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퇴근부를 찍고 상트 에리크 광장의 헬스클럽으로 갔다. 그리고 그동안 못한 운동을 두 시간 동안 마치 야생동물처럼 격렬하게 했다. 저녁 7시경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간단한 저녁식사를 요리하고, TV 뉴스를 시청했다. 7시30분경 마음이 잡히지 않자 다시 조깅복을 입었다. 현관 앞에 가만히 멈춰 서서 평소와 다른 마음의 상태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빌어먹을 블롬크비스트. 휴대전화를 들고 그의 T10 번호를 눌렀다. (P.101)  

 

 

 

 

 

 

 

 

 

미카엘 블롬크비스트.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미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너무 많이 가버렸다. 그런데 그는 '여자 친구를 정해놓고 만나는 타입'은 아니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 빌어먹을 자식은 시리즈 전반에 걸쳐 눈앞에 나타난 모든 여자와 잔다. 그는 세상의 비리를 고발하고 싶은 남자이고, 사적인 영역을 건드리고 싶어하지 않는 남자지만, '여자 친구를 정해놓고 만나는 타입'은 아니라고 밝힘으로써, 정해놓고 그를 만나고 싶은 여자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물론 그에게 매력을 느낀것도 또 그에게 옷을 벗기고 싶다고 말하는 것도 다 여자들이다. 여자들이 먼저였다. 미카엘은 항상 그녀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타인의 성생활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니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주변의 여자들은 그가 누구랑 자는지 알면서도 그것들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자신도 그들중의 하나가 되는걸 감당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전혀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시간이 지나면 다 똑같아지듯이 특별한 놈 없듯이, 여자인 나도 다른 여자들보다 더 특별할 것 없다. 만약 미카엘 같은 남자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면 나는 다른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와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여자들처럼 그렇기 때문에 가슴 아파했을지도 모른다. 농담은 상대도 같이 웃을때 농담이다. 나도 잊고 상대도 잊을 수 있을 때 쿨하다는게 성립된다. 나 혼자 웃는건 농담이 아니고, 나 혼자 잊는건 쿨한게 아니다. 나는 여자를 정해놓고 만나지 않아. 이 말 한마디가 상대인 여자를 사랑에 빠지게 하고 상처 입게 하는 것들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는 살아 있었다. 그렇지만 에리카 베르예르가 팔로 그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모니카는 미간을 찌푸렸다. (구판,3부-하권,p.246) 

이자식은 1부에서도 같은 이유로 리스베트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니 이번에도 모니카의 미간을 찌푸려지게 한다. 왜 그에게는 그토록 잘해주고 싶어하는 여자가 많을까. 왜 그에게는 그토록 매력을 느끼는 여자가 많을까. 짜증나. 어쨌든 나는 못느꼈다. 나는 시리즈 전반에 걸쳐 그가 별로였다. 그런데 이런 그의 마음도 움직일 때가 있다. 

"그런데 당신은 이제껏 내가 만난 그 누구보다 매력적이야. 첫날부터 우리의 관계가 충만한 것 같았어. 당신이 날 데려가려고 우리 집 계단에서 기다렸던 그 순간 난 이미 당신을 뜨겁게 사랑했어. 당신이 그리워 한밤중에 갑자기 깬 적도 있었어. 내 자신이 확실한 관계를 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난 당신을 잃을까봐 너무 두려워." (구판,3부-하권,p.200) 

오. 그리운 마음으로 잠이 깰 수도 있구나. 처음 본 순간 뜨겁게 사랑할 수도 있구나. 이건 좀 뻥같고 멘트같다. 처음 보는 순간 어떻게 뜨겁게 사랑해. 뻥치시네. 아니야, 그럴수도 있나? 가만있자...그런적이 있었나..........처음 보는 순간 심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던 적은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사랑은 아닌 것 같은데? 음, 미카엘은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나? 그렇다면 그럴수도 있겠구나. 사랑에 대한 정의는 각자가 다르니까. 그리운 마음으로 새벽에 잠이 깬다는 것, 이게 너무 좋다. 이렇게 여자에게 고백하는 미카엘이 이 순간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나는 '충만한' 관계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충만하다는 느낌이 드는 관계, 라니. 생각만으로도 충만해진다. 생각하다가 조금, 소리 없이 웃었다.  

 

『밀레니엄』시리즈의 3부 하권은 밀레니엄 시리즈 전부를 통틀어서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앞의 다섯권이 해주지 못한 걸 이 책이 해냈다. 이 마지막 권은 내 마음을 조금 움직였다. 리스베트가 그 모든 고통을 혼자 감당하고 견뎌왔다는 사실이 처음 나오는게 아닌데도 이번 권에서는 눈물이 고였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철저히 혼자라고 생각되는 그 기분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긴시간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이제 그녀는 괜찮아질 수 있을까?  

