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론스키는 키릴 이바노비치 브론스키 백작의 아들인데, 페테르부르크의 젊은 귀공자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표본 중 하나야. 난 그자를 트베리에서 알게 됐어. 내가 거기에서 근무할 때 그자가 신병 징집을 하러 왔었거든. 재산도 상당하고 미남인 데다 발도 넓고, 시종무관 이겠다, 게다가 또 무척 귀엽고 착한 사내란 말야. 아니, 그저 단순히 착하기만 한 게 아니야. 내가 이곳으로 돌아와서 알게 된 바로는 교양도 있고 아주 총명한 사내야. 말하자면 뭐랄까,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전도양양한 사내야." (p.85)
그러나 브론스키는 내게 그다지 매력있게 다가오질 않는다. 착한 사내? 귀여운 사내? 흐음, 글쎄. 아직 1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브론스키는 정말이지 매력있는 남자가 아니다. 전혀 내가 사랑에 빠질 만한 남자도 아니고. 그러니까 그는 내게 평범한, 세상의 모든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은 남자인데, 그런데 그를 다른 남자들과 구분 지어주는 특징이 있다. 단 한가지의 특징, 그는, 안나를 건드린다. 안나의 내면을 건드리고 안나의 눈빛을 건드린다.
그런데 갑자기 거기서 또다시 전혀 새로운, 뜻밖의 여자가 돼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안나에게서 그녀 자신도 경험이 있는 성공에서 오는 흥분의 빛을 발견했다. 그녀는 또 안나가 스스로 불러일으킨 환락에 도취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키티는 이 감정과 이 조짐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금 안나에게서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그 눈 속에서 떨리며 불타오르는 광채를,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지게 하는 행복과 흥분의 미소를, 그 동작에 나타나는 한층 또렷한 우아함과 확실함과 경쾌함을 보았던 것이다. (pp.164-165)
사람들 다른 사람들과 구분지어주는 특징은 바로 그런데서 오는 것 같다. 나를 움직이는 사람, 나를 빛나게 하는 사람. 그러니까 나를 자꾸 웃게 만드는 사람, 나를 자꾸 설레이게 만드는 사람. 다른이들이 보기에 그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데, 그다지 다를바가 없는데 나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그 한가지의 특징.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를 완벽한 사람으로 느끼게 만드는 게 아닐까. 게다가 브론스키는 안나에게 더할나위 없이 적극적이다. 이미 남편이 있고 사교계에 명성이 자자한 안나에게.
"난 당신이 이 기차에 타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어째서 돌아가세요?" 그녀는 승강구의 난간을 붙잡으려던 손을 내리고 말했다. 억누를 수 없는 기쁨과 되살아난 생기로 그녀의 얼굴이 빛났다.
"어째서 돌아가느냐구요?"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되물었다. "내가 당신이 계시는 곳에 있고 싶어서 왔다는 것은 아실텐데요. 난 이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p.206)
후아- 난 이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 당신의동작 하나하나도 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잊을 수 없습니다‥‥‥" (p.207)
아이쿠야, 이 고백을 듣는 안나가 "그만하세요, 이제 그만하세요!" (p.207) 라고 밖에 대체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브론스키의 이런 행동은 꽤 부럽기까지 하다.
그는 자기 객차 옆에 멈춰서서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한 번 더 봐야겠다.' 그는 저도 모르게 히죽 웃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 걸음걸이, 그 얼굴을 봐야겠다. 틀림없이 무슨 말을 하겠지. 고개를 돌려 쳐다보고, 그리고 어쩌면 생긋 웃어줄지도.' (p.210)
어릴적에 한 남자사람에게 '여자는 먼저 고백하기 힘들잖아요'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는 '남자도 힘들어요'라고 말했더랬다. 그때야 나는 비로소, 아 그렇지, 남자라고 먼저 고백하는게 쉬울리가 없어, 라는 생각을 했던게 문득 생각났다. 누구든 상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일이, 그러니까 상대에게 어쩌면 거절을 당할지도 모르면서도 고백을 한다는 행위가 남자라고 쉬울리 없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사랑하고 애태우는 마음에 대해서도 같을거다.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 무언가 내게 말을 건네주길 바라는 마음. 그것은 상대를 사랑하고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모두에게 솟아나는 마음이 아닐까.
그러나 사랑은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로운가. 게다가 자신의 처지가 약하게 느껴질수록 불리하게 느껴질수록 더 그렇다.
"만약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나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녀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제발 내 마음이 안정되도록 해주세요." (p.277)
안나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거다. 안나가 기혼자여서, 아이가 있어서 이렇게 말한다는게 아니라, 사랑을 시작할때, 그리고 사랑을 진행해 감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조금쯤 불안하지 않을까. 상대가 나에게 확신을 주기를, 안정되도록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마찬가지. 나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질 것이다. 내 마음이 안정되도록 해달라고.
안나는 브론스키에게 우리는 친구가 되자고 말한다. 그러나 오, 브론스키, 그는 얼마나 용감한가!
"우린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도 알고 계시잖아요. 우리 두 사람은 그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든지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되든지 둘 중 하나예요.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p.278)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니, 오!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나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단호함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까!
오전중에 아주 기분 나빠지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분명하게 이 통화가 싫고 그렇게 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상대는 끝까지 본인의 말을 들으라고 했다. 그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나보다 직급이 높았기 때문에 나는 그사람이 끊기 전까지 전화를 끊을수가 없었다. 그 전화를 끊고 나서는 내내 기분이 나빴다. 산책을 가자는 동생들에게 너희들끼리 다녀오라고 했다. 아침부터 텔레비전에서 기사식당 돈까스를 보고 먹고싶다고 노래를 했었는데, 산책을 다녀오던 동생들이 전화로 불러낸다. 돈까스 먹자고. 나는 나가서 돈까스를 함께 먹으면서 이 기분을 어떻게 달랠까, 너무 답답하다, 돈까스를 씹으며 고민하다가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올림픽공원으로 갔다.
이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한적했고 바람이 불었다. 나는 잠깐 멈춰서서 사진을 찍었다.
올림픽 공원에는 사람이 많았다. 은행잎도 단풍잎도 아주 예쁜 색깔로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은행잎들을 두 발로 꾹 밟아보았다.
곳곳의 벤치에는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올림픽공원에 산책 나온 사람들이 아주 많았는데, 나는 아주 예쁜 여자사람을 보았다. 그녀는 구두를 신고 있었고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도 예뻤고 머리도 예뻤고 몸매도 예뻤다. 그녀는 한 남자와 함께 걷고 있었다. 나란히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는 그 커플은 보기에 아주 좋았는데, 나는 문득 저 남자는 저 여자가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저렇게 예쁜데, 저렇게 예쁜 여자와 이렇게 좋은 곳을 함께 걷다니. 지금 저 남자는 행복하지 않을까, 하고 내 맘대로 추측을 해봤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벤치에 홀로 앉아 책을 좀 읽어야지 싶어졌다. 오늘 내가 준비한 것은 맥주 대신 『안나 카레니나 2』였다. 은행잎이 수북하게 쌓인 바로 앞의 벤치에 앉아 자전거를 세워두고 책을 읽으면 기분도 나아지고 집중도 잘되서 후딱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걸, 다섯장정도 읽고 나니 손이 시려웠다. 몹시 추웠다. 이빨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나는 후다닥 책을 가방에 넣고 다시 자전거를 몰아 집에 왔다. 집에 와서도 내내 추워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초저녁 잠을 조금, 잤다.
다시는 추운데 혼자 나가서 책 읽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