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번이고 무언가를 쓰려고 하다가 결국 40자평밖에 쓰질 못했는데, 이 책은 정말 대단하다. 아직 올해의 3월이 채 다 지나지도 않았지만, 나는 올해 읽은 가장 충격적인 책을 이 책으로 선택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세명의 남자에게 강간당한 루시의 선택에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결코 최선이 아니라고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서서 그녀를 설득하고 싶은 심정. 그녀의 선택이 너무 끔찍해서 이 책에 별을 하나만 줘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책장을 덮고 다시 그게 최선이었을까를 끊임없이 생각해보고 나니 최선이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고 있지 않다. 나는 농장에 혼자 살고 있지도 않다. 내가 같은 입장이 된다면 같은 선택을 했을지 알 수 없지만, 정말 그러고싶지 않지만, 어쩌면 그녀는 '그럴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중에야 들었다. 이 책을 읽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을 고를수가 없었다.
기분이 좀 나아지게 피츠제럴드의 단편선을 읽을까? 트와일라잇의 외전을 읽는게 낫지 않을까? 제임스 조이스의 단편을 읽자, 굿바이 쇼핑은? 이래저래 생각하다가 오늘 출근길, 나는 아무런 책도 들고 나오지 못했다. 어떤 글자도 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봄비가 올거래, 라는 엄마의 말에 그저 우산만 들고 나왔다.
아니 근데 이 책 띠지에 '김혜수가 읽고 있는 책' 이란건 대체 무슨 의미지? 그래서 뭐 어쩌라고?
쉬지 않고 읽을 정도로 흡인력이 있는 재미있는 소설이지만, 나는 아마 앞으로도 이 책의 시리즈를 다 구입해서 읽을 것 같지만, 이 책에는 지나치게 불륜이 많고 지나치게 비열한(혹은 약한, 무너진) 인간이 많다. 아니, 사실 현실자체가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책장을 덮고 나면 거기서 바로 끝나버리는 소설.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특히 나탈리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십년전에도 그리고 십년이 지난 후에도 한결같이 한 남자를 좋아하는데, 그 남자는 나탈리를 좋은 친구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의 앞에서 항상 다른 여자 얘기를 한다. 십년 후, 그녀는 결국 그 남자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그녀와 함께 외딴곳에 숨어 있으면서, 그곳 침대 위에서도 다른 여자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안되는 줄 알면서 다른 여자의 이름을 입밖으로 내뱉게 되고 결국 나탈리는 폭발한다. 왜 너는 나랑 있는데 항상 다른 여자 얘기를 하는거야!
- 토요일, [반짝반짝 빛나는] 드라마의 여운이 좀 길어서 여동생에게 오늘 그 드라마 봤냐, 좋더라 하는 문자메세지를 보냈다. 여동생은 봤다고 내일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거기에 나오는 김현주 삼촌(박유환)이 내 옛날 남자를 닮았다고 또다시 문자메세지를 보냈더니 여동생은 흥분하며 싫다고 했다. 발음 샌다고. ㅎㅎ 어쨌든 나는 자정을 넘어 여동생에게 한껏 감상에 취해 문자메세지를 또 보냈다.
[장난끼있고 예의바른 아이. 연하였어.]
이렇게 보내놓고 자꾸만 그 놈 생각이 나서 또 보냈다.
[보도블럭을 걸을 땐 내가 힐 신은것까지 신경쓰는 놈이였지.]
새벽, 과거의 남자를 떠올리며 여동생에게 추억을 얘기하는 나. 아, 몰랑몰랑해, 이러고 있는데 20분이 지나서야 여동생에게 답장이 왔다.
[식빵이랑 쪼코하임이 먹고시푸다]
후아.......orz 언니는 남자 얘기 하고 있는데, 어떻게 동생이란 아이는 식빵..얘기를 하는걸까? 식빵이랑 쪼코하임 먹고 싶은 얘기를 대체 왜 그 새벽에 나한테..
여동생으로부터 다음날 일요일 오후, 문자메세지가 왔다.
[쪼코하임 던킨 식빵 몽땅샀다 ㅋ]
이 아이 머리엔 그저 쪼코하임과 식빵 뿐이구나.
이 가수의 목소리도 그다지 좋질 않고 계속 들으면 질리는 목소리라 이 시디를 처음 사고 준 별점은 셋이었다. 아마 지금 다시 별점을 줘도 셋 보다 더 줄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이 시디를 산 지 일년도 넘었는데 나는 요즘 이 가수의 피흘리는 사랑 -bleeding love-과 좋아지겠지 -better in time-을 매일매일 빠짐없이 반복해 듣고 있다. 어느날 가사를 검색해 봤다가 아주 쑝 가버려서.
But I don't care what they say, I'm in love with you
They try to pull me away but they don't know the truth.
으윽, 이것이 피흘리는 사랑이고, better in time 에서 당신 없는 겨울이 가장 길다고 말한다.
It's been the longest winter without you
I didn't know where to turn to
See somehow I can't forget you
After all that we've been through
All I know is, I'll be okay.
- 책 대신 우산을 가져온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잠실역. 버스에서 내렸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축축했다. 내 머릿속엔 일어났던 일들과 앞으로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일들로 가득했다. 그러니 여러모로 나는 좀 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