 

사람들은 사소한 말들로 다른사람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위로할 수도 있다. 또 새로운 진실에 눈뜨게 해줄수도 있다. 나는 이래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일이 몹시 즐겁다. 얼마전에도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시다가 내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입장에 대한 얘기를 친구가 언급하는 걸 듣고 아, 그럴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조금 풀어지는 걸 느꼈다. 나는 미처 그렇게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며칠전에는 회사동료 y군과 메신저로 대화를 하다가 '편안한게 사랑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요' 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에도 나는 놀랐다. 오 맙소사. 나는 편안한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y군의 말인즉슨, 편안함도 사랑의 일종이라는 거였다. 그래, 그럴 수 있겠어. 사랑이 편안하고 편할수도 있지. 나는 왜 사랑에 열정과 설레임만이 필요충분조건 이라고 생각한걸까?  

이 책속에서 리스베트에게 재정관리 변호사가 사소한 말을 리스베트에게 건넨다. 그러나 나로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을. 

"그 친구를 사랑했어요?" 그는 난데없이 그게 궁금했다.
리스베트는 곰곰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결국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난 사랑에 빠지는 성격이 못돼요. 그녀는 친구일 뿐이에요. 성관계는 좋았지만."
"사랑에 빠지는 걸 영원히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정은 사랑의 가장 평범한 형식이에요."
리스베트는 당황하여 맥밀란을 쳐다보았다.
"내 개인적은 생각을 얘기해도 될까요, 그러면 화낼 겁니까?"
"아니요."
"꼭 한 번 파리에 가보세요." 그가 말했다.
(구판, 3부-하권,p.364)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아주 생각이 많아졌다. 우정은 사랑의 가장 평범한 형식이라니. 나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이었다. 우정은 우정 그 자체고, 그것은 그대로만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의 몇몇 우정이라 칭할 수 있는 관계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인정했다. 어떤 우정엔 사랑도 있었음을. 애써 우정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속임수였음을. 나는 어떤 사람들은 잃고 싶지 않았고, 앞으로도 잃고 싶지 않으니까. 맥밀란은 아마도 이것이 가장 쉬워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복잡하기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라는 말을 미리 덧붙였던 게 아닐까. 우정은 사랑의 가장 평범한 형식이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을 붙이는 그 마음이 어떤건지 알 것 같다.  

대체 이 세상에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소한 사실들이 얼마나 존재하는걸까?  편안함도 우정도 사랑일 수 있다는 이 작은 사실을 왜 나는 그동안 놓치고 산걸까? 내가 또 놓치고 있는건 뭘까? 

 

 

 

 

그나저나 이 상품은 볼때마다 살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데 하루특가네. 어쩌지. 아, 나는 내가 갈등하는 상품이 하루특가로 나오지 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잖아.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않는 한 내내 다른것들에 집중할 수가 없을텐데. 나는 뭐든 질질 끌고 갈등하는게 싫다. 빨리빨리 쇼부치고 마음이 평온해졌으면 좋겠는데...그러려면 이 지구본을 사야할까?아, 이런거 고민하는 내가 너무 싫어.. 

 

 

 

12월달에 에피톤 프로젝트 공연 있단다. 꺅 >.<
가겠어, 가겠어, 가주겠어. 차세정씨, 다락방 누나가 보러 갈게요. 12월달에 하다니, 이뻐 죽겠네요. 므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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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1-10-1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은 하나에요.
잘생긴거죠. ㅎㅎ

레와 2011-10-13 17:17   좋아요 0 | URL
추천. ㅋㅋㅋㅋ

다락방 2011-10-14 15:45   좋아요 0 | URL
전 겉모습보다는 내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3=3=3=3=3=3=3=3=3=3=3=3=3=3=3=3=3=3=3=3=3=3=3=3

... 2011-10-1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이 뜨는 지구본! 코스코나 다른 상점에 전시되있는걸 볼때마다 한번씩 쓰다듬어 보고 와요. 언젠가 너를 데리고 살 날이(?) 올거다. 이 페이퍼 보고 헉, 해서 봤는데 가장 작은 거예요 ㅜㅜ 저는 가장 크고 가장 밝게 빛나는 모형을 살거라구요, 언젠가는!

밀레니엄은........ 저는 1부로 종결. 3부까지 끝내신 다락방님 존경 ㅎ

웽스북스 2011-10-13 17:54   좋아요 0 | URL
저도 1부에서 더 못나가고 있어요. 마음은 원이로되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네요. ㅎㅎ

다락방 2011-10-14 15:46   좋아요 0 | URL
저는 방에 놓을구석이 없어서 크면 큰일나요. ㅎㅎ
저 이거 오늘 도착했어요. 꺅 >.<


브론테님도 웬디양님도 1부에서 멈춘 시리즈를 다 읽었다고 생각하니 뭔가 억울해요. -_-

꼬마요정 2011-10-13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저도 고민하던 아이네요. 하루특가로 나와서 결제단계까지 갔다가 돌아왔어요.ㅜㅜ
차세정씨 너무 좋아요. 제 아이폰에 에피톤 프로젝트 노래 한 가득.. 오늘은 '오늘'이라는 노래가 제 심금을 울렸어요.. 흑..
밀레니엄은 최고의 소설이었죠, 저한테. 제 가슴을 움직였다고나 할까요..
우정은 사랑의 평범한 형식이라는 말이 제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잃고 싶지 않은 사람.. 다른 사람의 반려가 되는 걸 보더라도 잃고 싶지 않다는 건 어떤 걸까요... 흠.. 가을이 깊어가네요.

