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시절, 담벼락에 이 영화의 포스터가 엄청나게 붙어있었다. 나는 이것의 원작 만화가 있다는 건 알지도 못하는채로, 아우 이게 뭐야, 박쥐인간? 이러면서 이 영화를 무시했다. 유치해. 하면서. 그때 당시에는 영화 포스터가 담벼락에 붙어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칵테일도 그랬고, 폭풍의 질주도 그랬고, 배트맨도 그랬다. 나는 그 당시에 영화를 꽤 좋아했지만, 이런 유치한 영화는 보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박쥐인간이 뭐니, 세상에나.
그러다가 주말의 명화로 이 영화를 텔레비젼에서 방송해준다는 티비프로그램을 보았다. 나는 토요일마다 주말의 명화를 보기는 했었지만, 이 영화는 안봐, 하고 내 할일을 하다가, 우연히 채널을 돌리면서 이 영화의 중간즈음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와- 엄청 재미있는거다!!
나는 부랴부랴 그 중간부터 녹화를 시작했다. 다 보고나서 그 다음날 일요일 녹화된 테입을 돌려보고 결국 비디오로 빌려서 처음부터 다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내 영화속 최고의 영웅은 배트맨이 된다. 박쥐인간. 배트맨으로 돌변하기 전의 남자는 사실 그다지 흥미가 없었는데, 배트맨 옷을 챙겨입은 그는 멋지다. 최고다. 게다가 그는 부자영웅. 배트맨으로 변신하지 않아도 이미 그 도시의 힘있는 남자. 그런데 그는 정의를 위해 싸운다. 져스티스! 그 뒤로 배트맨 시리즈를 다 보았는데, 배트맨은 역시 마이클 키튼이 가장 훌륭했다. 영화 [퍼시픽 하이츠]의 악당 마이클 키튼은, 이 영화에서 정의롭고 멋진 남자로 다시 태어난다. 멋져.
마이클 키튼이 최고의 배트맨이라면, 킴 베이싱어는 최고의 '배트맨의 연인'이다. 나는 이 영화속의 킴 베이싱어가 무척 좋았다. 그 뒤로 나오는 미셸 파이퍼도, 니콜 키드먼도 아니라 킴 베이싱어. 그녀는 가끔 멍청해 보이기도 하는데, 어쨌든 그녀는 내 사춘기 시절 최고의 섹스심벌이었다. 그리고 지금이야 그녀를 킴 베이싱어라 부르지만 중학생 시절의 나와 내 친구들은 그녀를 킴 베신저라 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킴 베이싱어 보다는 킴 베신저가 낫지 않나? 베이싱어가 뭐야.. 만가수..도 아니고.
킴 베이싱어가 나오는 영화를 많이 봤지만(그녀는 그러니까 정말 잘 나가는 배우였다) 내가 그녀의 작품중 그녀를 가장 근사하게 봤던건 리차드 기어와 주연했던 [노 머시 no mercy] 였다.
이 영화의 한장면. 리차드 기어가 그녀를 데리고 도망을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킴 베이싱어는 내 기억이 맞다면 악당의 여자였다!), 한 외딴집에 들어가서 목이 마른 그녀가 허겁지겁 수도꼭지에 입을 대려고 하자 리차드 기어가 그녀를 밀치며, 왜이래 글 못읽어? 먹을 수 없는 물이라고 써있잖아! 라고 소리치는거다. 그래, 킴 베이싱어는 이 영화속에서 글을 읽지 못하는 여자였다.
당연히 리차드 기어와 킴 베이싱어는 함께 도망다니다가 사랑이 싹트고 어쩌고 하는데, 제일 처음 리차드 기어가 킴 베이싱어를 보는 장면이 꽤 근사했다. 그러니까 그가 킴 베이싱어를 처음 볼때, 그녀는 어깨가 드러난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녀의 한 쪽 어깨에 문신이 있었던거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새(bird)였던 것 같다. 앵무새였나.. 그녀의 늘어뜨린 곱슬거리는 금발과 하얀 어깨, 하얀 드레스, 그리고 문신. 이게 너무 예뻐서 나는 '기필코 성인이 되면 반드시 문신을 하리라!' 고 결심했더랬다. 그 시절에.
[나인 하프 위크]보다도 나는 이 영화속에서의 킴 베이싱어에게 더 관능미를 느꼈다. 분위기가 그러니까, 음, 어쨌든 관능적이였다니까.
뜬금없이 배트맨과 킴 베이싱어에 대해 생각하게 된 건 오늘 아침 들었던 이 노래 때문이었다.
출근길 버스안에서 나는 책을 읽으려고 펼쳤지만 아무 글자도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나는 이래저래 심란한 마음에 엠피삼에 있는 음악들의 리스트를 살펴보다가, 언제나 그랬듯, 심란할때 안정시키기 위해 듣는 이 음악을 선택했다.
이 음악은 어느 해 봄, 금요일 밤에 만난 남자가 토요일 밤에 메신저로 전송해준 곡들 중 한 곡인데, 그때 전송받은 곡들중의 페이버릿이 이 노래는 당연히, 아니다. 패이버릿은 가을, 올림픽공원에서 혼자 달 보며 한시간 동안 들었던 곡인데 그 곡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사람은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야 살고, 그 곡은 내게 빠져나갈 구멍이며 믿을만한 구석이다.
봄에 그 곡을 건네준 남자는 내게 봄이었다. 계절이 여름일 때 그는 내게 여름이었고, 계절이 가을일 때 그는 내게 가을이었다.
발 킬머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발 킬머가 배트맨인건 그다지 마음에 들질 않는다. 미셸 파이퍼가 싫은건 아니지만 미셸 파이퍼가 배트맨의 여자인 것도 마음에 들질 않는다. 배트맨은 마이클 키튼 이었으면 좋겠고 배트맨의 여자는 킴 베이싱어 였으면 좋겠다. 나는 다른 배트맨들과 또 다른 배트맨의 여인들을 계속 지켜봐왔지만 내 마음속의 배트맨과 배트맨의 여인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으로 바꿀 마음이 추호도 없다.
나는 배트맨이 좋다. 배트맨은 영웅중의 최고다. 엑스맨도 슈퍼맨도 스파이더맨도 배트맨을 이길 수 없다. 배트맨이 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