 2011-11-18 14:5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 완전 뿜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다 한 락 수 방 철 ㅋㅋㅋㅋㅋㅋ 이거 진짜 퍼센테이지 뽑아볼까요? ㅋㅋㅋㅋㅋ

2011-11-18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1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1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1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weetrain 2011-11-18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안경 쓰고, 마른 남자가 좋아요. 손가락이 길면 더 좋구요.
저도 종종 버스 안에서 80%쯤 되는 남자를 보곤 합니다. ㅋㅋㅋ

다락방 2011-11-21 11:15   좋아요 0 | URL
저는 고기와 술을 잘 사주는 남자가 좋아요. 외모는 처음순간만 중요하지, 고기와 술 앞에서는 뒷전으로 밀리더군요. 물론 저의 경우에는 말입니다. ㅎㅎ

이진 2011-11-18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잘생긴 입술을 보고 코피까지 흘리시다니, 다락방님은 이렇게 순수하신 분이셨습니까 ㅋㅋㅋㅋㅋㅋ그리고.. 육회를 먹는 남자가 끌리는 것은 혹시 다락방님?? ㅋㅋㅋ

다락방 2011-11-21 11:16   좋아요 0 | URL
저는 원래 해맑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아직 아무도 그사실을 모르는데, 소이진님은 이제 눈치채셨군요. ㅋㅋㅋㅋㅋ 육회를 먹는 남자에게 끌리는건, 네, 접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버벌 2011-11-19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를 열었어요. 움. 움. 움.

다락방 2011-11-21 11:18   좋아요 0 | URL
어때요, 좀 괜찮습니까?

마태우스 2011-11-19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궁합 봐주는 프로그램에서 나온 수치인 줄 알았습니다. 글을 읽고 난 느낌은요, 잘생기지 못한 그 남자에겐 님이 너무 과분합니다. 잘생기고 키도 클 뿐 아니라 책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데다 손등과 가슴에 털이 없는 남자가 아니라면, 무조건 반대할 거예요!

다락방 2011-11-21 11:19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저는 마태우스님 생각을 하면 언제나 든든합니다. 제가 만약 제 신변에 어떤 안좋은 일이 있거나 누군가 제게 막대하는게 느껴질때는 마태우스님 생각을 할거에요. 마태우스님이라면 내 편이 되어주실거야, 하고 말이지요. 실제로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고 말입니다.
그런 남자를 제가 사랑한다고 하면 꼭! 반대해주세요, 마태우스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