다락방 2011-10-14 15:47   좋아요 0 | URL
저도 차세정을 사랑합니다. 콘서트에 꼭!! 가겠습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차세정씨 목소리 듣는데, 아우, 이 남자는 목소리가 진짜, 화를 못내게 하는 목소리랄까. 듣고 있으면 막 좋아요. 나한테 책도 좀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히융

다른 사람의 반려가 되고 또 내가 다른 사람의 반려가 되도 분명 유지하고 싶은 관계들이 있죠. 전 그렇게 살고 싶어요. 유지하면서.
가을은 깊어가고 다락방은 살쪄요. orz

2011-10-13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평온해지시라고 제가 대신 주문넣었습니다.
만원만 받을게요ㅎㅎㅎㅎ

다락방 2011-10-14 15:48   좋아요 0 | URL
이럴 줄 알았다면 저는 페이퍼에 지구본을 넣는대신 강남의 아파트 한채를 넣는건데 그랬습니다!!!!!

근데 만원은 왜 받으시겠다는건지..( '')

2011-10-14 16:56   좋아요 0 | URL
내가 10억짜리 아파트를 계약할게요.
5억만 받을게요. 이번엔 먼저 넣어주세요.
(이런 식으로 사기치는거구나ㅎㅎㅎ)

다락방 2011-10-14 17:03   좋아요 0 | URL
오 그러네. 일단 작은건 잘 주는척 하면서 큰거는 먼저 받기. 사기의 기본을 충실히 따르는구나. 내가 5억을 넣어줄것처럼 보이나요? 천만의 말씀. 흥!!(절대 5억 없다는 소리는 안한다)

2011-10-13 18: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4 15: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1-10-13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정은 사랑의 가장 평범한 의식....예리한 말이에요. 때로는 우정을 가장해서 내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비호를 받으려고도 했던 기억이 스멀스멀 나요.

저 지구본. 저는 이미 질렀답니다. ㅋㅋㅋ 잠시 갈등하다, 아이 교육용이라는 핑계로요.^^;;

다락방 2011-10-14 15:54   좋아요 0 | URL
저 지구본 오늘 배송됐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음..우정을 가장해서 지내다가 못견디고 사랑을 고백한 적도 있어요. 잃을 각오를 하고. 가장하는게 너무 힘들어서요. 뭐, 이젠 다 지난 일이지만 말입니다.(갑자기 눈물이 막.. ㅠㅠ)

버벌 2011-10-14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구본인데... 불이 들어오는거 있잖아요. 스탠드가 지구본으로 된것. 그래서 불을 켜면 지구본에 불이 들어오는거. 제가 그게 너무 가지고 싶어요. ㅎㅎㅎ 찾고 있는데 마땅한게 눈에 띄지 않아요. ㅠㅠ 우정은 사랑의 가장 평범한 형식.. 아아... ㅠ 얼마전에 나는 가수다에서 김경호와 김연우가 부르는 사랑과 우정사이를 듣고. 또다시 급 몰입을 하는 바람에.. 바람에.. 바람에.......

다락방 2011-10-14 15:55   좋아요 0 | URL
버벌님..제가 링크한 지구본이 불 들어오는 지구본인데요. ㅎㅎㅎㅎ 전기 꽂으면 별자리로 불들어오는 스탠드형 ㅋㅋㅋㅋㅋ 전 이제 생겼지롱요. 메롱~

저는 나가수에서 조규찬이 [이 밤이 지나면]부르는거 듣고 급 감정이입. 그댈 떠나보내야만 하나~~~~ 눈물이 ㅠㅠ

버벌 2011-10-17 17:05   좋아요 0 | URL
그랬구나.. 내가 건성으로 링크를 지나쳤구나.... 불이 들어오는 지구본이란걸 미처 알지 못했구나. 그랬구나....... ㅠㅠ 엄청 뻘쭘. ㅠㅠ

무스탕 2011-10-14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꽤 오래전에 제가 끌어 안으면 제 팔이 모자라는 크기의 지름을 가진 거대 지구본을 본 뒤로 그것이 눈에 삼삼하게 떠올라 가끔 슬퍼요.
저런거 집에 갖다놓고 지구를 걸어다녀야 하는데.. 하면서요.
피스톤이 아닌 에피톤이 다락방 누님이랑 도킹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군요. ㅋㅋㅋ

다락방 2011-10-14 16:07   좋아요 0 | URL
저는 지구본이 예전부터 꼭 하나 갖고 싶었더랬어요. 히히. 이번기회에 생겼네요. 이제는 벽에 걸 수 있는 커다란 판넬 세계지도 마련에 힘을 쏟아야겠어요. 저는 세계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싶은 욕망은 없는데 세계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은 욕망은 있어요. 히히.

아우, 에피톤씨 만날날이 너무 기다려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