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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해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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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친구가 왓섭으로 보내준 문장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온 문장이라며. 나는 저 문장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으니까. 일전에 우울이 극을 달리고 있을 때, 친구가 보내준 일회용 드립커피의 향을 맡고 흐물흐물 풀어져 버린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딸기가 그랬다.
딸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아닌데, 이상하게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마도 봄이 왔다는 생각 때문일까? 아침에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식탁에 딸기 바구니가 보였다. 엄마는 먹기 좋게 꼭지를 다 따두셨다. 으악, 딸기다. 그리고는 밥을 먹는 내내 흥분해가지고 이 수다 저 수다 떨고 있으려니 엄마는 쟤가 아침부터 딸기를 보더니 흥분해서 정신이 나갔다고 하셨다. 하하하하. 어제까지 완전 기분 엿같아서 술을 퍼마시는 나날들이었는데, 밤에는 잠도 오질 않았는데, 그 모든 고통들이, 젠장, 딸기 하나로 풀어지다니.
그리고 오늘 점심. 동료와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잔 마시느라 까페에 앉아있다가 문득 창 밖을 보았는데, 오! 꽃이 피고 있었다. 막, 마아악, 피려고 하고 있었다. 맙소사. 너무 좋잖아!
조금 있으면 활짝 필걸 생각하니 신난다. 올림픽공원에도 그리고 어린이 대공원에도 가야지. 어린이 대공원에 가서 사자랑 호랑이를 보고 와야지. 낙타 똥 냄새를 맡고 와야지. 타조도 보고 곰도 봐야지. 많이 걸어야지. 힐을 신고 걸을거야. 두 발이 부르트도록.
그리고 사진을 찍어야지. 활짝 핀 꽃사진을, 무서운 호랑이 사진을.
'렌조 미키히코'의 『연문』을 읽었을 때도, 나는 그가 다루는 화려하지 않은 사람들, 부족하지만 그러나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퍽 만족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책 『회귀천 정사』에도 그런 인물이 나온다.
두번째 단편, [도라지꽃 피는 집]의 주인공 남자인데, 그는 스물 다섯인데 머리숱이 별로 없다. 그래서 외모에 자신이 없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나 역시 꽤 긴 시간을 외모 컴플렉스에 시달렸었기 때문에. 감정이입이 너무 되서 이걸 결코 남 이야기로 읽어 낼 수가 없다. 그런 그가 걸어가던 길, 한 소녀가 도라지꽃을 창위에서 뿌린다.
신발 끈이 잘 묶이지 않아 쇼후칸을 뒤늦게 나서는데, 히시다 형사의 등은 이미 골목 귀퉁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뒤를 쫓아가려고 서둘러 막 뛰어나가려 할 때,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가 내 얼굴을 스치며 바닥에 떨어졌다. 문득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발끝을 보았다. 신발 끝이 물웅덩이에 떨어진 그것을 밟고 있었다. 진흙 범벅이 되어 짓밟힌 그것은 이미 형태를 잃었지만, 그래도 도라지꽃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불쑥 고개를 들었다. 내가 서 있던 곳은 스즈에의 방 창문 아래였다. 창문의 반은 커튼에 가려져 있었고 인기척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걷기 시작하자 다시 도라지꽃이 떨어졌다. (p.93)
이 소녀가 도라지꽃을 떨어뜨린 이유를 밝히고 싶은데, 그것은 엄청난 스포일러가 된다. 아, 정말 좋은데. 그 꽃을 떨어뜨린 이유는. 나도 창가에서 누군가를 향해 꽃을 떨어뜨려 보고 싶은데. 이 소녀와 같은 이유로. 열여섯 살 소녀만이 떠올릴 수 있는 동기, 바로 그 이유로.
퇴근까지 이제 두시간, 나는 이제 일을 좀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