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반짝 빛나는
왜 집에서는 책만 펴면 졸릴까? 에라이, 잠이나 잘까 하고 누웠는데 잠이 안온다. 그런데 책을 다시 펴면 졸립고.. 시간을 보니 아홉시가 좀 넘어있었다. 그래, 책도 안 읽히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이나 보자, 하고 나는 TV 를 켰다.
어제도 안보고 오늘도 처음부터 안봐서 또 그동안의 스토리를 모르지만(난 드라마 중독 안되는 여자사람 ㅎㅎ 멋져!) 어쨌든 김현주랑 이유리가 싸워서 사이가 안좋고, 김현주는 김태우(이름이 맞나;;)를 만나 순대국집에 술을 마시러 간다. 이유리는 김석훈에게 자기를 출판사 직원으로 뽑아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 순대국집으로 간다. 한껏 차려입고서.
김석훈은 쫀쫀하고 고지식한 사람이다. 입에 발린 말을 할 줄도 모르고, 매너는 있되 여자들에게 아닌건 아니라고 말 하는 사람이다. 나는 그가 그런 남자인게 무척 좋은데, 이번회에는 그런 모습을 절정으로 보여준다. 김태우가 술에 취하고 김현주가 '내 동행이니 내가 책임지겠다' 고 말하고 그를 데리고 나간다. 김석훈은 보다 못해 따라 나가서 자기가 그를 보내겠다고 말하며 김현주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현주는 됐다고 말하고, 김석훈은 하지 말라는건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더니 결국 김태우를 택시 태워 보내고, 김현주가 대리운전을 부를까를 고민한다고 하니 자신이 운전해서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그때의 그에게는 순대국집에서 자신을 만나러 왔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김현주는 김석훈에게 이를 상기시키고 내가 알아서 갈테니 그녀에게 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김석훈은 김현주의 옆자리에 앉아 이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용건을 간단히 말한뒤에, 나는 그곳에 돌아가지 않으니 기다리지 말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김현주를 데려다준다. 아우, 내가 김현주였다면 이때 마음에 안정과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을까. 피스-
김현주를 데려다주고 난 김석훈이, 김현주에게 말한다. 앞으로는 술친구가 필요하면 그녀석 부르지 말고 나를 부르라고. 아니, '술'자를 빼도 된다고.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그러자 김현주는 친구가 인디언말로 뭔줄 아느냐고 묻는다. 김석훈은 모른다고 한다. 김현주가 얘기한다.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에요.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갈 수 있겠어요?"
그랬다. 김현주는 요즘 많이 슬펐다. 힘들었다. 김현주에게 필요한건 정말로 자신의 편이 되어줄만한, 슬픔을 함께 나누어줄 만한 사람이었다. 절실했다. 이유리의 심정이야 모르는바 아니지만, 나는 김현주가 너무 불쌍해서 김석훈의 대답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김석훈이 그래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고.... 가 봅시다. 그래봅시다."
라고 김석훈은 김현주에게 얘기한다. 김현주는 놀란다. 그렇게 말하는 김석훈도 두근두근하지 않았을까. 나는 이 드라마를 꼬박꼬박 본게 아니어서 김석훈이 김현주와 이유리가 병원에서 어릴때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다. 그걸 알기 때문에 힘이 되어주고 싶은건지, 모르는데 김현주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김석훈은 김현주를 보고 김현주를 신경쓴다. 그리고 이제는, 드디어, 김현주의 슬픔을 등에 지고 가겠다고, 그러겠다고 얘기한다. 그런 얘기를 듣는 김현주라니, 오, 신이시여!
무엇보다 나는 김석훈이 김현주를 신경쓰는 이 때에, 김현주에게 잘 해주고 싶고 김현주에 대해 마음을 굳혀가는 이 때에, 이유리에게 신경쓰지 않아서 좋다. 김석훈은 이유리에게 공정하려고 할 뿐 사적인 관심은 없다. 인간적으로 도움을 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녀에게 신경쓰지는 않는다. 이유리는 김석훈의 안중에 없다. 이유리는 자신이 갖고 싶어하는 모든걸 김현주가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치를 떨겠지만, 그래서 점점 더 비열해지겠지만, 아마 앞으로 김석훈을 갖기 위해 무엇이든 할테지만, 김석훈은 흔들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괜히 웃으며 이유리에게 잘해주지 말았으면, 이유리에게 친절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유리에게 다정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유리에게 전화 걸지도 말고, 이유리의 전화를 받는다면 업무적으로 용건만 간단히 하고 끊었으면 좋겠다. 미적지근한 태도로 이유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현주를 신경쓴다면 내내 김현주에게만 신경 썼으면 좋겠다. 김현주로 하여금 '이유리는 신경쓰지 않아도 돼'라는 확신을 갖게 했으면 좋겠다. 이유리가 농담해도 잘 웃어주지 말고, 이유리가 눈물을 흘려도 그걸 닦아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유리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줄 수는 있지만 거기에 빨간약은 발라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눈물을 닦아주고 농담에 웃어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상처에 빨간 약을 발라주는 건 오로지 김현주에게만 해줬으면 좋겠다. 김석훈이 등에 슬픔을 지고가고자 할 때, 그 슬픔은 김현주의 것이기만을 원한다. 이유리의 슬픔은 이유리가 혹은 다른 사람이 지고 가도록 내버려뒀으면 좋겠다. 김석훈의 등에 김현주의 슬픔이 아닌 다른 사람의 슬픔은 얹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가 다른 여자에게는 친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특히 그녀에게는.
나는 TV를 켜는 대신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는 쪽이 나았을 것 같다. 괜히 TV 는 봐가지고 넷북을 켰고, 괜히 글을 썼고, 괜히 커피를 내렸고, 괜히 마늘빵을 데워 먹었잖아. 이 시간에 커피를 내려 마셨으니, 대체 이제 나는 뭘 한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