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앤드류스'의 『다락방의 꽃들』에 나오는 남자주인공 '크리스'를 사춘기 시절 내내 사랑했었다. 내 마음대로 얼굴을 상상하고 매일 생각하니 꿈에도 나오곤 했었다. 그 후에 사랑한 남자주인공은 '마리 스탠판드 바이트'의『올훼스의 창』에 나오는 크라우스였다. 나는 이 책을 소설로 읽었는데 만화가 원작이란다. 어쨌든 크라우스를 또 어찌나 사랑했는지, 그가 어느날 유리우스에게 '너에게선 피 냄새가 나.' 라고 말했던 것이 내내 기억난다. 나는 어쩌면 창 밖으로 크라우스를 만날 수 있진 않을까 하는 사춘기 소녀다운 환상에 젖어 살곤 했다. 그 후에는 시간이 한참 흘러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레오를 사랑했다. 레오는 가끔 어리석고 얄미우며 표독스럽게 변하기까지 하는 에미를 다 받아준다. 당신은 어떻게 키스를 하냐는 에미의 물음에 글 쓰는 것 처럼 한다는 레오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크리스도, 크라우스도 다 잊고 레오에게만 올인하고 있었는데,
아 됐다, 왜 레오를 사랑하기를 멈추었는지는 패쓰하자. 여자가 남자를 포기하는 이유를 설명해 무엇하랴. 구질구질하다.
이런 황무지같은 내 마음에 판탈레온이 찾아왔다. 나의 마음은 황무지 차가운 바람만 불고 풀 한포기 나지 않는 그런 황무지였어요, 라는 노래가사가 내내 떠오르는 내게 판탈레온이, 판탈레온이, 판탈레온이 찾아왔다.
로 진행되는 페이퍼를 작성해 놓았는데 차마 공개하지 못하고 비공개로 감춰두었다. 왜냐하면 너무,
개인적이어서, 은밀해서, 구질구질해서, 찌질해서, 그리고 지독하게도 사랑을 고백해서. 이건 뭐, 판탈레온에게 푹 빠져 정신을 차릴수가 없더라. 이 남자를 내가 구해내야 한다. 이 남자를 내가 데리고 와야 한다. 이 남자를 군대에서, 페루에서,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에게서 데리고 도망쳐야 한다. 나는 그런 미친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그리고 외딴섬에 가서 둘이 사는거다. 그러나 판탈레온은 만족하지 못할거다.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만 군대로 돌아가고 싶어할거다. 군복을 꺼내어 입으려고 할거다. 말없이 보내줘야지, 그래요 그래야 당신이 행복하다면 가요, 라고 정말로 울지도 않고 떼쓰지도 않고 보내줘야지. 그렇지만 언제든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든다면, 돌아와요. 나는 당신 아내처럼 당신을 떠나지 않아요, 나는 미스브라질처럼 당신을 지겨워하지도 않을거에요. 내내 여기에 있을거에요. 아무데도 가지 않아요. 당신을 사랑해요.
이쯤만, 페이퍼에 쓰기로 한다.
틈틈이 '신디 메스턴'과 '데이비드 버스'의 『여자가 섹스를 하는 237가지 이유』를 읽고 있는데, 이 책 너무 재미있다. 그러니까 뭐 성이나 섹스의 심리라든거에 대해 새롭게 뭔가를 깨닫게 된다거나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켜준다거나 하지는 않는데, 이거 뭐 원서가 원래 이런건지 번역이 이런건지 단어 선택이 예술이다.
문장을 보다가 뿜기를 수차례. 일례로 어제 읽다가 낄낄거린 부분은 이렇다. 여성들이 자기 몸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잡지나 패션모델들 같은 몸매를 타고날 비율은 전체 여성의 5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하면서,
가십 및 패션 주간지들을 도배하다시피 하는, 어깨뼈가 스웨터를 찢고 나올 것 같은 비쩍 마른 영화배우 사진들을 보며 한 페미니스트 웹사이트는 "불가능한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했다. (pp.284-285)
아, 완전 만족스러워. 어깨뼈가 스웨터를 찢고 나올 것 같은, 이라니! 눈물나 ㅠㅠ 내 어깨뼈는 절대로 스웨터를 찢을 일이 없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나에게 어깨뼈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척추는 없는 것 같고 ;; 일전에 목욕탕에 갔을때 등을 구부린 여동생의 척추뼈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그 뼈들을 만지며 물었었다. 야, 이게 뭐야? 그러자 여동생은 척추지, 바보야? 척추 몰라? 아, 이게 척추구나. 난 몰랐어. 난 없거등. 그러자 여동생이 언니 척추가 없어? 한다. 나는 응, 없어...라고 답했지. 여동생은 언니도 척추 있어, 라고 말했다. 다만 만져지지 않을 뿐...
이 책에 재미있는 표현이 아주 많아서 (심지어 개새끼라는 말도 나온다!) 다 읽고 나면 따로 페이퍼를 써 볼 참이다. 아 이 책 정말 ㅠㅠ 웃겨 ㅠㅠ
오늘 아침 내가 내린 커피향은 온전히 판탈레온에게 보낸다. 다른 사람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