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이기적(으로 보)이고 표독스럽고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나의 이해심은 그녀들을 향해 언제나 활짝 열려있었다. 에미가 베른하르트를 두고 레오에게 미친듯이 열중하는 것도, 안나가 남편을 두고 브론스키에게 끌리는 것도, 한나가 그토록 사랑했고 다정했던 미카엘을 향해 서서히 사랑을 식어가게 두는것도, 벨라가 에드워드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면서 제이콥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나는 욕하기 보다는 그럴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이해하는 쪽이었다. 나라면, 당신이라면. 그때 단호히 이것은 옳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선택하지 않겠어, 라고 말할 수 있을것인가. 아니, 그럴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타인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 욕하는 것은 옳은것인가, 아니, 거기에도 대답할 수가 없으니까. 나는 에미도 안나도 한나도 벨라도 그래, 그 모든 여자들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피라예, 피라예가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다. 아직까지는.
아직 74페이지 밖에 읽지 못해서 '아직까지는' 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74페이지까지의 피라예는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래,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나였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를 나누고 다정한 관계를 나누는 것 까지는 좋지만 나를 너의 미래에 넣을 생각은 하지 마, 이것은 스무살 여대생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생각 아닌가. 아니 그것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도 마찬가지. 나는 너의 미래에 들어갈 생각이 없고 나의 미래에 너를 넣을 생각도 없는데 너는 왜 니 마음대로 나를 너의 미래에 넣는거니, 라는 반응은 누구에게나 나올법한 반응이다. 잘못되지 않았다. 나는 너와 있는것이 재미있고 유쾌하지만 너는 나를 다른 관계로 두려는가 보지? 이런, 확실히 해야겠어. 그래, 이것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남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74페이지까지의 피라예는 뭐하나 그릇된 것도 없고 잘못한 것도 없다. 그런데 묘하게 신경을 톡톡 쪼아먹는 느낌이다. 아주 걸리적거린다. 신경질이난다. 집어던지고 싶다. 대체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이 책은 터키의 베스트 셀러이며, 800만 독자를 울린 작품이란다. 게다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는' 이야기란다. 지금의 내가 느끼는 이런 신경질적이고 짜증나는 감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물을 흘리게 하고 감동에 젖게하는 그런 감정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감으로 나는 이 책을 읽기를 중단하지는 않겠다. 조금 더, 읽어보도록 하겠다. 그러니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마, 피라예. 74페이지까지 벌써 복선이 두번이나 나왔잖니. 그걸 시시하게 끝내지는 말아주렴. 내가 널 믿어도 좋겠지, 피라예? 『슬픈 짐승』 대신에, 『헬프』 대신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대신에 널 집어든거란 말이다.
가방에는 늘 '우먼스 타이레놀'이 들어있다. 그걸 아플때마다 번번이 먹는 건 아니지만, 그것이 내 가방속에 언제나 들어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내게 위안이 된다. 가방을 바꿔서 들고 외출할 때 타이레놀을 챙기지 않았더니 내가 몹시 초조해지더라. 그래서 나는 가방을 바꿔서 들고 갈 때에도 이제는 타이레놀을 꼭꼭 함께 옮겨준다. 그런데 아뿔싸, 이번에 출근할때 못옮겼다는 것을 회사에 와서야 알게됐다. 괜찮아, 내일은 챙기자. 이러면서 벌써 수요일이 되었다. 나는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내 가방에 타이레놀이 없다는 걸 불현듯 떠올리고는 안되겠다, 사자, 라고 생각했다. 여러개 사서 사무실 책상에 하나 두고, 이 가방에도 하나 두고, 저 가방에도 하나 두자. 그러면 나는 초조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을것이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런데 출근길의 약국은 모두들 아직 오픈하지 않은 상태였다. 아 짜증나..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타이레놀은 그것들의 리스트중 가장 꼭대기에 있는데. 점심 먹고 나가서 사가지고 와야겠다. 나는 타이레놀이 너무 좋아서, 그것을 먹었을 때 나의 극심한 생리통이 혹은 두통이 없어져서, 그리고 그것을 먹으면 없어질 수 있다는 그 안정감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그것이 가방에 들어 있는게 몹시 만족스러워서, 그래서 그것이 없으면 두렵다. 나는 타이레놀의 존재가 고마워서 그리고 그것을 믿고 의존하는 내 자신을 알기 때문에, 타이레놀을 소재로 단편소설을 써보고자 한 적도 있다. 몇 줄 쓰다 말았지만.. ( '')
가끔, 아주 가끔. 내게 어떻게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내게 있지, 싶어지는 그런 사람. 신이 나를 총애하셔서 선물해주신 건가 싶어지는 그런 사람. 내가 세상을 잘 살아가서 내게로 온걸까 싶어지는 그런 사람. 지하철을 그냥 보내면서 통화하게 만드는 남자사람이 그렇고, 가을방학의 노래를 들으면 떠올려지는 여자사람이 그렇고, 실패따위는 빨리 잊으라는 말을 적어 책을 주는 남자사람이 그렇고, 우리의 관계를 오래도록 유지하고 싶다는 여자사람이 그렇고, 털어봤자 별로 털릴게 없을거라는 담백한 여자사람도 그렇고. 이들만 있으면 나는 평생 친구가 더 생기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이 자체로 충만하니까. 나는 한번도 새로운 관계에 목말랐던 적이 없다. 이거면 된다, 이거면. 딱 이만큼이면. 이들은 내게 타이레놀보다 더 효과가 빠른 처방이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음악을 알까, 정말 난 멋지다, 생각되어지는 그런 음악도 있다. 바로 이런 노래를 들을 때 그런 생각을 한다.
오늘 아침 버스안에서는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지도 않았고 음악을 듣지도 않았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너무 한적해서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시간이 멈추면 안돼.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서 조용히 혼자 앉아 지금처럼 창밖을 바라보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낯선 곳. 그곳은 낯선 도시였으면 좋겠다. 낯선 도시, 낯선 까페, 낯선 사람들, 낯선 공기. 그리고 나. 하루종일 한마디의 말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아니, 커피를 주문하는 정도의 말은 허락되어도 좋을것이다. 아니, 밥을 주문하는 말도.. ( '')
출근해보니 책상 위에는 뜨거운 커피가 놓여있었다. 동료가 사다 둔 커피. 뚜껑을 열고 커피를 한모금 마시는데, 그 뜨거운 커피가 온 몸에 퍼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행복해졌다. 머릿속으로 오늘 업무 사이에 끼워 둘 나의 사적인 일 몇가지를 생각했다. 기억해 두어야지. 타이레놀을 사고, 바디 버터를 사고, 우체국을 가야지. 잊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